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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6월 14일 정미 1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이시애의 난 평정에 관한 갑사 유자광의 상서

갑사(甲士) 유자광(柳子光)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하번(下番)하여 남원(南原)에 있으면서 이시애(李施愛)의 일을 늦게 듣고서는 바야흐로 식사하다가 비저(匕箸)187) 를 버리고 계속 군현(郡縣)을 독려하여, 신(臣)이 징병(徵兵)하는 문권(文卷) 속에 이름이 기록된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본디 궁검(弓劎)으로써 자허(自許)하였으니, 용약(踴躍)하라는 것을 듣고 말[馬]을 의지하여 행군을 기다려 여러 날 차례를 기다렸는데, 군현(郡縣)에서 행군을 독촉하여 날짜를 정하였다는 지령이 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에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분연(奮然)히 그윽이 이르기를, ‘국가가 비록 사방(四方)을 계엄(戒嚴)하여서 병졸(兵卒)을 정제(整齊)하더라도 어찌 사방의 병사를 다 징발한 연후에야 일개 이시애(李施愛)를 토평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갑사(甲士)에 적명(籍名)되어 항상 변야(邊野)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하였는데, 하물며 국가에 심복(心腹)하는 적(賊)을 당하여 신이 어찌 마음으로 축대(逐隊) 수행(隨行)하여 징병(徵兵)의 수에 열차(列次)하고 원방(遠方)에서 안처(安處)하여 자고 먹는 데 좋게 여기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이달 초6일에 남원(南原)으로부터 발정(發程)하여 하루에 갑절의 길을 걸어서 도로(道路)를 갔는데, 사람에게 전문(傳聞)하니, 모두 이르기를,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는 아직도 굴혈(窟穴)을 지키고, 적은 죄 없는 이를 죽이어 함길도(咸吉道) 한 도가 소요(騷擾)하게 되었다.’고 하니, 어찌 일개의 적(賊)을 즉시 나아가 죽이지 못하고 전하의 치평(治平)에 누(累)를 끼치며, 묘당(廟堂)의 도의(圖議)를 수고롭게 하십니까? 살피지 못하거니와 전하께서는 벌써 장사(將士)로 하여금 1운(運)·2운(運), 심지어는 3운·4운에 이르도록 병사를 나누어 들여보냈다 하는데, 그렇다면 어찌 이제까지는 한 장사(將士)도 이시애(李施愛)의 머리를 참(斬)하여서 서울에 바치는 이가 없습니까? 만약 즉시 토평(討平)하지 못하면 이시애로 하여금 극진한 흉악(兇惡)을 방자(放恣)하게 하고, 날을 허비하여 주륙(誅戮)을 머물면, 함길도 수십 주(州)의 죄없는 백성이 진실로 가련(可憐)하게 되며, 또 만약 이시애가 악독함을 극진히 하여 죄가 다하면 이르는 곳의 주·부(州府)를 불사르고, 이르는 곳의 병기(兵器)를 싣고, 이르는 곳의 사졸(士卒)을 겁탈(劫奪)하여, 하루아침에 북적(北狄)에 도망하여 들어간다면, 다른 날에 변경의 근심을 당할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니, 전하는 어찌 근심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망령되이 이르거니와, 이제 장수가 된 자는 바로 부귀(富貴)를 극진하지 않음이 없는데,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여 두류(逗遛)188) 하고 진격하지 않으며, 하는 것 없이 지구(持久)하고, 서로 이르기를, ‘이제 하월(夏月)을 당하여 궁력(弓力)이 해이하기 쉽고, 빗물이 바야흐로 막히고, 산천이 험조(險阻)하며, 초목이 무성하니, 경솔하게 진격할 수 없으며, 또 경솔하게 싸울 수도 없다.’고 합니다. 달리는 알지 못합니다마는, 우리만 홀로 여름을 당하고 저는 홀로 당하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궁력(弓力)이 해이하여지고 저는 홀로 해이하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빗물에 막히고 저는 홀로 막히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산천이 험하고 저는 홀로 험하지 않겠습니까? 비유하건대 두 쥐가 굴속에서 함께 다투면 힘이 있는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급하게 장사(將士)로 하여금 날을 정하여 전쟁하여서 재화가 깊지 않은 때를 막지 않으십니까? 손무(孫武)는 말하기를, ‘병법은 졸속(拙速)함은 들었어도 공교하게 오해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대저 옛 사람의 용병(用兵)하는 것은 모두 인의(仁義)로서 몸[體]을 삼고, 권술(權術)로써 용(用)을 삼으며, 더욱 귀중하게 여기는 자는 신속(神速)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장사(將士)가 두류(逗遛)하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신은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으로써 말을 폐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미천하다 하여 폐하지 마소서. 신은 비록 미천(微賤)하더라도 또한 한 모퉁이에 서서 스스로 싸움을 하여 쾌(快)하게 이시애(李施愛)의 머리를 참(斬)하여 바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글을 보고 경탄(驚嘆)하며,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그 글을 읽게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 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한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내 장차 임용(任用)하여서, 그 옳은 것을 시행하리라."

하고, 명하여 먹이게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전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얼자(孽子)이니, 효용하고 민첩하여 기사(騎射)를 잘하고, 서사(書史)를 알며, 문장을 잘 하였고, 일찍이 큰소리를 하여 기개(氣槪)를 숭상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2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8책 87면
  • 【분류】
    변란(變亂) / 정론(政論)

  • [註 187]
    비저(匕箸) : 숟가락과 젓가락.
  • [註 188]
    두류(逗遛) : 머물러서 떠나지 아니함.

○丁未/甲士柳子光上書曰:

臣下番在南原, 晩聞李施愛事, 方食不覺棄匕箸, 繼以郡縣, 督臣錄名徵兵文卷中。 臣素以弓劍自許, 聞之踴躍, 倚馬待行, 留次數日, 未有郡縣督行定日之令。 臣於是終夜不寐, 奮然竊謂: "國家雖戒嚴四方, 以整兵卒, 豈盡徵四方之兵, 然後可討一施愛乎?" 臣旣籍名甲士, 常欲立功邊野, 爲國一死。 況當國家有腹心之賊, 臣何心隨行逐隊, 列於徵兵之數, 安處遠方, 而甘於眠食乎? 故臣本月初六日, 發自南原, 倍日兼行, 行之道路, 傳聞於人, 皆曰: "逆賊施愛, 尙守窟穴, 賊殺不辜, 咸吉一道爲之騷擾。" 何一介之賊, 不卽就戮, 累殿下之治平, 而勞廟堂之圖議乎? 未審殿下已令將士, 一運、二運, 至於三運、四運, 分兵入送乎? 然則何至今, 無一將士, 斬施愛頭以獻京師乎? 若不卽討平, 使施愛極肆兇惡, 而費日稽誅, 則咸吉數十州無罪之民, 誠爲可憐。 又若施愛惡極罪窮, 焚所至州府, 散所至倉庫, 載所至兵器, 刦所至士卒, 一朝亡入北狄, 則其他日邊患, 有不可當者矣。 殿下豈不憂之乎? 臣妄謂, 今之爲將者, 無乃極富貴, 畏死生逗遛不進, 曠日持久, 相謂曰: "今當夏月, 弓力易解, 雨水方阻, 山川險隘, 草木盛茂, 不可輕進, 又不可輕戰乎!" 殊不知, 我獨當夏, 而彼獨不當乎; 我獨解於弓力, 而彼獨不解乎; 我獨阻於雨水, 而彼獨不阻乎; 我獨險於山川, 而彼獨不險乎? 比之兩鼠共鬪穴中, 有力者勝。 殿下何不急令將士, 刻日與戰, 以杜禍之不深之時乎? 孫武曰: "兵聞拙速, 未覩巧之久也。" 大抵古人用兵, 皆以仁義爲體, 權術爲用, 而尤所貴者, 神速而已。 今之將士逗遛不進, 臣未知其可也。 孔子曰: "不以人廢言。" 伏惟殿下不以臣微而廢之。 臣雖微賤, 亦願立一隅, 得自爲戰, 快斬施愛頭以獻。

上覽書驚嘆, 召尹弼商令讀其書, 仍傳曰: "此書甚合予意, 眞奇材也。 予將任用, 以施其可。" 命饋之。 子光, 前府尹之孼子, 驍勇捷疾善騎射, 知書史能文, 嘗大言尙氣槪。


  • 【태백산사고본】 15책 42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8책 87면
  • 【분류】
    변란(變亂)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