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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8월 12일 을사 2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도총사 이준 등이 체포한 이시애·이시합을 문초한 후에 처형하다

이날 관군(官軍)이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 앞들에 진(陣)을 치니, 적장(賊將) 길주(吉州) 사람 이주(李珠)가 와서 고(告)하기를,

"종성(鍾城) 갑사(甲士) 이운로(李雲露) 등과 더불어 이시애(李施愛)·이시합(李施合)을 유인하여 잡았는데, 장차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관군(官軍)이 임명역(臨溟驛) 앞들에 진(陣)을 옮겼는데, 해가 저물 때에 종성(鍾城) 갑사(甲士) 황생(黃生) 등이 이시애(李施愛)·이시합(李施合)을 잡아서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이르자, 여러 장수를 모아 이시애에게 그 사유를 물으니, 이시애가 말하기를,

"나는 사유가 없다."

하였다. 그에게 장(杖)을 때리니, 말하기를,

"강효문(康孝文)이 모반(謀反)하므로, 내가 먼저 발병(發兵)하여 성상의 은혜를 갚으려고 하였다."

하였다. 묻기를,

"과연 그와 같다면 어찌하여 먼저 아뢰지 않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계달(啓達)하면 늦어져 제때에 도모(圖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이미 그를 죽이고 어찌 몸소 와서 계달(啓達)하지 않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중로(中路)에 해(害)를 당할까봐 두려웠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강효문(康孝文)이 모반(謀反)하였다고 하면서, 여러 진(鎭)의 수령(守令)을 다 죽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말하기를,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여러 진(鎭)의 유향소(留鄕所)에 이문(移文)하여 그들을 죽이도록 하였는데,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이시애(李施愛)가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묻기를,

"어찌하여 스스로 절도사(節度使)라고 자칭(自稱)하였는가?"

하니, 말하기를,

"인심(人心)을 모으려고 한 것뿐이다."

하였다. 묻기를,

"이시합(李施合)은 어찌하여 우후(虞候)라고 칭(稱)하였는가?"

하니,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

하였다. 묻기를,

"차운혁(車云革)을 죽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말하기를,

"내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다."

하였다. 묻기를,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를 무슨 까닭으로 모반(謀反)하였다고 말하였는가?"

하니, 말하기를,

"조정(朝廷)의 우두머리 재상(宰相)을 다 죽인다면, 일은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너의 모반(謀反)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는가?"

하니,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반역(反逆)할 마음이 없었다. 강효문(康孝文)을 죽인 다음에 비로소 역모(逆謀)가 생겼다."

하였다. 다시 장(杖)을 때리니 말하기를,

"내가 모상(母喪) 중에 있을 때 비로소 역모(逆謀)가 있었는데, 지금 이미 3년이 지났다. 본도(本道)는 사마(士馬)가 정강(精强)하기 때문에 수령(守令)을 임명하여 두고, 뜻대로 자적(自適)하려고 한 것뿐이다."

하였다. 또 장(杖)을 때리니 말하기를,

"이 도(道)에 의거하여 군사를 수년 동안 길러서 바로 서울[京師]을 침범하려고 하였다."

하였다. 드디어 이시애(李施愛)이시합(李施合)의 사지(四肢)를 찢어 죽여서, 5진(五鎭)에 전(傳)하여 보였다. 준(浚)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대궐(大闕)로 향하여 배하(拜賀)하였다. 종사관(從事官) 이서장(李恕長)이주(李珠)·허유례(許惟禮)·황생(黃生)을 거느리고 승첩(勝捷)을 보고하고, 【허유례(許惟禮)가 처음에 훈융 절제사(訓戎節制使) 염목(廉睦)의 군관(軍官)이 되어 염목과 더불어 허종(許琮)에게 속하였는데, 허종이 허유례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너의 아비 허숭도(許崇道)가 지금 길주(吉州)의 수령을 임시로 맡았으니, 네가 가서 타이르라." 하니, 허유례가 단신으로 길주에 몰래 가다가, 길에서 이명효(李明孝)를 만났다. 이명효가 그를 죽이고자 하니, 허유례가 말하기를, "들으니, 아버지가 길주(吉州)의 임시 책임을 맡았다고 하기 때문에 도망하여 간다."고 하였다. 이명효(李明孝)가 이시애(李施愛)에게 압송하니, 이시애가 간첩(間諜)이라 생각하여, 결박하고 심문하였다. 허유례가 말하기를, "아버지를 보고자 하여 도망하여 왔다. 만약 나를 죽이면 뒤에는 오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니, 이시애가 놓아서 보내었다. 드디어 그 아비를 보고 역순(逆順)을 가지고 고(告)하니, 허숭도가 허유례와 더불어 즉시 도망하였다. 허유례가 비밀히 이주(李珠)를 보고 조정(朝廷)의 뜻을 말하고, 이주와 더불어 몰래 이시애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적(賊)의 우위장(右衛將) 이운로(李雲露) 등과 모의하니, 이운로도 또한 스스로 형세가 다한 것을 헤아리고, 거느린 군사(軍士)들에게 타이르기를, "능히 이시애를 체포하는 자가 있으면 조정(朝廷)에서 후한 상(賞)을 허락할 것이다."고 하자, 군사들이 그를 따랐다.】 안인후(安仁厚)·구치홍(具致洪)·장말손(張末孫)을 시켜서 그 목을 바쳤다.

이시애(李施愛)는 검교 문하부사(檢校門下府事) 이원경(李原景)의 손자였고, 【이원경은 본명(本名)이 올로첩목아(兀魯帖木兒)였는데, 원(元)나라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였다. 태조(太祖)가 동녕부를 치게 되자, 이원경(李原景)이 항복하고 맞이하였으므로, 드디어 더불어 함께 와서 그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판영흥대도호부사(判永興大都護府事) 이인화(李仁和)의 아들이었다. 대대로 길주(吉州)에 거주하고, 그 족친(族親)이 여러 고을에 반거(盤據)하여 한 도(道)의 토호(土豪)였는데, 양민(良民)을 많이 모으고, 토전(土田)을 많이 점거(占據)하여 축적한 재산(財産)이 거만(鉅萬)이었다. 국가에서 호패(號牌)의 법을 행하자, 이시애가 그 정비하는 것을 싫어하여 드디어 역모(逆謀)를 일으키고, 그 족친 등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의 군민(軍民)을 속여 유혹하고 말하기를,

"국가에서 남방(南方)의 병선(兵船)을 보내어 해로(海路)를 경유하고, 육군(陸軍)은 설한령(雪寒嶺)·철령(鐵嶺)을 경유하여 일시에 함께 들어와서 본도(本道)의 군민(軍民)을 다 죽일 것이다."

하고, 또 고읍동(古邑同)을 유혹하여 병선(兵船)이 후라토도(厚羅土島)에 정박한 것을 고(告)하여 이를 증거로 삼았다. 마침 강효문(康孝文)이 순찰하여 길주(吉州)에 이르러 고읍동(古邑同)을 안문(按問)하자, 일이 심히 급하였으므로, 이시애가 즉시 강효문이 모반(謀反)한다고 증거하여 그를 죽이고, 여러 고을의 유향소(留鄕所)에 치서(馳書)하여, 관리(官吏)로서 성루에서 온 자를 다 죽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여러 고을에서 호응하여 앞을 다투어 죽이었다. 행상(行商)·승도(僧徒) 같은 이도 본도(本道) 사람이 아니면 또한 모두 죽이니, 정평(定平) 이북에서 모면한 자가 없었다. 거산(居山)의 싸움에서 패한 후부터 이시애길주(吉州)로 도망하여, 이성(利城)·길주(吉州)의 창고 곡식을 불태우고, 자기 집의 곡식을 인리(隣里)에게 흩어 주고, 자기 의복(衣服)과 안마(鞍馬)를 이명효(李明孝)에게 부쳐서 경성(鏡城)으로 보내었다. 그 죽인 절도사(節度使)·수령(守令) 등의 의복(衣服)·안마(鞍馬)를 조효창(趙孝昌)과 그 사위 박효손(朴孝孫) 등에게 부쳐서, 가서 야인(野人)을 유인(誘引)하여 응원(應援)하도록 청하고, 용성(龍城)에 이르러 다시 5진(五鎭)의 군사와 합(合)하여 관군(官軍)에게 크게 항거하고자 하여, 이시애가 패잔병(敗殘兵)을 거두어 경성(鏡城) 건가퇴(件加退)에 이르렀다가, 이운로(李雲露) 등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43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8책 109면
  • 【분류】
    변란(變亂) / 인물(人物)

○是日, 官軍踰磨天嶺, 陣于嶺東驛前平, 賊將吉州李珠來告: "與鍾城甲士李雲露等, 誘執李施愛施合等將至。" 官軍移陣于臨溟驛前平, 日晡時, 鍾城甲士黃生等, 縛施愛施合而至。 都摠使會諸將, 問施愛情, 施愛曰: "我無情。" 杖之, 曰: "康孝文謀反, 我欲先發, 以報上恩。" 問: "果如是, 則何不先啓?" 曰: "啓達則緩不及圖也。" 問: "旣殺之, 何不身來啓達?" 曰: "恐中路受害。" 問: "汝謂孝文謀反, 而盡殺諸鎭守令何也?" 曰: "非我所知。" 問: "汝移文諸鎭留鄕所, 令殺之, 而云不知何也?" 施愛不答。 問: "何自稱節度使?" 曰: "欲聚人心爾。" 問: "施合何以稱虞候?" 曰: "此則吾不知也。" 問: "殺車云革, 何也?" 曰: "非我殺之也。" 問: "申叔舟韓明澮, 何以言謀反乎?" 曰: "盡殺朝廷頭頭宰相, 則事易成矣。" 問: "汝之反謀, 始於何日?" 曰: "我初無反心。 殺孝文, 始生逆謀。" 更杖之, 曰: "我在母喪, 始有逆謀, 今已三年矣。 本道士馬精强, 故欲署置守宰, 任意自適爾。" 又杖之, 曰: "欲據此道, 畜兵數年, 直犯京師。" 遂剮施愛施合支解之, 傳示五鎭。 與諸將, 向闕拜賀。 使從事官李恕長, 率李珠許惟禮黃生, 報捷, 【惟禮, 初爲訓戎節制使廉睦軍官, 與睦屬許琮。 琮謂惟禮曰: "聞汝父崇道, 今權任吉州, 汝往諭之。" 惟禮單身潛往吉州, 路遇李明孝。 明孝欲殺之, 惟禮曰: "聞父爲吉州權任, 故逃赴。" 明孝押送施愛, 施愛以爲間牒, 縛問之。 惟禮曰: "欲見父逃來。 若殺我, 後無來者。" 施愛放遣。 遂見其父, 告以逆順, 崇道與惟禮卽逃。 惟禮密見李珠, 語以朝廷之意, 與珠潛往施愛陣, 與賊右衛將李雲露等謀之。 雲露亦自度勢窮, 諭所領軍士曰: "有能捕施愛者, 朝廷許厚賞。" 軍士從之。】 使安仁厚具致洪張末孫, 獻其首。 施愛, 檢校門下府事李原景之孫, 【原景本名兀魯帖木兒, 爲元 東寧府同知。 及太祖拏東寧, 原景迎降, 遂與俱來厚遇之。】永興大都護府事仁和之子。 世居吉州, 其族親盤據諸邑, 爲一道土豪, 多聚良民, 廣占土田, 畜財鉅萬。 及國家行號牌之法, 施愛惡其刷括, 遂生逆謀, 令其族親等, 誑誘諸邑軍民以爲: "國家遣南方兵船由海路, 陸軍由雪寒嶺鐵嶺, 一時俱入, 盡殺本道軍民。" 又誘古邑同, 告兵船泊厚羅土島, 以驗之。 適孝文巡到吉州, 按古邑同, 事甚急, 施愛卽誣以謀反殺之, 馳書諸邑留鄕所, 盡殺官吏之自京來者。 於是諸邑響應, 爭先殺之。 如行商、僧徒, 非本道之人, 亦皆殺之, 定平以北, 無得脫者。 自居山戰敗之後, 施愛吉州, 焚利城吉州倉穀, 散其家穀于隣里, 以其衣服鞍馬, 付李明孝鏡城。 以所殺節度使、守令等衣服、鞍馬, 付趙孝昌及其女壻朴孝孫等, 往誘野人, 請爲應援。 欲至龍城, 更合五鎭兵, 大拒官軍, 施愛收敗兵, 至鏡城 件加退, 爲雲露等所執。


  • 【태백산사고본】 16책 43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8책 109면
  • 【분류】
    변란(變亂)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