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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45권, 세조 14년 2월 22일 계축 3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윤덕녕이 홍윤성의 비리를 밝히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등을 불러 입내(入內)하여 옥사(獄事)를 의논하게 하고, 또 윤덕녕(尹德寧)을 불러 김석을산(金石乙山)이 권세를 빙자하여 횡포한 짓을 방자하게 하고 그 지아비를 구타하여 죽인 일을 다시 물으니, 윤덕녕(尹德寧)이 진언(進言)하기를,

"첩(妾)이 홍정승(洪政丞)의 불법(不法)한 일을 다 말하려 하여도 모두 마땅히 말할 바가 아니나, 그러나 첩의 지아비를 죽인 일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연고가 아닙니다. 지난해 가을에 홍윤성(洪允成)이 처음 정승(政丞)이 되니, 고을 사람이 모두 한 시골에서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하여 관노비(官奴婢) 2구(口)를 주었는데, 당시 첩의 지아비는 유향소(留鄕所)074) 의 장무(掌務)가 되어, 홍윤성에게 장실(壯實)한 노비(奴婢)를 주지 않았다 하여 첩의 지아비를 곤장[杖]을 때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또 지난해 홍윤성이 아비의 초상을 당하여 시골에 와서는, 군인(軍人) 2백여 명을 청하여 첩의 집 뒷산의 소나무를 거의 다 벌목하고, 수일이 못되어 또 사람을 보내어 첩의 집 동산 안의 나무를 밝게 기록하여 장차 다 벌목하려 하므로, 그때 홍윤성의 첩(妾) 복지(福只)홍윤성의 여막[廬次]에 있어, 첩의 마음으로 생각하기에는 복지에게 청하여 홍윤성에게 말하면 동산 안의 나무가 온전하겠기에, 즉시 주찬(酒饌)을 갖추어 가서 먹이고 이를 청탁하였더니, 복지가 응낙(應諾)하므로 마음이 스스로 기쁘고 다행하였는데, 얼마 아니되어 군인(軍人) 1백여 명을 보내어 동산 안의 잡목(雜木)도 다 베어 냈습니다. 첩의 지아비가 폐려(弊廬)에서 수십 년을 기른 나무가 하루아침에 권세하는 이에게 탈취당하였어도 궁벽하고 황폐한 먼 땅에서 호소할 데가 없고, 또 도망한 장정과 숨은 군졸은 모두 그 집에 있으며, 홍산(鴻山) 한 고을의 태반이 붙좇고 그 붙좇지 않은 자는 특히 궁한 백성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최윤(崔倫)에게 묻기를,

"네가 관노비(官奴婢)를 사람에게 준 것은 어째서이냐?"

하니, 최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시골의 풍습인 까닭으로 신이 부득이 좇았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도망한 장정과 숨은 군졸은 무슨 말이냐?"

하니, 최윤(崔倫)이 역력히 헤아리므로,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처음에 김지경(金之慶)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니, 홍윤성(洪允成)이 가서 전송하려는데, 김지경은 마침 선고(先考)의 기일(忌日)이고 또 병이 들어 보지 못하여, 홍윤성이 혐의를 머금고서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이 또 와서 전송하려 하였는데, 모두 병이라 하여 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윤덕녕(尹德寧)이 임금에게 진언하기를,

"관찰사(觀察使)의 경개(耿介)075) 함이 이와 같은데도 단지 윤동질삼(尹同叱三) 등만을 가지고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이 아니라 하여 방면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실책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지경(金之慶)에게 이르기를,

"홍윤성(洪允成)은 대신(大臣)인데, 너는 어찌하여 보지 않았느냐?"

하니, 김지경이 대답하기를,

"신(臣)은 바야흐로 풍병(風病)이 들었으니, 대신(大臣)의 연고라 하여 무릅쓰고 참고서 일어났다가 병이 혹시 더 발하게 되면, 끝내 전하(殿下)의 위임한 뜻을 저버릴까 두려웠던 까닭으로 신은 나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또 명하여 홍윤성의 비부(婢夫) 백기(白奇)·소남(小南) 등을 내정(內庭)에 잡아 와서 윤기(尹耆) 등이 대신(大臣)을 모해(謀害)한 일을 무고(誣告)한 것을 고신(栲訊)하게 하고, 즉시 윤기 등을 방면하여 보냈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4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8책 163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향촌(鄕村)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074]
    유향소(留鄕所)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지방 수령(守令)의 정치를 돕고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나라의 정령(政令)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를 막고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도와주었음.
  • [註 075]
    경개(耿介) : 절조를 지켜 세속과 구차스럽게 화합하지 않음.

○召高靈君 申叔舟等, 入內議獄事, 又召德寧, 更問金石乙山憑勢肆暴, 敺殺其夫事。 德寧進曰: "妾欲盡言洪政丞不法事, 皆所不當言, 然殺妾夫, 非一朝一夕之故。 去年秋, 允成初爲政丞, 縣人皆以爲一鄕希有之事, 贈官奴婢二口。 時妾夫爲留鄕所掌務, 允成以不贈壯實奴婢, 杖妾夫幾至死。 又去年, 允成丁父憂來鄕, 請軍人二百餘名, 伐妾家後山松木殆盡, 不數日, 又遣人妾家園內之木, 白而識之, 將欲盡伐。 時, 允成福只, 在允成廬次, 妾心以爲請於福只, 善辭允成, 則園內之木可全, 卽具酒饌, 往饋而請之。 福只應諾, 心自喜幸, 未幾遣軍人百餘名, 斫盡園中雜木。 妾夫弊廬數十年生長之木, 一朝爲權勢所奪, 窮荒遠地, 無所控告, 又亡丁匿卒, 皆在其家, 鴻山一縣, 太半附之, 其不附者, 特窮民而已。" 上問崔倫曰: "汝以官奴婢, 與人何也?" 對曰: "此鄕風也, 故臣不得已從之。" 上曰: "亡丁匿卒謂何?" 歷數之, 命書之。 初, 金之慶忠淸道觀察使, 允成往餞, 之慶適先考忌日, 且疾不得見, 允成銜之而還。 其夕, 河東君 鄭麟趾蓬原君 鄭昌孫, 又往欲餞, 皆以疾不見。 至是, 德寧言于上曰: "觀察使耿介如此, 而但以尹同叱三等, 爲非故殺人而放之, 此其所失也。" 上謂之慶曰: "允成大臣也, 而汝不見何也?" 之慶對曰: "臣方病風, 以大臣故, 冒忍而起, 病或加發, 則恐終負殿下委任之意, 故臣不出見。" 上不復問。 又命拿致允成婢夫白奇小南等于內庭, 拷訊(証)〔誣〕尹耆等謀害大臣事, 卽放遣等。


  • 【태백산사고본】 17책 4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8책 163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향촌(鄕村)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