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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2월 2일 무술 1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영응 대군 이염의 졸기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 졸(卒)하였다. 염(琰)세종(世宗)의 여덟째 아들로서,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조각(雕刻)하여 만든 화촉(花燭)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초[燭]가 타면 반드시 〈초에 조각한〉 어린아이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니, 세종(世宗)이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처음에 영흥 대군(永興大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영응 대군(永膺大君)으로 고쳤다. 세종이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염(琰)세조(世祖)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세조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가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중사(中使)044) 의 왕래(往來)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였다. 은 천자(天資)가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훙(薨)하였으므로,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寶貨)가 모두 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財物)이 누거만(累巨萬)이 되었다. 그러나 자못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입시(入侍)하여서도 겸공(謙恭)하고 근각(謹恪)하여 조금도 과실(過失)이 있지 아니하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세종이 일찍이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택하여 배필(配匹)로 삼았는데, 송씨(宋氏)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그를 버리게 하고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세종이 승하(昇遐)하자, 송씨를 그리워하여 정씨를 내쫓고 〈송씨와〉 다시 합하여 살았다. 처음에 군부(君父)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또한 버릴 만한 죄(罪)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의 의논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삼았다. 시호(諡號)를 경효(敬孝)라 하였으니, 밤낮으로 경계(警戒)한 것을 경(敬)이라 하고, 도덕(道德)을 지키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측실(側室)에 아들 하나가 있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8책 5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인물(人物)

  • [註 044]
    중사(中使) : 궁중에서 왕의 명령을 전하던 내시.

○戊戌/永膺大君 卒。 , (世子)〔世宗〕 第八子。 纔能言, 見花燭雕作孩兒, 驚曰: "燭燒則當及孩兒, 不忍見也。" 世宗大奇之。 初封永興大君, 後改永膺世宗鍾愛, 嘗以世祖世祖眷遇, 異於諸弟。 嘗患疾, 世祖軫慮, 凡可以已疾者, 無所不至, 中使絡繹於道。 天資醇厚, 工書畫, 解音律。 世宗嘗欲盡以內帑珍寶賜, 未果而薨。 及文宗卽位, 傾帑賜之, 悉輸其第。 於是, 御府先世相傳之寶, 盡歸於, 財累巨萬。 頗儉嗇, 不事侈靡。 毋入侍, 謙恭謹恪, 鮮有過失, 世祖甚重之。 世宗嘗擇宋復元女爲配。 宋氏有疾, 世宗命去之, 改娶鄭忠敬女。 世宗昇遐, , 黜而復合。 初以君父之命去, 又無罪可去, 而以愛憎黜納, 時議以此短之。 諡曰敬孝: 夙夜警戒, 敬; 秉德不回, 孝。 側室有一子。


  •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8책 5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