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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9월 28일 경인 2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유자광의 병조 정랑 임명이 불가함을 아뢴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와 대사간(大司諫) 김지경(金之慶)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이 유자광(柳子光)이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마땅치 않다는 사유(事由)를 가지고 천총(天聰)에 앙달(仰達)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실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생각건대, 적첩(嫡妾)의 분수는 하늘이 세우고 땅이 세운 것과 같아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이 각각 그 차서(次序)를 얻어서 서로 분수에 넘지 않은 다음이라야, 상하(上下)가 분변(分辨)되고 백성들의 뜻이 안정(安定)되어, 국가(國家)가 다스려져 편안할 것입니다. 옛날부터 사람을 쓸 즈음에 오로지 재주만으로 아니하고 반드시 그 가세(家世)의 출신(出身)을 먼저 참고하였습니다. 이제 중외(中外)에서 인재(人才)를 천거(薦擧)할 때에 반드시 이르기를, ‘안팎으로 허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서얼(庶孽) 출신 사람이 다 쓸 만한 재주가 없다는 까닭이 아니라, 진실로 상하(上下)를 분변(分辨)하고 백성의 뜻을 정하고 존비(尊卑)를 밝히고 귀천(貴賤)을 구별하려는 까닭인데, 바로 왕정(王政)의 선무(先務)인 것입니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유자광(柳子光)유규(柳規)의 첩(妾)의 아들입니다. 전하께서 천지(天地)와 같은 도량(度量)으로서 재능(才能)이 있다고 이르시고 특별히 허통(許通)하도록 하였으나, 이보다 앞서 무릇 사대부(士大夫)의 얼자(孼子)는 비록 시위(侍衛)의 반열(班列)일지라도 오히려 치열(齒列)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자광과 같은 자는 겨우 동반(東班)에 들어오자마자 문득 허통(許通)시키니, 성상의 은혜가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어찌 정조(政曹) 낭관(郞官)의 배명(拜命)이 문득 이와 같은 사람에게 내려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병조(兵曹)는 군정(軍政)을 모두 총괄하고 인물(人物)을 전주(銓注)하는 곳이니,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므로, 문무과(文武科) 출신이 아니면 낭관(郞官)이 될 수가 없으며, 비록 과목(科目)을 거쳤더라도 만약 가문 출신에 의논이 있으면 또한 임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유자광은 다만 과목(科目)으로 진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몸도 첩(妾)의 아들입니다. 제수(除授)하는 글이 내려졌을 때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모두 놀라와하였습니다. 만약 이미 허통(許通)하였으니 무엇이 불가(不可)하겠는가고 한다면 신 등도 또 의혹(疑惑)이 있습니다. 세종 대왕조(世宗大王朝)에 조득인(趙得仁)의 장리(贓吏)의 손자로서 허통(許通)하여 과거에 올라, 성균관(成均館)의 직학(直學)이 되었다가 학록(學錄)으로 천전(遷轉)할 때를 당하였으나, 학록(學錄)과 학정(學正)은 직의 맡은 바가 같다고 이르고 제수(除授)하기를 어렵게 여겼습니다. 사유(事由)를 갖추어 취지(取旨)하니, 명(命)하여 제수(除授)하지 말게 하고, 진덕 박사(進德博士)가 차례로 천전(遷轉)할 때를 당하기까지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벼슬길에 허통(許通)하였으나 대성(臺省)과 정조(政曹)에는 허락하지 않는 예(例)입니다. 근일에 한승경(韓承慶)이 화순 현감(和順縣監)에 제수(除授)되었을 때, 사헌부에서 하윤(河崙)의 첩(妾)의 손녀 사위이므로 수령(守令)에 마땅치 않다고 아뢰어, 곧 고쳐 임명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생각건대, 학록(學錄)과 수령(守令)은 정조(政曹)보다 가벼워도, 허통한 조득인이 학록(學錄)이 되지 못하였고, 첩의 손녀 사위인 한승경이 수령이 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유자광은 당자가 첩의 아들이 되니, 비록 이미 허통하였더라도 어찌 그로 하여금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으로 삼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어, 조정(朝廷)을 높이시고 나라의 법(法)을 공고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읽어보지도 아니하고, 양성지·김지경 등을 불러서 묻기를,

"경들이 온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양성지가 대답하기를,

"유자광이 서자[孼子]로서 정조(政曹)의 낭관(郞官)에 임명되었으므로, 신 등이 감히 고쳐서 임명하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김지경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조득인(趙得仁)이 장리(贓吏)의 후손(後孫)으로서 성균 학정(成均學正)에 임명되니, 그때 대간(臺諫)에서 고치자고 청하여 세종께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또 지난해 봄에 한승경(韓承慶)하윤(河崙)의 서손녀[孼孫女] 사위로서 화순 현감(和順縣監)에 임명되니, 신 등이 고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병조(兵曹)의 정관(政官)에 어찌 서자[孼子]를 앉히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특별한 한 대의 일이니, 어찌 상전(常典)이겠는가? 경들이 세종(世宗)의 고사(故事)를 들어서 이를 말하는데, 이것은 세종 때의 일을 가지고 나를 곤혹하게 하려는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어진이는 세우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다만 사람을 얻는 것만을 귀(貴)하게 여길 뿐인데, 어찌 귀천(貴賤)을 논하겠는가? 경들이 유자광같이 어질 수가 있겠는가? 나는 유자광을 어질다고 하여 사로(仕路)에 허통(許通)시켰는데, 이 때에 경들 가운데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다고 지금 정조(政曹)에 임명하니, 불가(不可)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경들의 마음에는 다른 관직에는 허통(許通)할 수 있어도 오로지 정조(政曹)만은 허통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이미 ‘허통(許通)한다.’고 하였으면 무슨 관직인들 허통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유자광을 허통하는 것은 특별한 은혜인데, 나의 특별한 은혜를 너희가 능히 저지하겠는가? 임금을 섬기되 너무 자주 간하면 욕이 되는 것이고, 친구와 사귀되 너무 자주 간하면 멀어지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시 말하면 내가 반드시 죄줄 것이니, 너희는 다시 말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고 물러가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어서 양성지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고, 또 집의(執義) 조안효(趙安孝)·사간(司諫) 박안성(朴安性)·장령(掌令) 정칭(鄭偁)·지평(持平) 정효항(鄭孝恒)·최경지(崔敬止)를 불러서 술을 먹이도록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권맹희(權孟禧)를 시켜 전지(傳旨)하기를,

"모름지기 고집 불통(固執不通)이 필요하니, 만약 고집하지 않으면 일이 모두 해이해질 것이다. 너희들이 고집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글에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말을 어기기를 무겁게 여기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어진이를 쓰는 일도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43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8책 125면
  • 【분류】
    정론(政論) / 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

○大司憲梁誠之、大司諫金之慶等, 交章上疏曰:

臣等將柳子光不宜兵曹正郞事由, 仰達天聰, 未蒙允許, 不勝缺望。 臣等竊惟, 嫡妾之分, 猶天建地設, 不可亂也。 尊卑貴賤, 各得其序, 而不相踰分, 然後上下辨民志定, 而國家治安矣。 自古用人之際, 不專以才, 而必先考其家世門地。 今中外薦擧之時, 必曰: "內外無咎者。" 非以庶孽之人, 盡是無才可用, 誠以卞上下定民志, 明尊卑等貴賤, 乃王政之所先務也。 臣等伏見, 子光柳規妾子。 殿下以天地之量, 謂有才能, 特令許通, 前此凡士大夫孼子, 雖在侍衛之列, 尙不得齒焉。 若子光者, 纔入東班, 便是許通, 上恩至矣, 豈料政曹郞官之命, 遽加如是之人哉? 兵曹摠該軍政, 銓注人物, 所係非輕, 非文武科出身者, 不得爲郞官, 雖由科目, 若門地有議, 則亦不得爲之。 今子光非但非科目而進, 身是妾子, 除書之下, 耳目擧駭。 倘以旣已許通, 何所不可, 則臣等又有惑焉。 世宗大王朝, 趙得仁以贓吏之孫, 許通登科, 爲成均直學, 當遷學錄, 謂學錄學正, 職同所司, 難於除授。 具由取旨, 命勿除授, 待進德博士, 當次遷轉。 此雖許通仕路, 而不許於臺省政曹之例也。 近日韓承慶和順縣監, 司憲府啓以河崙妾孫壻, 不宜守令, 卽命改差。 臣等竊念, 學錄、守令, 輕於政曹, 而許通之趙得仁, 不得爲學錄, 妾孫壻韓承慶, 不得爲守令。 況子光, 身爲妾子, 雖已許通, 豈可使爲郞於兵曹耶? 伏望亟收成命, 以尊朝廷, 以固邦憲。

上不覽, 召誠之之慶等, 問曰: "卿等之來爲何事?" 誠之對曰: "子光以孼子, 拜政曹郞官, 臣等敢請改差。" 之慶進曰: "世宗朝, 趙得仁以贓吏之孫, 拜成均學正, 其時臺諫請改, 世宗從之。 又去年春, 韓承慶河崙孼孫壻, 拜和順縣監, 臣等請改蒙允。 兵曹政官, 豈宜孼子處之乎?" 上曰: "此特一時事也, 豈常典乎? 卿等擧世宗故事言之, 是欲以世宗事惑我也。 古人云: ‘立賢無方。’ 但貴得人而已, 何論貴賤乎? 卿等得如子光之賢乎? 予以子光爲賢, 許通仕路, 此時卿等無一人言者, 今拜政曹, 以爲不可何也? 卿等之心, 以爲通於他官, 而獨不通於政曹乎? 旣曰許通, 則何官不可通乎? 予之許通子光, 特恩也。 予之特恩, 汝能沮之乎? 事君數斯辱, 朋友數斯踈。 如或更言, 予必罪, 汝勿更言, 飮酒而退可也。" 仍使誠之進酒, 又召執義趙安孝、司諫朴安性、掌令鄭偁、持平鄭孝恒崔敬止, 命饋酒。 令都承旨權孟禧傳曰: "須要固執不通, 若不固執, 事皆解弛。 汝等固執, 予甚嘉之。 書曰: ‘重違臺諫之言。’ 然用賢不得不爾。"


  • 【태백산사고본】 16책 43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8책 125면
  • 【분류】
    정론(政論) / 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