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상호군 이순지의 졸기
행 상호군(行上護軍) 이순지(李純之)가 졸(卒)하니, 전교하기를,
"이순지(李純之)의 죽음이 전날밤에 있었는데, 예조(禮曹)에서 부음(訃音)을 고(告)함이 늦어, 오늘 아침에 풍악을 들어 조참을 받았으니, 그 연유를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이순지의 자(子)는 성보(誠甫)이며 양성(陽城)270) 사람이니, 처음에 동궁 행수(東宮行首)에 보직되었다가 정미년271)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세종(世宗)은 역상(曆象)이 정(精)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文臣)을 가려서 산법(算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순지(李純之)가 추구(推究)하므로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었다. 처음에 이순지가 추산(推算)하여 본국(本國)은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度) 강(强)이라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으로부터 온 자가 역서(曆書)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 강(强)입니다."
하므로, 세종이 크게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校正)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규표(圭表)·태평(太平)·현주(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命)을 받아 이룬 것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옮겼다가 정축년272) 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삼으니, 승직(陞職)을 사양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따로 경(卿)에게 맡길 일이 있으니, 외방에 나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고쳐서 제수하였다. 매양 진현(進見)273) 할 때마다 임금이 급히 일컫기를,
"부왕(父王)께서 중하게 여긴 신하(臣下)이다."
하고, 여러 번 상(賞)을 내려 주기를 더하더니, 을유년274) 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병(病)으로 졸(卒)하였다. 이순지의 성품은 정교(精巧)하며, 산학(算學)·천문(天文)·음양(陰陽)·풍수(風水)의 학(學)에 자상하였다. 그러나 크게 건명(建明)한 것은 없었다. 만년(晩年)에 그의 딸 김귀석(金龜石)의 아내는 사노(私奴) 사방지(舍方知)와 간통하고, 항상 여복(女服)을 입혀 여러 비녀(婢女) 속에 나란히 있게 하였다가 함께 동침(同寢)하여 대관(臺官)이 탄핵하게 되었으나, 임금이 추구하여 치죄하지 않고 드디어 사방지(舍方知)를 이순지에게 부쳤는데, 이순지는 잘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일을 송사하니, 사람이 모두 비루하게 여기었다. 정평(靖平)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드문 것을 정(靖)이라 하고, 집사(執事)에 절제가 있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아들이 6인이니, 이부(李扶)·이지(李持)·이공(李拱)·이파(李把)·이포(李抱)·이국(李挶)이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3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90면
- 【분류】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註 270]양성(陽城) : 지금의 안성(安城).
- [註 271]
정미년 : 1427 세종 9년.- [註 272]
○行上護軍李純之卒, 傳曰: "純之卒在前夜, 禮曹告訃晩, 今朝擧樂受朝, 其問諸禮曹以啓。" 純之字誠甫, 陽城人。 初補東宮行首, 丁未中文科。 時世宗慮曆象未精, 選文臣習算法, 純之推究, 世宗嘉之。 初純之推算本國北極, 出地三十八度强, 世宗疑之。 適自中朝來者獻曆書, 乃曰: "高麗北極出地, 三十八度强。" 世宗大悅, 遂命純之校正儀象, 卽今簡儀、圭表、大平、懸珠、仰釜與報漏、欽敬閣者, 皆純之稟命世宗以成者也。 累官至承旨, 遷中樞院副使, 丁丑爲開城府留守, 陞辭, 上曰: "別有任卿事, 不可出外。" 遂命改除。 每當進見, 上亟稱曰: "父王所重之臣。" 屢加賞賜。 乙酉判中樞院事, 至是以病卒。 純之性精巧, 詳於算學、天文、陰陽、風水之學。 然無大建明。 晩年, 其女金龜石之妻通私奴舍方知, 常被女服, 齒于諸婢中, 與同寢處, 爲臺官所劾, 上不究治之, 遂以舍方知付純之, 純之不能制, 反訟其事, 人皆鄙之。 謚靖平, 恭己鮮言 ‘靖’, 執事有制 ‘平’。 子六人, 扶、持、拱、把、抱、挶。
- 【태백산사고본】 13책 3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90면
- 【분류】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註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