상제·학교·공법·사창·정병 유방에 관한 윤효손의 상소문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 윤효손(尹孝孫)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엎드려 성지(聖旨)를 보건대, 여러 신하들이 비록 진달(陳達)하는 바도 있으나, 만약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간여할 바가 아니다.’ 하면서 함묵(含默)하고 말하지 않으면, 이는 이른바 ‘군문(君門)이 천리보다 멀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까닭으로 알겠는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조정(朝廷)에 1천 명의 신하가 있었지만 소공(昭公)이 나라를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고, 활[弓]이 9석(石)이 없어도 안정(安定)을 종신토록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두려움이 더욱 깊은데 왕의 말씀은 크고, 왕의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언로(言路)를 열고 시정(時政)을 물어서 지극한 다스림에 거듭 이르기를 구하는 뜻은 지극합니다. 대저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성현(聖賢)의 글을 읽었다면, 누군들 당세(當世)의 일을 말하여 명주(明主)가 아시도록 도와주고자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대정(大庭)의 대책(對策)을 올려도 강도(江都)의 명이 내리시고, 불골표(佛骨表)200) 를 올려도 조양(潮陽)의 견책(譴責)이 따르고, 드디어 당론(讜論)을 듣지 못하도록 하고, 아첨하는 말을 날마다 올리게 된다면, 심히 국가의 복(福)이 못될 것입니다. 이제 성상의 유시(諭示)가 이와 같으시니, 신이 감히 자리에서 나오는 것을 혐의(嫌疑)스럽게 여겨, 끝내 묵묵히 있으면서 말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너그러이 포용(抱容)하여 주시어 말씀을 아뢰는 길을 넓혀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삼가 《예기(禮記)》를 보니, 이르기를, ‘사(士)는 달[月]을 넘겨 장사하되, 그달에 졸곡(卒哭)하고, 대부(大夫)는 석 달만에 장사하되, 다섯 달만에 졸곡하고, 제후(諸侯)는 다섯 달만에 장사하되, 일곱 달만에 졸곡하며, 사(士)는 3우(三虞)하고, 대부(大夫)는 5우(五虞)하고, 제후(諸侯)는 7우(七虞)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임금[君]이 이미 졸곡(卒哭)하면, 왕사(王事)에 돌본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졸곡(卒哭)하여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날은 길제(吉祭)로 상제(喪祭)를 바꾸기 때문에 이 제사는 점점 길례(吉禮)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조(國朝)에서 혼인[嫁娶]을 금하고, 도살(屠殺)을 금하는 것이 졸곡(卒哭) 전에 있으나, 대사(大祀)에 음악을 쓰는 것은 졸곡(卒哭) 후에 있습니다. 종친(宗親)과 백관(百官)에 이르러서도 졸곡(卒哭) 후에는 상복(喪服)을 없애고, 3품(品) 이하의 처(妻)와 서인(庶人)은 졸곡(卒哭) 후에 모두 길복(吉服)을 입습니다.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일찍이 하교(下敎)가 있으시기를, ‘옛날의 예(例)를 참고하고 인정(人情)을 참작하여 임시 제도[權制]를 정(定)한다. 왕세자(王世子) 이하는 3일 안에 조금 죽[粥]을 먹고, 3일 후에 밥을 먹으며, 달이 넘으면 조금 술을 마시고, 졸곡(卒哭) 후에는 고기를 먹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졸곡(卒哭)이란 것은 흉례(凶禮)를 바꾸어 길례(吉禮)를 따르는 큰 예절이니, 중하고 엄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광릉(光陵)201) 의 장사하는 기한(期限)을 다만 사위[拘忌]하는 것 때문에 3개월을 쓰기로 선택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나, 졸곡(卒哭)할 기한이 또 뒤따라 임박하니, 신은 두렵고 미안(未安)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예기(禮記)》의 중월(中月) 제도와 선왕(先王)의 이미 행하신 기한에 의하여 5개월을 기다렸다가 졸곡(卒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학교(學校)는 풍화(風化)의 근원이라 옛부터 제왕(帝王)들이 중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나서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5세에 대학(大學)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는 이제 삼왕(二帝三王)202) 의 다스림이 위에서 융성하고 풍속이 아래에 아름다운 까닭은 백성을 가르치는 데 그 도구(道具)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대학(大學)을 세우니, 생도(生徒)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군학(郡學)에도 모두 다 가득찼습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크게 명유(名儒)를 부르고 생원(生員)을 증광(增廣)하니, 학당(學堂)에 다니는 사람이 8천여 인이었습니다. 삼대(三代) 이래로 이때에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정(朝廷)에서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도덕(道德)을 중히 여기며, 문(文)을 숭상하고 교화(敎化)를 일으켜 학교에 유의(留意)를 하였으니, 가위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부군현(州府郡縣)에 생도(生徒)들이 정원이 있으나,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군대(軍隊)에 편입하는 데에 병폐가 되어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정원 숫자가 차지 못하고 녹(祿)을 구하는 자도 또한 즐겨 학교에 나아가지 아니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학교가 발전하지 못하고 인재(人材)가 드물게 나오는데, 그 성상(聖上)이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인재(人材)를 만드는 뜻에 있어서 어떠하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배워서 넉넉하면 벼슬을 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삼년을 배우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한 사람을 내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음사(蔭仕)로 승습(承襲)하는 무리들이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자 이미 녹(祿)을 구하는 마음이 있으니, 어찌 3년 동안 배우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발은 학교의 문턱을 밟지 아니하였는데, 이름은 이미 사판(仕版)에 오르니, 오직 영화(榮華)를 흠모할 줄은 알아도 어찌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통달하겠습니까? 대저 경서(經書)를 궁구(窮究)하는 것은 장차 쓰려고 함이고, 도(道)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을 구제(救濟)하려고 하는 것이며,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그 정원을 증광(增廣)하고 사장(師長)을 신중히 가려서 그 책임을 오래 맡겨 교양(敎養)하는 데 전심(專心)하게 하고, 뜻이 있어 배우기를 원하는 생도(生徒)들을 모두 취하여 가르치게 하고, 어진 사람은 저장하여 길러서 쓰기를 기다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돌려 보내서 군사에 대비하게 하소서. 음직(蔭職)을 이어받는 사람을 모두 취학(就學)하게 하여,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중에 1경(經)에 통달하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벼슬하도록 허락한다면 학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요, 인재(人材)가 배출될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많은 여러 선비들이 있어서 문왕(文王)이 편안하시도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주(周)나라 임금이 수고(壽考)203) 하시니, 어찌 인재(人材)를 만들지 아니하랴?’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재를 만드는 도(道)는 또 전하(殿下)께서 성학(聖學)을 밝게 하시고 몸소 행하여 솔선(率先)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엎드려 성상께서 유의(留意)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삼가 우공(禹貢)을 보건대 오직 금(金)은 3품(品)이었는데 홀로 양주(梁州)에서만 생산되지 아니하였고, 형주(荊州)에서도 또한 바쳤으며, 역양(嶧陽)의 고동(孤桐)과 사빈(泗濱)의 부경(浮磬)은 9주(九州) 가운데 서주(徐州)에서만 홀로 바쳤으니, 다른 주에서는 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인(聖人)이 토양(土壤)에 따라서 공물을 만드신 뜻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대저 땅에서 소산(所産)이 있으면 바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인데, 공물(貢物)이 토산(土産)이 아니라면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을 것입니다. 이제 공안(貢案)도 또한 성인(聖人)이 공물(貢物)을 만드신 아름다운 뜻이나, 금(金)을 바치라는 데에는 할 말이 있습니다. 신이 살고 있는 전라도(全羅道)의 한 도를 가지고 말하면, 진안(鎭安)·임실(任實)·순창(淳昌)·옥과(玉果)·곡성(谷城)·순천(順天)·광양(光陽)·구례(求禮) 8고을은 금이 나는 큰 내[川]에 벌려 있으므로, 그 적거나 많거나 나는 것에 따라서 옛부터 모두 바쳐 왔으니, 행하여도 폐단이 없으며, 매우 좋은 법입니다. 일찍이 경차관(敬差官)의 일시적인 억견(臆見)으로써 7고을[邑]의 금을 전적으로 감(減)하여 버리고, 홀로 구례(求禮)의 한 작은 고을[縣]에 더 정하여 4냥쭝[兩]이라는 많은 수에 이르렀으니, 신이 그윽이 의혹스럽습니다. 금이 나는 물[水]은 8고을에 모두 있는데, 8고을 가운데서도 구례(求禮)가 가장 잔폐(殘廢)하여 백성들의 호수(戶數)도 겨우 1백 30여 호(戶)뿐입니다. 옛날에 3전(錢)의 금도 오히려 능히 바칠 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4냥쭝[兩]의 많은 금이겠습니까?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7, 8년을 채취(採取)하게 하더라도 일년의 공물(貢物)을 충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백성들의 비탄(悲歎)과 곤고(困苦)를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옛날 그대로 금이 나는 모든 고을에 나누어 정하여, 민생(民生)을 편안하게 하고 지리(地利)를 다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신이 또 들은바 경상도(慶尙道)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진주(晉州)의 그 지리(地利)는 건시(乾柿)이고, 안동(安東)의 그 지리(地理)는 백자(栢子)였는데, 지금은 건시(乾柿)의 공물(貢物)을 상주(尙州)에 나누어 정하니, 상주(尙州)에서는 진주(晉州)에서 사들이며, 백자(栢子)의 공물을 다른 고을에 나누어 정하니, 다른 고을에서는 안동(安東)에서 사들이므로, 왕복(往復)하는 사이에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특별히 심한 것만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신은 청컨대 조관(朝官)을 나누어 보내어, 그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함께 한 도의 공안(貢案)의 숫자를 들춰내어 각기 그 지방의 소산으로써 짐작하여 나누어 정하면 거의 차오(差誤)가 없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금(金)과 은(銀)의 공물을 면제하기를 청(請)하여 여러 차례 책문(策問)에 진달(陳達)한 것은 그 지방의 소산이 아닌 까닭입니다. 이제 모든 도(道)의 황금(黃金)의 공물을 공안(貢案)204) 에 기재하여 팔방(八方)에 밝게 보이는 것이 의리상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중외(中外)의 해당 관사에서 별도로 기록하여 간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사창(社倉)205) 의 설치는 본래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함인데, 백성과 더불어 이(利)를 다투는 것과 같으니, 그 선(善)한 기능을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사장(社長)206) 이 적당한 사람이면 거두고 나누어 주는 일이 고르고 공평하여 백성들의 이익이 될 것이며, 그 이식(利息)을 10분의 2를 능히 취하여, 국가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거두어 나누어 주는 데 고르지 못하여 원망(怨望)을 백성들에게 사게 될 것이니, 한 가지 불리한 점이요, 민간(民間)에 나누어 주고 말하기를, ‘거두어 들일 능력이 없다.’고 하고, 해마다 이와 같으면 두 가지 불리한 점이요, 자기의 소유(所有)와 같이 보고 마음대로 써버리고서는, 말[斗]을 헤아릴 때에 칭대(稱貸)207) 하여 숫자를 보충하여,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없으니, 세 가지 불리한 점입니다. 심한 자는 술자리를 베풀고 친구를 불러 날마다 이짓을 일삼아서 관곡(官穀)의 태반을 포흠(逋欠)하여 버리고, 그 책임이 장차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면, 혹은 ‘불이 났다.’ ‘도적을 만났다.’고 칭탁하거나, 또는 뒤따라 도망하여 흩어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네 가지 불리한 점입니다. 먼 마을에 흩어서 쌓아 두었다가 혹은 불우(不虞)의 변(變)이 있다면, 누가 능히 지키겠습니까? 이는 장차 백성을 구제하려 하다가 마침내 적(敵)을 도와주는 셈이니, 비록 지혜가 있는 자라도 어찌 능히 그 뒤를 좋게 하겠습니까? 신은 그 가(可)한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모든 고을에 다시 의창(義倉)208) 을 설치하여 힘써 축적(蓄積)하기를 넓히고 빈민(貧民)들을 진휼(賑恤)하여서 수해(水害)와 한재(旱災)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 도(道)에 큰 진(鎭)을 두고 정병(正兵)을 머물게 하여 불우(不虞)를 방비하게 하는 것은 그 염려가 깊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머물러 방비하는 군졸(軍卒)이 대개 그 진(鎭)에 많이 살고, 혹은 근방의 여러 고을에 살므로 조석(朝夕)의 염려를 하지만 장구(長久)한 계책은 없습니다. 나태한 군사들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으니, 비록 위급(危急)한 일이 있을지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먼 곳의 진(鎭)을 서로 바꾸어서 머물러 방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근로(勤勞)함을 알게 한다면 위급한 때에 다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유장편(諭將篇)》에 이르기를, ‘사람이 식량(食糧)과 사의(簑衣)를 가지면 굶주리고 배부른 것을 익히게 되고, 강(江)을 건너고 산(山)을 끼면 험하고 쉬운 곳을 지나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국가에서 노고를 닦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조정에서 남도(南道) 군사로써 북변(北邊)에 수자리살게 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노고를 알게 하였던 것도 또한 그러한 뜻이었습니다. 신이 들으니, 머물러 방비하는 무리들이 혹은 청탁(請托)하기도 하고, 혹은 뇌물을 주기도 하여 유방(留防)하고 번상(番上)하는 때가 드물고 잦은 것이 같지 아니하여, 고르지 못하다는 한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신은 청컨대 각각 여차(旅次)209) 로써 윤번(輪番)으로 유방(留防)하여, 그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고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옛날에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의 초정(初政)에 경계하여 이르기를, ‘아들을 낳음과 같으니, 그 처음 낳을 때에 스스로 어진 명(命)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늘이 그에게 어질도록 명하고, 길(吉)하거나 흉(凶)하도록 명하고, 역년(歷年)이 오래도록 명하니, 이제 우리가 초복(初服)인 줄 알겠습니다.’고 하였으니, 처음 정사(政事)를 할 때에 덕(德)을 공경하지 아니할 수 없음을 심히 말을 한 것입니다. 초복(初服)에 덕을 공경하면, 스스로 어진 명(命)을 지니고 길(吉)하고 역년(歷年)이 오래일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고 처음으로 왕위[九五]에 임하시니, 만 백성들이 목을 빼고서 태평 시대를 바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거취(去就)하고 이합(離合)하는 기회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진퇴(進退)하고 소장(消長)하는 때이니, 공경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방금 주상(主上)께서 양음(亮陰)에서 거상(居喪)하시는데, 애훼(哀毁)가 예법에 넘고, 선고(先考)를 받들고 효도를 생각하여 한결같이 유교(遺敎)를 따르고 조종(祖宗)의 창업(創業)이 쉽지 아니하였음을 생각하고 금일(今日)에 수성(守成)하기가 어려움을 생각하여, 광구(匡救)210) 하는 덕(德)에 힘입어서 길이 무궁한 왕업(王業)을 번창하게 하고자 합니다. 헌부(憲府)에서 정사에 참여하고 전선(銓選)이 엄중합니다. 대납(代納)211) 을 한결같이 금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제거되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萬物)을 다스리는 교훈(敎訓)에 순순(諄諄)하고, 사(私)를 따라 공(公)을 폐(廢)하는 경계를 반복합니다. 뇌물(賂物)이 공공연히 행하면, 분경(奔競)의 금지를 엄하게 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며, 탐묵(貪墨)이 자행(恣行)되면 악(惡)을 징계하는 법을 무겁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긍긍 업업(兢兢業業)하여 여러 차례 윤음(綸音)을 내리시니, 초복(初服)을 삼가하는 뜻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흉도(兇徒)들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였으나 기미(幾微)에 밝혀서 제거한 것이 일찍이 숭조(崇朝)212) 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성상께서 우근(憂勤)하고 덕을 공경하는 지극함이 하늘에 말없이 통(通)하였고, 조종(祖宗)께서 도와주신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실로 억만세(億萬世)에 무궁한 복(福)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지성(至誠)으로 쉬지 않는 것이 제왕(帝王)의 도리라고 하나, 인주(人主)의 한 몸을 공격하는 자가 많으니, 사랑하고 미워하는 데 사정(私情)을 쓰면 간사한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요, 좋아하고 욕심이 많으면 효도와 공경이 쇠퇴할 것이요, 편폐(便嬖)를 즐기면 장(壯)한 마음을 막을 것이요, 공경하거나 두려움이 없으면 경계하는 마음을 잊을 것이요, 현사(賢士)를 소홀히 하면 정론(正論)을 거스를 것이요, 마음대로 좋은 것을 즐기면 거조(擧措)가 편벽(偏僻)될 것이니, 이는 심술(心術)을 바로잡는 데 큰 누(累)이며, 능히 마치지 못할 사유의 조짐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건원(建元) 초에 육경(六經)213) 을 표장(表章)하고, 백가(百家)를 파출(罷黜)하였으니, 부지런하기는 부지런하였습니다만, 그러나 한번 정벌(征伐)을 일삼으니, 이러한 마음이 이미 궁독(窮黷)214) 하기를 멋대로 하였고, 한번 토목(土木)을 일으키니, 이러한 마음이 이미 사치(奢侈)하기를 멋대로 하였습니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개원(開元) 초에 경적(經籍)을 토론하고, 명유(名儒)를 찾아가 물었으니, 아름답기는 아름다왔습니다만, 그러나 부도(浮屠)를 세우니, 이러한 마음이 이단(異端)에 유혹되지 아니할 수가 없었고, 사렵(射獵)을 좋아하니, 이러한 마음이 유전(遊畋)에 빠지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조심하고 방심하는 데 무상(無常)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하여 끝마치기를 시작할 때와 같이 삼가도록 하소서.
방금 양음(亮陰) 중에 계시니, 장사(葬事)하기 전에는 상례(喪禮)를 읽으시고, 이미 장사를 지내고는 제례(祭禮)를 읽으시어,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의례(儀禮)와 같이 하시고, 졸곡(卒哭) 뒤에는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경적(經籍)을 강론하시며, 고금(古今)을 주역(紬繹)215) 하고 어지럽지 않을 때 다스림을 이루시고, 위태하지 아니할 때 나라를 보전하소서. 날마다 훌륭한 신하와 큰 보상(輔相)과 더불어 치안(治安)의 도리를 강구하고,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고, 실행(實行)을 돈독하게 하고, 군자(君子)를 나오게 하고 소인(小人)을 물리치며, 깊은 모계(謀計)와 먼 염려로써 종사(宗社)를 보안(保安)하며, 너그러운 은혜와 큰 은택(恩澤)으로써 곤궁한 백성들을 어루만져 사랑하며, 충언(忠言)을 듣고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며, 요행(僥倖)을 막고 참설(讒說)을 막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안정하게 하려면, 형벌을 줄이고 부렴(賦斂)을 박(薄)하게 하고, 농사 때를 빼앗지 말 것이요, 변경(邊境)에 걱정이 없게 하려면, 장수를 가리고 사졸(士卒)을 훈련하여 융병(戎兵)216) 을 힐책할 것입니다. 불발(不拔)의 터전을 세우는 것이 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신이 듣건대, 공경(恭敬)이란 것은 한 몸의 주재(主宰)이고 만사(萬事)의 근본이며, 성학(聖學)의 시작을 이루고 끝마침을 이루는 것이라 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지키고 잃지 마시어, 우리 조선(朝鮮)에 만세(萬世)의 복을 주소서. 신은 삼가 관견(管見)으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읽어보고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구언(求言)하는 것은 나의 과실(過失)을 듣고자 하는 까닭인데, 윤효손의 상서는 선왕(先王)의 법을 헐뜯었으니, 잡아와서 국문(鞫問)하라."
하고,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불러서 조목(條目)에 따라서 묻게 하기를,
"너의 상언(上言)은 좋기는 좋으나, 그러나 나의 일을 가지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하여 선왕(先王)의 법(法)을 비난하느냐?"
하니, 윤효손이 대답하기를,
"불골(佛骨)의 표(表)가 국가의 복(福)이 아니라는 등의 말은 옛사람이 간(諫)하는 일로 인하여 폄척(貶斥)당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이제 말씀을 드리고 성상의 자애(慈愛)를 바라고자 한 것입니다. 당론(讜論)과 아첨하는 말 등의 말은 인주(人主)가 직언(直言)을 듣기를 싫어하는 화(禍)를 일반적으로 의논한 것이요, 당금(當今)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사(政事)의 처음에 언로(言路)를 널리 여시기를 원한 것뿐이므로, 말이 비록 맞지 않을지라도 너그러이 용납(容納)하신다는 등의 말씀을 내리시기를 바라니, 소신(小臣)의 말이 비록 혹시 실수가 있다 할지라도 죄를 면(免)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요, 또 성상(聖上)께서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세자(王世子) 이하 졸곡(卒哭) 등의 말은 세종(世宗)이 유교(遺敎)로 행한 구례(舊例)가 있으므로, 이제 마침 졸곡(卒哭)에 가까웠기 때문에 신이 망령되게 진달(陳達)하였을 뿐입니다.
성인(聖人)이 토지에 따라서 공물(貢物)을 만들었다는 등의 말은 전라도(全羅道)의 순창(淳昌) 등 8고을에서 금(金)이 나는 것이 같은데 구례(求禮)만 홀로 바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구례가 가장 잔열(殘劣)하여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은 신이 일찍이 구례(求禮) 가까운 땅에서 수분(守墳)217) 하였으므로 자세히 이 일을 들었고 백성들이 심히 괴로와하였기 때문에, 진술하였을 뿐입니다. 여러 도의 공금(貢金)을 별도로 기록하여 간수하자는 등의 말은, 만약 반행(頒行)하여 널리 선포하면 중국에 전(傳)하여 들릴까 두려워하여, 신은 다만 서울에서 납입(納入)하는 제사(諸司)와, 외방(外方)에서 소산(所産)하는 여러 고을에 별도로 기록하여 간수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창(社倉)을 설치하자는 등의 말은 민간(民間)에서 사채(私債)가 이식(利息)으로 10분의 5를 취하는데, 사창에서는 이식으로 10분의 2를 취하나, 만약 봉행(奉行)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그 폐해가 혹시 사채(私債)에서 이식을 취하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에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신은 그 옳은 것을 알지 못하겠다는 등의 말은 다만 사창(社倉)을 혁파(革罷)하기를 원하였을 뿐입니다. 다시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힘써 축적(蓄積)을 늘리자는 등의 말은 이제 별창(別倉)이 비록 의창(義倉)과 동일하나, 별창의 곡수(穀數)는 한정이 있어서 의창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의창(義倉)을 두어 축적(蓄積)을 늘려서 빈민(貧民)을 진휼하고, 수재(水災)와 한해(旱害)를 방비하기를 원한 것뿐입니다.
윤번(輪番)으로 유방(留防)하여서 수고스러움과 편안한 것을 고르게 하자는 등의 말은, 가령 전주(全州)의 진(鎭)을 본주(本州)의 정병(正兵)과 부근 여러 고을의 군사로써 유방(留防)을 시키면, 매양 아침 저녁으로 그 집을 왕래하다가 군장(軍裝)과 마필(馬匹)을 또한 혹시 소홀히 하여 지구(持久)할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鎭)을 바꾸어 부방(赴防)시켜서 근로(勤勞)를 익히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 신이 어머니께 귀성(歸省)하는 일로 인하여 전라도(全羅道)에 가는 도중에 우연히 번상(番上)하는 정병(正兵)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이르기를, ‘유방(留防)의 번상(番上)에 뇌물(賂物)이 공공연히 행해져, 수고로움과 안일함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진달(陳達)하였습니다.
양음(亮陰)에 거상(居喪)하시고, 수성(守成)이 어렵다는 등의 말은 신이 빈전(殯殿) 낭청(郞廳)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대내(大內)에서 곡읍(哭泣)을 하여 애통(哀痛)하는 소리를 들었고, 또 여러 차례 전지(傳旨)를 내리실 때 매양 성상께서 우근(憂勤)하시고, 척려(惕厲)하시는 뜻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진달(陳達)하였습니다. 뇌물(賂物)이 공공연히 행해진다는 등의 말은 처음 정사(政事)에서 분경(奔競)의 법을 엄하게 하고 탐묵(貪墨)의 죄를 중하게 할 것을 가리켜 말한 것뿐입니다. 한번 정벌(征伐)을 일삼고, 유전(遊畋)에 빠진다는 등의 말은 한(漢)나라의 무제(武帝)와 당(唐)나라의 현종(玄宗)이 모두 처음에는 아주 잘하였으나, 끝내는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성상(聖上)께서 이를 거울삼아 끝마치기를 처음과 같이 신중히 하기를 원한 것뿐입니다.
세조(世祖)의 시정(時政)을 아울러 계달(啓達)한 뜻은, 신이 세조께서 구언(求言)을 하시던 때에 위의 항목의 공금(貢金)과 사창(社倉)과 정병(正兵) 유방(留防) 등의 일을 가지고, 상서(上書)하여 폐단을 진달하였더니, 어서(御書)로 상정소(詳定所)에 내렸으나 일이 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이 마음에 잊지 못하였었는데, 이제 마침 구언(求言)하는 교서(敎書)가 있었으므로, 신이 감히 진달하였습니다."
하였다. 권감이 아뢰니, 명하여 대궐(大闕) 안에 가두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8책 294면
- 【분류】정론(政論) / 풍속(風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공물(貢物) / 군사-부방(赴防) / 사법(司法)
- [註 200]불골표(佛骨表) :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문장(文章)의 이름.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사리)을 대내(大內)에 맞아들이니, 왕공(王公)·사서(士庶)가 찬탄(贊嘆)하였는데, 한유가 불골표를 올려서 부처를 신봉(信奉)하는 일을 극간(極諫)하였으므로, 헌종이 이를 보고 노하여 그를 조양(潮陽)의 자사(刺史)로 강등시켜 귀양보내었음.
- [註 201]
광릉(光陵) : 세조(世祖).- [註 202]
이제 삼왕(二帝三王) : 요(堯) 임금·순(舜) 임금과 하(夏)나라 우왕(禹王)·은(殷)나라 탕왕(湯王)·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통틀어 일컫는 말임.- [註 203]
수고(壽考) : 오래도록 사는 것.- [註 204]
공안(貢案) : 공물(貢物)을 각 지방에 부과하던 문안(文案).- [註 205]
사창(社倉) : 조선조 때 민간에서 운영하던 창고로서, 가을철에 곡식을 사들여 갈무리하였다가 봄철 춘궁기(春窮期)에 싼 값으로 방출하였음. 의창(義倉)의 환곡(還穀)이 모자라 군자창(軍資倉)의 곡식이 환곡으로 전용되자 이를 막기 위하여 만든 제도로서, 저리(低利)의 이식(利息)을 붙여 거두었음.- [註 206]
사장(社長) : 사창(社倉)을 운영하던 우두머리의 사람.- [註 207]
칭대(稱貸) : 돈을 빌려 주고 이익을 취함.- [註 208]
의창(義倉) : 흉년(凶年)에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평년에 백성들로부터 곡류(穀類)의 여분(餘分)을 거두어들여 보관하던 창고. 춘절기(春節期)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철에 다시 거두었음.- [註 209]
여차(旅次) : 군사들이 번(番)들어가는 차례를 말함.- [註 210]
광구(匡救) : 언행(言行)을 바로 잡음.- [註 211]
대납(代納) : 조선조 때 나라에 바치는 납공자(納貢者)의 공물(貢物)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백성들에게서 거두던 것을 말함. 여러 가지 폐단이 많았으므로 이를 금지하였음.- [註 212]
숭조(崇朝) : 새벽부터 아침까지 짧은 사이.- [註 213]
육경(六經) : 유교의 경전.- [註 214]
궁독(窮黷) : 소통하지 못하고 인륜을 더럽힘.- [註 215]
○訓鍊院副正尹孝孫上書曰:
臣伏覩聖旨: "群臣雖有所陳, 若曰: ‘此事非我所干。’ 含默不言, 則玆所謂: ‘君門遠於千里者也。’ 予何由知。 故曰: ‘朝有千臣, 昭公去國而不悟; 弓無九石, 寧一終身而不知。’ 是何異哉?" 戰戰兢兢, 恐懼益深, 大哉王言! 一哉王心! 開言路訪時政, 求臻至治之意至矣。 夫士生斯世, 讀聖賢書, 孰不欲談當世事, 結明主知? 然大庭之策, 江都之命下矣; 佛骨之表, 潮陽之譴隨之。 遂使讜論不聞, 諛言日進, 甚非國家福也。 今聖諭如是, 臣敢以出位爲嫌, 終默不言乎? 言雖不中, 庶賜優容, 以廣敷奏。 臣謹按《禮記》曰: "士腧月而葬, 是月也卒哭; 大夫三月而葬, 五月而卒哭; 諸侯五月而葬, 七月而卒哭。 士三虞, 大夫五, 諸侯七。" 又曰: "君旣卒哭, 而服王事。" 又曰: "卒哭成事。" 是日也以吉祭易喪祭, 故此祭漸用吉禮也。 國朝禁嫁娶禁屠殺, 在卒哭之前, 而大祀用樂, 在卒哭之後。 至於宗親百官, 卒哭後除喪服, 三品以下妻及庶人, 卒哭後竝吉服。 我世宗大王嘗有敎曰: "參古例, 酌人情, 定爲權制。 王世子以下, 三日內小食粥, 三日後食食, 逾月少飮酒, 卒哭後食肉。" 然則卒哭者, 易凶從吉之大節也, 重且嚴矣。 今光陵葬期, 但以拘忌, 擇用三月, 是誠出於不得已, 卒哭之期, 又從而逼焉, 臣恐未安。 伏願依《禮記》中月之制, 及先王已行之期, 待五月卒哭何如? 學校, 風化之源, 自古帝王莫不重焉。 人生八歲入小學, 十五入大學, 此二帝三王所以治隆於上, 俗美於下者, 以敎民有其具也。 漢 武帝立大學, 生徒動至數萬, 郡學悉皆充滿。 唐 太宗大召名儒, 增廣生員, 踵堂者八千餘人。 三代以下, 於斯爲盛。 我朝崇儒重道, 右文興化, 留意於學校, 可謂至矣。 然州府郡縣, 生徒有定額, 而欲學者, 病於編軍, 成均四學額數有未滿, 而干祿者, 亦不肯就學。 由是學校不廣, 人材罕出, 其於聖上興學作成之意何如? 夫子曰: "學而優則仕。" 又曰: "三年學, 不志於穀, 吾未之見也。" 今則蔭襲之徒, 纔免襁褓, 已有干祿之心, 奚待乎三年之學? 足不履於學舍, 名已登於仕版, 唯知榮華之可慕, 豈達君臣之大義? 夫窮經將以致用, 行道必欲濟世, 幼而不學, 則將焉用之? 伏願增廣額數, 愼擇師長, 久於其任, 以專敎養, 有志願學之徒, 悉取而敎之, 賢者則儲養以待用, 愚者則放還以備兵。 蔭襲之人, 竝令就學, 待通《小學》、《四書》一經而後, 許令筮仕, 則學校大興, 人材輩出矣。 《詩》曰: "濟濟多士, 文王以寧。" 又曰: "周王壽考, 何不作人?" 然則作成之道, 又在殿下, 緝熙聖學, 躬行以率之耳。 伏惟留意焉。 臣謹按《禹貢》, 惟金三品, 不獨産於梁州, 荊州亦貢焉。 嶧陽孤桐, 泗濱浮磬, 九州之中, 徐州獨貢, 以非他州所産也。 聖人任土作貢之意至矣。 夫地有所産, 則不可不貢, 貢非土産, 則民受其害。 今貢案亦聖人作貢之美, 意而貢金有說焉。 以臣所居全羅一道言之, 鎭安、任實、淳昌、玉果、谷城、順天、光陽、求禮八邑, 沿於産金大川, 隨其殘盛, 昔皆有貢, 行之無弊, 甚良法也。 曾以敬差官一時臆見, 專減七邑之金, 獨於求禮一小縣加定, 至於四兩之多, 臣竊惑焉。 産金之水, 八邑皆有焉, 八邑之中, 求禮最殘, 民戶僅百有三十餘矣。 昔日三錢之金, 尙未能支, 況四兩之多乎? 雖使七八歲採之, 恐未充一歲之貢。 民之愁歎困苦, 不可勝言。 臣請仍舊分定所産諸邑, 以便民生, 以盡地利。 臣且以所聞慶尙之事言之。 昔晋州其利乾柿, 安東其利栢子。 今也乾柿之貢, 分於尙州, 而尙州買於晋州; 栢子之貢, 分於他邑, 而他邑買於安東, 往復之間, 其弊不貲。 此特就甚者言之耳。 臣請分遣朝官, 同其道觀察使, 擧一道貢案之數, 各以地之所産, 斟酌分定, 則庶乎其不差矣。 且聞請免金銀, 屢陳于策者, 以非土産也。 今也諸道黃金之貢, 載之貢案, 昭示八方, 於義何如? 請於中外該官, 別錄藏之何如? 社倉之設, 本欲救民, 而似與民爭利, 恐未盡善也。 社長得人, 則斂散均平, 民之利也, 能取息十二, 國之利也。 不得其人, 則斂散不均, 聚怨於民, 一不利也; 散在民間, 曰力不能收斂, 年年如是, 二不利也: 視爲己有, 任意費用, 量斗之時, 稱貸充數, 名存實無, 三不利也; 甚者置酒招朋, 日以爲事, 逋欠太半, 責將歸我, 則焉知或托以火賊, 又從而逃散乎? 四不利也。 散積遠村, 脫有不虞之變, 誰能守之? 是將以救民, 而終以資敵也。 雖有智者, 焉能善其後? 臣未知其可也。 請於諸邑, 復置義倉, 務廣蓄積, 賑貧民以備水旱何如? 諸道置巨鎭留正兵, 以備不虞, 其慮深矣。 然留防之卒, 率多居其鎭, 或居傍近諸邑, 以爲朝夕之慮, 無有持久之計。 怠惰之兵, 莫此爲甚, 縱有緩急, 將焉用之? 臣請以遠鎭, 相換留防, 使知勤勞, 則緩急皆可用也。 諭將篇云: "人齎糧蓑, 習飢飽也; 涉江擁山, 歷險易也。" 此國家之修勞也。 宋朝以南道軍, 戍於北邊, 使知勞苦, 亦其意也。 臣聞留防之徒, 或以請托, 或以賄賂, 留防番上之時, 踈數有不同不均之歎興焉。 臣請各以旅次, 輪番留防, 以均勞逸何如? 昔召公戒成王初政曰: "若生子, 罔不在厥初生。 自貽哲命, 今天其命哲命吉凶命歷年, 知今我初服。" 甚言初政, 不可不敬德也。 初服而敬, 則自貽哲命吉與歷年矣。 殿下春秋鼎盛, 初臨九五, 萬姓延頸, 想望大平。 實天命人心, 去就離合之機, 君子小人, 進退消長之時, 可不敬歟? 方今宅憂亮陰, 哀毁踰禮, 奉先思孝, 一遵遺孝, 思祖宗創業之不易, 念今日守成之艱難, 欲資匡救之德, 永昌無彊之業。 憲府參政, 而銓選嚴矣; 代納一禁, 而民害除矣。 諄諄乎代天理物之訓, 反覆乎徇私廢公之戒! 賄賂公行, 則奔競之禁, 不可不嚴矣; 貪墨恣行, 則懲惡之法, 不可不重也。 兢兢業業, 屢降綸音, 愼乃初服之意, 至矣盡矣。 不意兇徒, 潛圖不軌, 則炳幾剪除, 曾不崇朝, 豈非聖上憂勤敬德之至, 默通於天, 而祖宗之垂佑乎? 實億萬世無彊之福也。 臣聞至誠無息, 帝王之道。 然人主一身, 攻之者衆, 愛惡私則憸壬入, 好慾衆則孝敬衰, 樂便嬖則壯心沮, 無敬畏則戒心忘, 踈賢土則正論拂, 喜任好則擧措偏。 此正心術之大累, 而不克終之所由漸也。 昔漢 武帝 建元之初, 表章六經, 罷黜百家, 勤則勤矣。 然一事征伐, 則此心已肆於窮黷矣; 一興土木, 則此心已縱於奢侈矣。 唐 玄宗 開元之初, 討論經籍, 訪問名儒, 義則美矣。 然浮屠之立, 則此心不能不惑於異端矣; 射獵之好, 則此心不能不荒於遊畋矣。 人心操舍之無常, 可不懼哉? 伏願殿下, 日愼一日, 愼終如始。 方在亮陰未葬之前讀喪禮, 旣葬讀祭禮, 一如朱文公之儀。 卒哭後, 日御經筵, 講論經籍, 紬繹古今, 制治于未亂, 保邦于未危。 日與宏臣碩輔, 講求治安之道, 正心術敦實行, 進君子退小人。 深謀遠慮, 以保安宗社; 寬恩沛澤, 以子惠困窮。 聽忠言納直諫, 杜僥偉塞讒說。 欲民之安業也, 則省刑薄斂, 而不奪其時; 欲邊境之無虞也, 則擇將鍊士而詰爾戎兵, 以建不拔之基, 則臣之願也。 臣聞敬者, 一身之主宰, 而萬事之根本, 聖學之所以成始而成終者也。 伏願殿下, 守而勿失, 以錫我朝鮮萬世之福也。 臣謹以管見, 昧死以聞。
上覽之, 傳于承政院曰: "求言所以欲聞予過失也, 孝孫書, 非先正之法, 拿來鞫問。" 召都承旨權瑊, 令逐條問曰: "汝之上言, 善則善矣, 然以予之事爲非則可也, 何以非先王之法乎?" 孝孫對曰: "佛骨之表, 非國家福也等語, 則古人有因諫見斥者, 故臣今欲獻言, 而希望聖慈耳。 讜論諛言等語, 則泛論人主惡聞直言之禍, 非指當今而言。 但願卽政之初, 廣開言路耳。 言雖不中, 庶賜優容等語, 則小臣之言, 雖或有失, 冀免於罪, 又欲聖上, 廣開言路也。 王世子以下卒哭等語, 則以世宗遺敎, 行之有舊例, 今適近卒哭, 故臣妄陳焉。 聖人任土作貢等語, 則全羅道 淳昌等八邑, 産金同而求禮獨貢, 故及之。 求禮最殘不可勝言等語, 則臣嘗守墳求禮近地, 細聞此事, 民甚苦之, 故陳焉。 諸道貢金別錄藏之等語, 則若領行廣布, 恐傳聞上國, 臣願只於京中所納諸司, 外方所産諸邑, 別錄以藏。 社倉之設等語, 則民間私債, 取息什伍, 社倉則取息什二, 若奉行未盡善, 則其弊或與私債取息同, 故陳之。 臣未知其可也等語, 則只願革社倉而已。 復置義倉, 務廣蓄積等語, 則今別倉雖與義倉同, 別倉穀數有限, 不與義倉同, 故願復置義倉, 廣蓄積賑貧民, 備水旱耳。 輪番留防, 以均勞逸等語, 則假如全州鎭, 以本州正兵, 傍近諸邑兵留防, 則每朝暮往來其家, 軍裝馬匹, 亦或踈虞, 無有持久之計, 故欲換鎭赴防, 以習勤勞。 且臣因省母, 往全羅道途中, 遇逢番上正兵, 其人云: ‘留防番上, 賄賂公行, 勞逸不均。’ 故臣陳之。 宅憂亮陰守城艱難等語, 則臣以殯殿郞廳, 朝夕聞大內哭泣哀痛之聲, 且屢降傳旨, 每感聖上憂勤惕厲之意, 故臣敢陳之。 賄賂公行等語, 則指言初政嚴奔競之法, 重貪墨之罪耳。 一事征伐, 荒於游畋等語, 則漢 武帝、唐 玄宗, 皆能善始, 不能善終, 願聖上鑑此, 愼終如始耳。 世祖時政幷啓之意, 則臣於世祖求言之時, 將上項貢金、社倉、正兵、留防等事, 上書陳弊, 御書下詳定所, 事未施行, 故臣未忘於懷, 今適有求言之敎, 臣敢陳之。" 瑊以啓, 命囚闕內。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8책 294면
- 【분류】정론(政論) / 풍속(風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공물(貢物) / 군사-부방(赴防) / 사법(司法)
- [註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