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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 11월 2일 경오 3번째기사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였는데, 상소는 이러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하늘이 만민을 내고, 임금[司牧]을 정하여, 이 백성들을 옷 입히고 밥먹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굶주리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 병·형(兵刑)을 설치하여 그 그릇된 것을 금하게 하고 예의(禮義)를 밝혀서 그 착한 것을 권장하게 되니, 제왕(帝王)의 직책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할 따름입니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정치는〉 식량을 충족시키고, 군비를 충분히 하고, 백성들을 믿게 하는 것이다.’ 했으며, 또 말씀하기를, ‘백성들이 번성하고 백성들이 부유해지면, 또한 가르쳐야 한다.’고 했으니, 이미 부유해지면 식량이 충족하고, 이미 번성해지면 군비가 충분하고, 백성들을 가르쳐서 믿게 하여, 풍속을 후하게 하고 명분(名分)을 정하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신(臣)은 세 가지로써 되풀이하면서 진술하겠습니다.

1.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고, 식량은 백성의 제일 중요한 것이 됩니다. 신(臣)이 살펴보건대, 농민은 화경 수운(火耕水耘)하여 근고(勤苦)가 막심한데도,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함이 같지 않으며 천후(天候)와 수재(水災)·한재(旱災)가 고르지 않으니, 일년 동안에 부지런히 움직여도 얻는 바는 얼마되지 않아서 국가의 조세(租稅)도 오히려 충당하지 못하는데, 부상(富商)·대고(大賈)가 방납(防納)375) 한다고 칭탁하고서 여러 가지로 수취(收取)하게 되니, 장차 무엇으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보살피겠습니까? 근일에 문폐사(問弊使)로서 법을 범하는 관리가 그 절반이나 차지하게 되니, 그 해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대납(代納)하는 물건 중에서 가장 백성의 해가 되는 것은 지둔(紙芚)·유밀(油蜜)·백저(白楮)·정철(正鐵)·죽목(竹木)·공포(貢布)·공탄(貢炭)·소목(燒木)·토목(吐木)·부등방목(不等方木)·표피(豹皮)·선척(船隻)이고, 청초(靑草)에 이르러서는 곳곳에서 나는데도 백성들이 스스로 바치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전세(田稅)는 국가의 큰 공물(貢物)인데도 간혹 대납(代納)하는 사람이 있게 되니, 대납(代納)의 해독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지금 성주(聖主)께서 위에 계시면서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고 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일이 있는데, 만약 구습(舊習)을 따라 행하여 대책(對策)을 강구(講求)하지 않다가 후일에 이르러 만일에 취렴(聚斂)하는 신하가 있게 된다면 백성이 아래에서 곤궁하여도 위에서는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니, 그 해됨이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기르는 중요한 일과 백성에게서 수취(收取)하는 중대한 일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큰 계책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특별히 유념(留念)하시고 대신(大臣)들과 모의(謀議)하여 결단하여서 경장(更張)하고, 먼저 공안(貢案)을 취하여 일일이 강구(講求)하여 수륙(水陸)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각기 있는 고을에 나아가서 이를 정하게 하고, 그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감하고 줄여서 어떤 물건은 관청에서 스스로 준비하여 바치고 어떤 물건은 백성들이 스스로 준비하여 바치게 할 것이며, 그중에서도 부득이 준비하여 바치지 못하는 것은 상정(詳定)하여 여러 고을로 하여금 헤아려서 포화(布貨)로 내게 하면 해당 관사(官司)에 운반하여 그 관사(官司)로 하여금 무역(貿易)해서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지둔(紙芚)·유밀(油蜜)·백저(白楮) 같은 것은 백성이 스스로 바치게 하고, 표피(豹皮)는 관가에서 모름지기 준비해 바치게 하고, 죽목(竹木)은 바다의 배로 운반하도록 하며, 공포(貢布)는 강의 배로 운반하도록 하고, 정철(正鐵)은 황해도(黃海道)의 여러 고을에서 바치도록 하며, 선척(船隻)·탄(炭)·소목(燒木)·토목(吐木)·부등방목(不等方木)은 수상(水上)376) 산군(山郡)에서 만들게 하고, 풀은 곳곳에 있는 것을 바치게 하고, 쌀은 민간에 있는 것으로서 모래와 돌이 섞이지 않은 것을 바치게 하소서. 이렇게 하여 경중(京中)의 제사(諸司)에서 막히어 제때에 봉납(捧納)하지 못하는 것은 관리와 고자(庫子)에게 모두 중한 형벌을 가(加)하고, 수령(守令)으로서 강제로 대납(代納)하게 한 자와 조관(朝官)으로서 사사로이 스스로 대납(代納)한 자는 각기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당자는 수군(水軍)에 충원(充員)시켜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못하도록 하며, 흥리인(興利人)과 색리(色吏)는 강도(强盜)의 형률(刑律)에 비하여 사형(死刑)에 처하고 재산은 적몰(籍沒)하여서 고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도록 하소서.

1. 과전(科田)377) 은 사대부(士大夫)를 기르는 것입니다. 신(臣)이 듣건대, 장차 직전(職田)을 두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나 조사(朝士)는 이미 그 봉록(俸祿)을 먹고서 또 직전(職田)을 먹게 되는데, 치사(致仕)378) 한 신하와 무릇 공경 대부(公卿大夫)의 자손(子孫)들은 장차 1결(結)의 전지(田地)도 먹을 수 없게 되니, 이른바 대대로 국록(國祿)을 주는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우리 나라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여 사(士)379)농(農)380) 이 각기 다르니, 만약 봉록을 먹지 않고 조세(租稅)를 먹지 않는다면 서민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서민과 다름이 없게 된다면 나라에 세신(世臣)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군주(君主)는 공경 대부(公卿大夫)를 다스리고, 공경 대부는 사(士)·서인(庶人)을 다스리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받들게 되니, 명분(名分)이 본디 정해지고 풍속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면 그 지혜를 막아내고 그 힘을 제어(制御)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중외(中外)의 유사(攸司)가 각기 사송(詞訟)을 청단(聽斷)하고 또 격고(擊鼓)381) 의 법을 설치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도록 하고, 문폐사(問弊使)를 보내어 탐학(貪虐)한 것을 규찰(糾察)하도록 하는 것은, 임금의 덕화(德化)를 베풀고 백성의 사정(事情)을 상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만 제비를 뽑는 것은 자기의 번쇄(煩瑣)한 일을 많게 하는 것이며, 상자에 투서(投書)하는 것은 후일(後日)의 무구(誣構)하는 조짐을 열게 될 것이요, 대궐의 북쪽에서 깃발을 휘두르고 궁궐의 옆에서 곡읍(哭泣)하는 것도 또한 태평의 기상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른바 풍속이란 것은 백년 동안을 쌓은 후에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하루 동안에도 무너지고 남음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후일의 폐단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그 깃발을 휘두르고 곡읍(哭泣)하는 사람은 중한 형벌에 처하게 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풍습(風習)을 고치고, 들춰내어 고발하는 풍속을 막도록 하소서.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국가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시조(始祖)께서 한 나라에 큰 공이 있고 열성(列聖)께서 이 백성들에게 큰 덕을 베풀어서, 법도를 제정하고 기강(紀綱)을 세우며 교화(敎化)를 밝히고 풍속을 하나로 하는 것이니, 이에 신료(臣僚)들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곁에서 이를 보좌하고 군상(君上)은 신하의 계획을 받아들여 나라를 유지(維持)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국가의 대업(大業)을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殿下)께서 특별히 유념(留念)하시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중국 조정에서 장차 개주(開州) 등지에 위소(衛所)를 세우려고 하니, 이것은 국가 문정(門庭)의 걱정입니다. 평안도(平安道)의 백성들은 다만 방수(防戍)에만 시달릴 뿐 아니라 또한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사신의 영접과 전송을 하는 데에도 매우 시달리게 되어, 태반이 동팔참(東八站)382)해주(海州)·개주(蓋州) 등 여러 주(州)에 유입(流入)하게 되므로, 한편으로는 토병(土兵)이 모두 없어지게 되고, 한편으로는 저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알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비록 후일 우리의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또한 후일 우리에게 해가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이외의 사하사(謝賀使)·주문사(奏聞使)·진응사(進鷹使) 등은 전일에 비하여 3분의 1을 줄이고 이를 합쳐서 보내게 하고, 혹은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등에게 붙여서 다시 건량(乾糧)의 수량을 줄이고 무역(貿易)의 금령(禁令)을 더욱 엄중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해도 종식될 수가 있을 것이며, 또 안주(安州) 이북의 공물(貢物)은 다른 도(道)에 없는 초서피(貂鼠皮)·인삼(人蔘) 이외의 것은 일체 영구히 없애고 오랑캐에게 들어갔다가 본국(本國)에 돌아온 사람은 3자급을 뛰어올려서 관직을 제수하고 5년을 한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소서. 이에 강변(江邊)위원(渭原)의 백성은 만포(滿浦)에 합치고, 이산(理山)입석(立石)에 옮기고, 벽동(碧潼)성간(城干)에 옮겨서, 각기 1고을을 설치하여 강계(江界)의 길을 통하게 하고, 창성(昌城)삭주(朔州)정녕(定寧)에 합쳐서 또한 첨사(僉使)를 두고, 다만 토병(土兵)만 남겨 두고는 남방의 백성은 들어와서 지키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강계(江界)·삭주(朔州)·의주(義州) 3진(鎭)의 형세가 장건하게 될 것이며, 이산(理山)벽동(碧潼)은 본시 산(山) 뒤에 있어서 여연(閭延)·무창(茂昌)과 같이 일체(一體)가 될 것이며, 강역(疆域) 가운데에 있어서 예전과 같을 것이니, 적인(狄人)이 진실로 엿볼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들어와 침범할 수도 없을 것이므로, 방수하는 폐단이 어찌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1. 옛날에 조위(曹魏)383) 에서 종회(鍾會)를 시켜 촉한(蜀漢)을 치게 했는데, 연속(掾屬)384) 소제(邵悌)사마소(司馬昭)에게 말하기를, ‘종회(鍾會)는 맡은 일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시켜 가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했는데, 그 후에 종회(鍾會)가 배반하여 복죄(伏罪)된 것이 과연 소제(邵悌)의 말과 같았습니다. 평안도(平安道)는 땅이 다른 나라에 연접해 있고, 함길도(咸吉道)는 도로가 아득히 멀어서 일이 염려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니, 이를 전조(前朝)의 역사에서 상고해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런 염려가 조금도 없겠지마는, 훗날의 계획을 위해서는 오늘날로부터 이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금후로 양계(兩界)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서 부임(赴任)하지 말도록 하고, 함흥(咸興)안주(安州) 이북(以北)의 수령(守令)들도 또한 가족(家族)을 거느리고서 가지 말도록 하여 이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으로 삼도록 하소서.

1. 국가의 동남쪽에 적국(敵國)으로서는 대마도(對馬島)가 가까운데, 만약 훗날에 편안하지 못한 사건이 있다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멀리 가서 정벌할 필요도 없으며 험지(險地)에 들어가서 이익을 다툴 필요도 없고, 다만 경주(輕舟) 수백 척으로 바람을 타고 바로 그 곳으로 나아가서 화포(火砲)로써 그 주즙(舟楫)385) 을 다 불살라 버리면, 배는 산속에 간수할 수가 없으므로 모두 바다에 뜨게 될 것이니, 몇 차례 지나지 않아서 섬 안의 왜적(倭賊)을 굶어서 죽게 할 수가 있습니다. 야인(野人)에 이르러서는 평안하여 일이 없으면 우리의 백성과 가축(家畜)을 사로잡아 가고, 군사를 일으켜 들어가서 정벌하면 산을 타고서 멀리 도망하게 되니, 이를 막아서 평정하는 데 계책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서 이 무리들을 대우할 적에는 혼인(婚姻)을 많이 통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보다 먼저 야인(野人)으로서 투화(投化)한 사람은 의례(依例) 천구(賤口)로서 양부(良夫)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주게 되어 있으니, 먼 지방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이웃 나라를 동일(同一)하게 대우하는 의리(義理)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비록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은 중국과 흡사하지마는 또한 동해(東海)의 밖에 있으니, 어찌 이것으로써 북방(北方) 사람을 천대(賤待)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후에 야인(野人)으로서 투화하는 사람은 족속(族屬)의 강약(强弱)에 따라 3등으로 나누어서, 1등은 문음(門蔭) 사대부(士大夫) 집에, 2등은 잡직(雜職) 사대부(士大夫) 집에, 3등은 평민(平民) 집에 통혼(通婚)하도록 하고, 그 행성(行城)386) 의 성밑과 상동량(上東良) 등지의 야인(野人)들은 부근의 토착(土着) 군호(軍戶)에게, 이와 같이 등급을 나누어 통혼(通婚)하도록 하소서.

1. 대저 병졸(兵卒)은 정예(精銳)함을 귀하게 여기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 내금위(內禁衛)와 겸사복(兼司僕)은 사후(射侯)하여 2백 보(步)로 시험하고, 갑사(甲士)와 별시위(別侍衛)는 1백 50보(步)로 시험하며, 파적군(破敵軍)·대졸(隊卒)·정병(正兵)·기선군(騎船軍)은 1백 보(步)로 시험하고, 잡색(雜色)의 기병(騎兵)·보병(步兵)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1백 보(步)로 시험하여, 이에 시재(試才)한 사람을 주호(主戶)로 삼고 무재(無才)한 사람을 협호(挾戶)로 삼아, 그 액수(額數)를 정하여 아름다운 칭호로 바꾸고 몇 번(番)으로 나누어 머무를 달을 정하되, 대신 입역(立役)하는 것을 금하고 결원(缺員)에 따라 충보(充補)하여서 백세(百世)토록 바꾸지 않는다면 한 명의 병졸(兵卒)이라도 시재(試才)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1. 군정(軍政)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신(臣)은 항상 1정(丁)이라도 국민(國民)으로서 누적(漏籍)되는 일이 없게 하고, 1인(人)이라도 단정(單丁)으로서 입호(立戶)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군적(軍籍)은 2정(丁)을 1보(保)로 삼고, 4보(保)를 1기병(騎兵)으로 삼게 되었는데, 3정(丁)을 1보(保)로 삼는다면 1인은 호주(戶主)가 되어 군대를 훈련하고 1인은 솔정(率丁)이 되어 농사일을 하며, 1인은 여정(餘丁)이 되어 옮겨가면서 사무를 보게 한다면 1호(戶)가 충실(充實)하여질 것이며, 2정(丁)을 1보(保)로 삼는다면 1인은 호주(戶主)가 되어 군대를 훈련하고 1인은 솔정(率丁)이 되어 농사일을 하게 되므로 여정(餘丁)이 없게 될 것이니 호(戶)가 충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4약호(弱戶)로써 1기병(騎兵)을 기르게 하는 것은 3부호(富戶)로써 1병졸(兵卒)을 기르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물며 사변(事變)이 있으면 이미 모두 장부에 등록되어 있으니 모두 뽑아서 병졸을 삼을 수가 있고, 평상시에는 그 호수(戶數)를 감손(減損)하여 백성의 힘을 기를 수가 있으니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또 보(保)를 만드는 것은 호구(戶口)를 편성(編成)하는 것이니 전지(田地)의 수량을 계산하지 않고서 다만 인정(人丁)의 수효만 계산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차역(差役)할 때에 그것을 균평(均平)하게 하려고 한다면 전지(田地)의 수량만 오로지 계산하고서 인정(人丁)의 수효는 아울러 계산하지 않아도 또한 될 것입니다. 연호군(煙戶軍)·잡색군(雜色軍)·팽배(彭排)·대졸(隊卒)과 같은 것은 1보(保)가 스스로 1병(兵)이 될 수가 있고 선군(船軍) 정병(正兵)은 2보(保)가 1병(兵)이 될 수가 있고, 갑사(甲士)와 별시위(別侍衛)는 3보(保)가 1병(兵)이 될 수가 있으니, 이것은 다만 병졸의 집을 넉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민생(民生)의 일용(日用)에 쌍정(雙丁)을 1호(戶)로 삼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 함길도(咸吉道)는 본시 성조(聖祖)께서 흥운(興運)한 땅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 비로소 5진(鎭)을 세워 5대군(大君)에게 사향(賜鄕)하셨으니, 5진(鎭)의 사람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삼고 있습니다. 금후로 또한 이 뜻을 모방하여 함흥(咸興) 이북(以北)의 여러 고을은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종친(宗親)에게 나누어 하사(下賜)하여서 향읍(鄕邑)으로 삼도록 하고, 각기 노자(奴子) 1호(戶)를 두어 근본의 땅을 견고하게 하소서.

1. 평안도(平安道)는 서쪽으로 명(明)나라에 인접(隣接)하여 사람들이 모두 진(鎭)에 들어갔기 때문에 본시부터 토성(土姓)은 없었는데, 또 근일에는 강제로 전지(田地)를 개간하게 하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가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빌건대 지금 친공신(親功臣)과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2품 이상에게 식읍(食邑)을 나누어주기를 삼공(三公)의 식읍(食邑)과 같이 하여 평양부(平壤府)의 1천 호(戶)를 주고, 정 1품은 안주목(安州牧)의 7백 호(戶)를 주고, 종 1품은 성천부(成川府)의 5백 호(戶)를 주고, 정 2품은 가산군(嘉山郡)의 3백 호(戶)를 주고, 종 2품은 영유현(永柔縣)의 1백 호(戶)를 주되 실제로 조세(租稅)는 받아먹지 않고 다만 세시(歲時)로 통자(通刺)만 하게 하고, 이어서 각기 노자(奴子) 1호(戶)를 두고서 고을 안의 일을 합심(合心)하여 포치(布置)하여서 내외(內外)가 서로 유지(維持)되고 체통(體統)이 서로 제어(制御)되어 자손(子孫)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 칭호를 물려받도록 하고, 상납(上納)한 후에는 양계(兩界)의 감사(監司)는 모두 가족(家族)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14책 40권 9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외교-명(明)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375]
    방납(防納) : 납공자(納貢者)의 공물(貢物)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代價)를 납공자로부터 배징(倍徵)하던 일.
  • [註 376]
    수상(水上) : 함경도의 지명.
  • [註 377]
    과전(科田) : 과전법(科田法)에 의해서 관원에게 지급되는 토지. 과전법은 이성계(李成桂)가 공양왕 3년(1391)에 정하여, 권문 세가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서 전국을 경기(京畿)와 외방(外方)으로 구분하고 경기 가운데에서 지급하였음.
  • [註 378]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 [註 379]
    사(士) : 관리.
  • [註 380]
    농(農) : 농민(農民).
  • [註 381]
    격고(擊鼓) : 거둥 때에 원통한 일을 임금에게 상소하기 위하여 북을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던 일.
  • [註 382]
    동팔참(東八站) : 압록강(鴨綠江)과 산해관(山海關) 사이에 있었던 여덟 군데의 역참(驛站). 우리 나라 사신이 중국에 왕래하던 교통로.
  • [註 383]
    조위(曹魏) : 조비(曹丕)가 건국한 삼국 시대의 위나라.
  • [註 384]
    연속(掾屬) : 속관(屬官).
  • [註 385]
    주즙(舟楫) : 배와 노.
  • [註 386]
    행성(行城) : 변경 지방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강 연안에 길게 직선으로 쌓은 성을 말함.

○大司憲梁誠之上疏曰:

竊惟天生蒸民, 立之司牧, 衣食斯民, 使不至於飢寒。 設兵刑以禁其爲非, 明禮義以勸其爲善, 帝王之職, 不過如斯而已。 孔子曰: "足食足兵, 民信之矣。" 又曰: "旣庶旣富, 又敎之。" 旣富則足食矣, 旣庶則足兵矣, 敎之信之, 則厚風俗定名分之謂也。 臣以三者, 反覆陳之。 一, 民惟邦本, 食爲民天。 臣觀農民, 火耕水耘, 勤苦莫甚。 而土地肥瘠之不同, 天時水旱之不齊, 終歲勤動, 所得無幾, 國家租稅, 尙不能充。 而富商大賈, 托爲防納, 取之萬端, 其將何以仰事俯育哉? 近日問弊之使, 犯法之吏, 居其大半, 其爲害可知也。 其代納之物, 最爲民害者, 曰紙芚, 曰油蜜, 曰白楮, 曰正鐵, 曰竹木, 曰貢布, 曰貢炭, 曰燒木、吐木、不等方木, 曰豹皮, 曰船隻。 以至靑草, 生於處處, 而民不肯自納。 田稅國家大貢, 而間或有代納者, 代納之害, 至此極矣。 今聖主在上, 厲精圖治, 而尙有如此之事。 若因循不講, 至於後日, 一有取斂之臣, 則民窮於下, 而上不之聞。 其爲害, 可勝言哉? 養民重事, 取民大節, 宗社大計也。 伏望殿下, 特留宸念, 謀及大臣, 快斷更張。 先取貢案, 一一講求, 水陸所産, 各就所有之郡定之。 其不緊之物, 爲之減省, 某物官自備納, 某物民自備納。 其不得已不能備納者, 以爲詳定, 令諸邑量出布貨, 輸之該司, 令其司貿易以用。 如紙芚、油蜜、白楮, 民可自納, 豹皮則官須備納。 竹木則以海船運, 貢布則以江船運。 正鐵, 黃海諸郡, 納之船隻。 炭、燒木、吐木、不等方木, 水上山郡爲之。 草則以處處所有而納之, 米則以民間所有不雜沙石者納之。 於是, 京中諸司留難, 不時捧納者, 官吏庫子, 竝加重典。 守令之勒令代納者, 朝官之私自代納者, 各杖一百, 身充水軍, 永不敍用。 興利人及色吏, 比强盜律, 置之大辟, 籍沒財産, 給賞告者。 一, 科田所以養士大夫者也。 臣聞將置職田。 然朝士旣食其祿, 又食職田, 而致仕之臣, 與夫公卿大夫之子孫, 將不食一結田, 似乖所謂世祿之意也。 我東方土瘠民貧, 士農各異, 若不食祿食租, 則與齊民無異矣。 與齊民無異, 則國無世臣矣。 此不可不慮者也。 一, 人主臨公卿大夫, 公卿大夫臨士庶人。 上以臨下, 下以承上。 非名分素定, 風俗已成, 不可以禦其智, 而制其力也。 今中外攸司, 各聽詞訟, 而又設擊鼓之法, 以伸冤抑。 遣問弊之使, 以糾貪虐, 可謂宣上德, 而達下情矣。 但抽籤, 多自己煩瑣之事; 投匭, 開後日誣構之漸。 以至麾旗於闕北, 哭泣於宮側, 亦違大平氣像。 所謂風俗者, 積之百年而乃成, 毁之一日而有餘。 伏望殿下, 特慮後弊, 其麾旗哭泣者, 置之重典, 以革凌上之風, 以杜告訐之俗。 臣竊惟國家大業, 必始祖有大功於一國, 列聖施大德於斯民, 制法度而立紀綱, 明敎化而一風俗。 於是, 臣僚盡心力而夾輔之, 君上納謀謨而維持之, 然後國家大業, 可萬世永享矣。 伏惟殿下, 特留聖慮, 宗社幸甚。 一, 中朝將建衛于開州等處, 此國家門庭之患也。 平安之民, 非徒困於防戍, 亦甚困於入朝迎送之行, 大半流入於東八站及諸州。 一則土兵盡耗, 一則彼知我虛實, 非細故也。 雖後日爲我之利, 亦安知後日爲我之害? 爲今之計, 正朝、聖節外, 謝賀、(奏問)〔奏聞〕 、進鷹等使, 比前日減三分之一, 合而遣之。 或就付正朝、聖節等使, 更減乾糧之數, 益嚴貿易之禁。 如是則迎送之弊, 庶可息矣。 又安州以北貢物, 他道所無貂鼠皮、人參外, 一切永除。 其沒蕃還本人, 超三資授職, 限五年復戶。 於是, 江邊渭原之民, 合于滿浦, 移理山立石, 移碧潼城干, 各置一邑, 以通江界之路。 以昌城合于朔州定寧, 亦置僉使, 只留土兵, 不使南民入戍。 如此則江界朔州義州三鎭之勢壯, 而理山碧潼, 本居山後, 與閭延茂昌一體, 其在疆域之中如古也。 狄人固不得以窺覘, 亦不得以入侵矣。 防戍之弊, 豈不省哉? 一, 昔曹魏鍾會, 椽屬邵悌言於司馬昭曰: "無任, 不若使他人行也。" 其後, 反伏辜, 果如言。 平安道地連他國, 咸吉道道路遼遠, 事多有可慮者。 考之前朝史, 可知也。 在今日, 則萬無此慮, 爲後日計, 不可不自今日而爲之也。 今後兩界監司、兵使, 勿令率妻子赴任, 至於咸興安州以北守令, 亦勿令率眷以行, 以除斯民之弊, 以爲萬世之慮。 一, 國家東南之敵, 對馬島爲近。 若他日有不靜之事, 則不必大擧遠征, 不必入險爭利。 但以輕舟數百, 乘風直指其處, 以火砲盡焚其舟楫, 則舟不藏之於山, 皆浮于海, 不過數次, 島中之, 可使之餓而死也。 至於野人, 平安無事, 則虜我民畜, 興師入征, 則騎山遠遁, 禦之平之, 得策甚難。 之待此類, 多通婚媾。 前此野人之投化者, 例給賤口, 嫁良夫所生, 非所以綏遠人、一隣國之義也。 我國雖禮樂文物侔擬中國, 而亦在東海之外, 豈可以此而賤待北人乎? 今後野人之投化者, 以族屬强弱, 分爲三等。 一等於門蔭士大夫家, 二等於雜職士夫家, 三等於平民家通婚。 其行城城底, 及三東良等處野人, 或於附近土着軍戶, 如此分等通婚。 一, 大抵兵貴精, 不貴多。 我國人民, 無慮一百萬戶。 其中控弦三十萬, 精兵一十萬, 勇士三萬。 如內禁衛、兼司僕射侯, 試二百步; 甲士、別侍衛, 試一百五十步; 破敵軍、隊卒、正兵、騎船軍, 試一百步; 以至雜色騎、步, 竝試百步。 於是, 以試才者爲主戶, 無才者爲挾戶。 定其額數, 易以美號, 于以分幾番, 于以定留朔。 禁其代立, 隨闕充補, 使百世不易, 此則無一兵不試才者也。 一, 軍政, 國家重事也。 臣常欲無一丁以國民而漏籍, 無一人以單丁而立戶。 今軍籍, 以二丁爲一保; 以四保爲一騎兵。 然以三丁爲一保, 則一人爲戶主治兵, 一人爲率丁治農, 一人爲餘丁, 轉移執事, 一戶實矣。 二丁爲一保, 則一人爲戶主治兵, 一人爲率丁治農, 而無餘丁, 戶不實矣。 以四弱戶, 養一騎兵, 不若以三富戶, 養一兵也。 況有事則旣皆付籍, 皆可抄而爲兵矣; 平時則損其戶數, 以養民力, 不亦可乎? 且作保所以編戶口也, 則不計田地之數, 而只計人丁之數可也。 但差役之時, 欲其均也, 則專計田地之數, 而不幷計入丁之數, 亦可也。 如烟戶、雜色、彭排、隊卒, 一保自爲一兵。 船軍、正兵, 二保爲一兵。 甲士、別侍衛, 三保爲一兵。 此非徒使兵家足也, 民生日用, 不可以雙丁爲一戶也。 一, 咸吉道本聖祖興運之地也。 世宗朝始建五鎭, 以五大君賜鄕, 五鎭之人, 至今以爲美談。 今後亦倣是意, 咸興以北諸郡, 以堂上官以上宗親, 分賜爲鄕, 各置奴子一戶, 以固根本之地。 一, 平安道西隣大明, 而人皆入鎭, 本無土姓。 且近日勒令墾田, 人多憚行。 乞今親功臣, 及原從功臣二品以上, 分賜食邑。 如三公食邑, 平壤府一千戶; 正一品, 安州牧七百戶; 從一品, 成川府五百戶; 正二品, 嘉山郡三百戶; 從二品, 永柔縣一百戶, 實不食租稅, 但歲時通刺。 仍各置奴子一戶, 州中之事, 同心布置, 使內外相維, 體統相制。 至于子孫, 亦襲其號。

上納之後, 兩界監司, 皆不令率眷赴任。


  • 【태백산사고본】 14책 40권 9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외교-명(明)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