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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5월 9일 기묘 1번째기사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사정전에서 어제시 9장을 지어 발영시를 재차 시행하다

이때 강희맹(姜希孟)이 복제(服制) 때문에 발영시(拔英試)에 나가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럽게 여기니, 임금이 이를 듣고는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나가지 못한 문신(文臣) 1백여 인을 불러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또 어제시(御製詩) 9장(章)을 출제(出題)하여 이들을 시험하였다. 그 1장(章)은 이러했다.

"천지(天地)가 사절(四節)을 운행(運行)하고, 제왕(帝王)이 사의(四儀)262) 에 참여 하였다. 모두가 천지(天地)를 본받지 않은 것이 없는데, 정치하는 도리가 어찌 다르겠는가?"

그 2장(章)은 이러했다.

"상고(上古)에는 백성의 풍속이 순박하여, 임금은 나뭇가지 같고 백성은 들사슴과 같았다. 헌원씨(軒轅氏)263) 도 덕이 또한 성대(盛大)했는데, 어찌해서 처음으로 쟁탈(爭奪)했던가?"

그 3장(章)은 이러했다.

"당(唐)·우(虞)264) 는 읍양(揖讓)을 숭상하여, 손을 단정히 하고서 무위(無爲)265) 로 호칭(號稱)하였다. 삼묘(三苗)266) 와 흉노족(匈奴族)은 어찌해서 태평 성대(盛代)에 걱정을 끼쳤을까?"

그 4장(章)은 이러했다.

"삼왕(三王)267) 은 예의(禮義)가 갖추어졌으니, 인문(人文)268) 을 더할 수가 없었는데, 세상이 태평하고 사방이 감화(感化)되는 일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 5장(章)은 이러했다.

"진 시황(秦始皇)은 폭위(暴威)를 함부로 부렸으니 만세(萬世)에서 불인(不仁)의 군주로 일컬었다. 어찌해서 봉건 제도(封建制度)를 폐지하여 지금까지 아직도 서로 계승하는가?"

그 6장(章)은 이러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평성(平城)에서 곤욕(困辱)을 당하였고, 무제(武帝)막북(幕北) 지방을 소탕하였다. 필경에 성취(成就)한 바는 낫고 못함이 없는 것인가?"

그 7장(章)은 이러했다.

"광무제(光武帝)269) 는 중흥(中興)을 이루었으니, 공업(功業)이 옛날에도 없었던 바이다. 어찌해서 노호(老胡)270) 에게 깔보여 서로 경쟁하기를 기(期)했을까?"

그 8장(章)은 이러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무열(武烈)을 넓혔으며,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충후(忠厚)를 전하였다. 규모(規模)는 진실로 서로 다른데, 말류(末流)의 폐해는 같은가 다른가?"

그 9장(章)은 이러했다.

"왕도(王道)는 동일(同一)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느 것은 성공이고 어느 것은 실패인가? 어느 것은 버리고 어느 것은 취(取)하며, 어느 것은 징계하고 어느 것은 본받을 것인가?"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호조 판서 노사신(盧思愼)·형조 판서 홍응(洪應)·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파(李坡)·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서거정(徐居正) 등을 독권관(讀券官)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3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8책 22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어문학-문학(文學)

  • [註 262]
    사의(四儀) : 수행자의 생활에 있어서의 네 가지의 몸가짐. 곧 행(行)·주(住)·좌(坐)·와(臥).
  • [註 263]
    헌원씨(軒轅氏) : 황제(黃帝)를 이름.
  • [註 264]
    당(唐)·우(虞) : 요·순(堯舜).
  • [註 265]
    무위(無爲) : 아무 일도 하지 않음.
  • [註 266]
    삼묘(三苗) : 요·순(堯舜) 시대에 있던 남방의 오랑캐.
  • [註 267]
    삼왕(三王) : 중국 고대(古代)의 세 임금. 곧 하(夏)의 우왕(禹王)과 은(殷)의 탕왕(湯王)과 주(周)의 문왕(文王)·무왕(武王)을 이르는 말.
  • [註 268]
    인문(人文) : 인류 사회(人類社會)의 문화(文化).
  • [註 269]
    광무제(光武帝) : 후한(後漢)의 광무제.
  • [註 270]
    노호(老胡) : 중국 진(晉)나라 오호(五胡) 후조(後趙)의 군주(君主) 석늑(石勒)을 이름. 석늑이 그의 신하에게 "내가 만약 한(漢)나라 고조(高祖)를 만났더라면 마땅히 한신(韓信)·팽월(彭越)과 비견할 것이고, 만약 광무제(光武帝)를 만났더라면 중원(中原)에서 서로 경쟁하여 천하가 누구의 손에 들어올는지 알 수 없다."고 호언한 적이 있었음.

○己卯/時, 姜希孟以服制, 未得赴拔英試, 意甚悵恨。 上聞之, 更召未赴文臣, 凡百餘人。 御思政殿, 又出御製詩九章以試之。 其一章曰: "天地運四序, 帝王參四儀。 莫非法天地, 治道何異宜?" 其二章曰: "上古民俗醇, 標枝而野鹿。 軒轅德亦盛, 如何始爭奪?" 其三章曰: "尙揖讓, 端拱號無爲。 三苗匈奴, 如何累盛時?" 其四章曰: "三王禮義備, 人文無以加。 時雍與風動, 不逮問如何?" 其五章曰: "秦皇肆威暴, 萬世稱不仁。 如何廢封建, 至今猶相因?" 其六章曰: " 平城, 武帝幕北。 畢竟所成就, 得無優與劣?" 其七章曰: "光武致中興, 功業古所無。 如何爲老胡, 傲視期竝驅?" 其八章曰: "唐宗恢武烈, 宋祖傳忠厚。 規模固相殊, 末流弊同不?" 其九章曰: "王道無不同, 孰得而孰失? 何捨而何取, 何懲而何法?" 以河東君 鄭麟趾蓬原君 鄭昌孫高靈君 申叔舟、戶曹判書盧思愼、刑曹判書洪應漢城府右尹李坡、中樞府同知事徐居正等爲讀券官。


  • 【태백산사고본】 14책 3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8책 22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