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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43권, 세조 13년 9월 4일 병인 2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존무사 박원형에게 함길도 지방관의 정치를 바로잡도록 어찰 교서를 내리다

임금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서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우의정(右議政) 홍윤성(洪允成)·우찬성(右贊成) 김국광(金國光)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존무사(存撫使) 박원형(朴元亨)이 하직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초구(貂裘) 1령(領)을 내려 주고, 어찰 교서(御札敎書)를 주었는데, 이르기를,

"전일에 강효문(康孝文)이 한 도(道)를 전제(專制)280) 하면서 군민(軍民)들을 구휼(救恤)하지 않고 대신(大臣)에게 아부(阿附)하여 거리낌없이 방종(放縱)하고, 군민들로 하여금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지 못하게 하여 하소연할 데가 없게 하였으니, 이는 본도(本道)가 남북으로 도리(道里)가 먼데도 한 사람이 전제(專制)한 까닭이었다. 비록 어진 사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재능으로써는 능히 감당할 바가 아니었다. 만약 어진 사람이면 오히려 가하거니와, 만약 어질지 못한 사람이면 한 도에서 폐단을 받더라도 또한 고찰(考察)할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 권력을 믿고 오로지 마음대로 하는 까닭이다. 거리낌없이 방종(放縱)하고,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사(私事)를 경영하고, 백성에게 긁어내는 일을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나, 백성들이 호소할 수가 없고 나라에서 알 수가 없는데, 본도(本道)의 폐단은 항상 여기에 있다. 드디어 왕업(王業)을 일으킨 본향(本鄕)의 백성으로 하여금 간뇌 도지(肝腦塗地)281) 하게 하였으며, 이미 혜택(惠澤)을 받는데도 절망하였고, 항상 침학(侵虐)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긴다. 밤낮으로 무어(撫御)하고 긍휼(矜恤)할 방도를 기필코 옛날보다 더하여 실제 혜택이 넘쳐 흐르고 길이 태평(太平)을 보장하고자 생각하고, 이제 경성(鏡城) 이북을 북도(北道)로 하고, 길주(吉州) 이남을 남도(南道)로 하여, 두 사람이 나누어 다스리게 하면 어찌 그들이 모두 불초(不肖)하겠는가? 또 관찰사(觀察使)가 두루 분주(奔走)하게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폐단을 살피는 책임(責任)을 더욱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불가하다 하겠다. 그 중에서 불초(不肖)한 자로서, 정사를 다스리는 데 게으르고 방종(放縱)하기를 좋아하고 나라를 그르치고 집을 그르치면서 오히려 권문(權門)을 믿은 자는 전일(前日)의 오응(吳凝)이 바로 그 사람이다. 본도의 백성들이 새로 병혁(兵革)의 난리를 당하여 유리(流離)하여 살 곳을 잃고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곤핍(困乏)하고 그 거처(居處)를 정하지 못하니, 크게 구휼(救恤)하지 않으면 군민들의 사망(死亡)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므로, 이제 특히 경을 함길도 존무사(咸吉道存撫使)로 삼아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묻고, 관찰사(觀察使)와 절도사(節度使) 이하 내 뜻을 몸받지 아니하고 군민들을 구휼하지 아니하는 자를 상주고 벌주며,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를 나누어 설치하여 일체 군민의 정치를 사의(事宜)에 합당하게 행하고 모두 편의한 데 따라 종사(從事)할 것이다. 반드시 취지(取旨)할 것도 없으니, 경은 그러한 뜻을 몸받을지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43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11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280]
    전제(專制) : 오로지 맡아서 다스림.
  • [註 281]
    간뇌 도지(肝腦塗地) : 간장과 뇌가 진흙에 묻히는 것. 곧 전쟁에서 참혹하게 죽는 것.

○御集祥殿, 召高靈君 申叔舟、左議政崔恒、右議政洪允成、右贊成金國光及承旨等, 設酌。 存撫使朴元亨辭, 召見賜貂裘一領。 以御札敎書授之曰:

前日康孝文專制一道, 不恤軍民, 阿附大臣, 放縱無忌, 使軍民莫得伸冤抑, 無所控告, 是本道南北道里遙遠, 一人專制之所致也。 雖有賢者, 非一人之才, 所能堪當。 若賢則猶可, 若不賢則一道受弊, 亦無考察之者, 所以恃權專擅。 放縱無忌, 憑公營私, 剝民之事, 無所不爲, 而民不得告, 國無得知, 本道之弊, 常在於此。 遂使興王本鄕之民, 肝腦塗地, 旣絶望於惠澤, 常恐懼於侵虐, 予甚憫焉。 日夜思所, 以撫禦矜恤之方; 期加於昔, 實惠滂流永保大平。 今以鏡城以北爲北道, 吉州以南爲南道, 二人分之, 則豈其皆不肖耶? 且觀察使遍行奔馳, 觀察民瘼之任, 尤不可委之一人。 其中不肖者, 怠於治事, 甘於恣縱, 誤國誤家, 而猶恃權門, 前日吳凝是也。 本道之民, 新罹兵革, 流離失所, 飢寒困乏, 不奠厥居, 不有以大擧救恤, 則軍民死亡無際。 此非小事, 今特以卿爲咸吉道存撫使, 問民疾苦, 賞罰觀察使、節度使以下, 不體予意, 不恤軍民者。 分設南北道, 一應軍民之政, 合行事宜, 皆便宜從事。 不必取旨, 卿其體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43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11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