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창 부원군 권남의 졸기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 권남(權擥)이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명하여 소선(素膳)071) 을 올리게 하고 3일 동안 조회(朝會)와 저자를 정지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거애(擧哀)하기를 청하니, 명하여 그 집에 가서 곡(哭)하게 하였다. 권남의 자(字)는 정경(正卿)이요, 찬성(贊成) 권제(權踶)의 아들이다. 스스로 호(號)를 소한당(所閑堂)이라 하였다. 도량이 너그럽고 크며 뇌락(磊落)072) 하여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침정(沈靜)하여 말이 적었다. 젊어서는 뜻을 두텁게 하여 힘써 배우더니, 큰 뜻이 있어 규규(規規)를 거자(擧子)의 업(業)으로 하지 않고, 글을 하며 당시의 안목에 들어감에 힘쓰지 아니하였다. 스스로 고세(高世)한 선비로 여겨, 나이 30세가 넘도록 일명(一命)073) 도 입지 못하니, 혹은 굽힐 것이라고 하였으나, 거들떠보지도 아니하니 세상의 의논이 더욱 자자하였으며, 모두 공보(公輔)074) 로서 바라보았다. 일찍이 한명회(韓明澮)와 망형교(忘形交)075) 를 하여,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라 자처하고, 가인(家人)의 산업(産業)을 일삼지 아니하며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남아(男兒)는 창[矛]을 드날리고 말을 달려서 변경 사이에서 공을 세우고 마땅히 만 권(卷)의 서적을 읽어서 불후(不朽)의 이름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처음에 권제가 첩(妾)에게 고혹하고 적처(嫡妻)를 소홀히 하므로 권남이 울면서 간(諫)하였더니, 권제가 때리려 하였으므로, 권남이 드디어 집을 작별하고 떠나 한명회와 명산(名山)을 두루 유람(遊覽)하며, 경치가 좋은 곳을 모두 찾아 보았다. 문종(文宗)께서 즉위(卽位)하여 친책(親策)076) 하여 취사(取士)할 즈음에 권남이 시사(時事)를 가리켜 진술한 것이 말이 매우 적절하므로, 제 4등으로써 의논하니, 문종(文宗)께서 이를 보시고, 뽑아서 상제(上第)077) 에 두었다. 임금078) 께서 정난(靖難)하는 데 이르러서는 한명회와 더불어 제일 앞장서서 찬양(贊襄)079) 하여, 정난 1등 공신(靖難一等功臣)에 참여하였다. 임금이 즉위하자 탁용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封)해졌으며, 좌익 1등 공신(佐翼一等功臣)의 호(號)를 더 내려 주었다. 권남이 일찍이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병(病)을 치료할 뜻이 있으니, 임금이 어찰(御扎)을 내려 말하기를,
"경(卿)이 나의 뜻과 서로 통하여 덕을 합하였으므로 논(論)할 것이 없다. 하늘이 실로 생역(生役)의 대임(大任)을 맡기었으니, 내가 경(卿)의 마음을 사랑함이 없고 경도 나의 마음을 사랑함이 없거나, 종사(宗社)의 공업(功業)으로써 말하더라도 경이 털끝만큼의 사사로움이 있었고 내가 털끝만큼의 욕심이 있었다면, 물불을 무릅쓰고 몸과 처자(妻子)를 잊고서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드디어 화란(禍亂)을 평정하였겠는가? 오늘날에 있어, 경은 진실로 공업(功業)의 주인(主人)이니, 나는 매양 경이 병이 있어 다른 이들과 같이 자주 만나지 못함이 회포가 되었는데, 이제 경의 임천(林泉)의 뜻을 보니, 놀라고 탄식함을 그치지 못하겠다. 경은 어찌 천임(天任)을 면하려 하는가?"
하고, 얼마 있다가 우찬성(右贊成)에 제수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어루만지며 군신(群臣)에게 이르기를,
"이는 나의 보배이다."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전하의 보배일 뿐만 아니라, 바로 국가의 보배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용상(龍床)에서 내려와 사례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하고, 곧 안마(鞍馬)를 내려 주고, 우의정(右議政)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만년(晩年)에 미쳐 병(病) 때문에 집에 나갔는데, 권남이 산업을 경영함에 자못 부지런하여, 일찍이 남산(南山)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제도(制度)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또 호사스러운 종[豪奴]이 방종하여 사족(士族)의 신분을 능가(凌駕)하니 참찬(參贊) 이승손(李承孫)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데에 이르렀어도 권남이 죄주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이런 것을 기롱하였다. 시호(諡號)를 익평(翼平)이라 하였으니,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을 익(翼)이라 하고, 능희 화란(禍亂)을 평정한 것을 평(平)이라 한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3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7책 67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註 071]소선(素膳) : 생선이나 육류(肉類)를 쓰지 않은 간소한 반찬.
- [註 072]
뇌락(磊落) : 마음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아니함.- [註 073]
일명(一命) : 가장 낮은 관직을 말함. 주대(周代)에는 관리를 임명하는 데에 일명(一命)에서부터 시작하여 구명(九命)에서 끝났으니, 일명으로는 제9품(品)이 되고, 구명으로는 제1품이 되었음.- [註 074]
공보(公輔) : 사보(四輔)과 삼공(三公). 즉 대관(大官).- [註 075]
망형교(忘形交) :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친밀한 사이.- [註 076]
친책(親策) : 과거의 전시(殿試) 때에 임금이 몸소 책문(策問)을 함.- [註 077]
○吉昌府院君 權擥卒。 訃聞, 命進素膳, 停朝市三日。 禮曹請擧哀, 命往哭於其家。 擥字正卿, 贊成踶之子。 自號所閑堂。 器宇寬偉, 磊落不群, 沈靜寡言。 少篤志力學, 有大志, 不規規爲擧子業, 爲文不務入時眼。 自以爲高世之士, 年踰三十, 不霑一命, 人或稱屈, 不以屑意, 物論愈藉藉, 皆以公輔望之。 嘗與韓明澮爲忘形交, 以蕭、曹、管、鮑自許, 不事家人産業, 相與言曰, ‘男兒不能奮矛躍馬, 樹功邊圉間, 要當讀萬卷書, 立不朽之名耳。’ 初踶惑於妾, 踈嫡妻, 擥泣諫, 踶欲杖之, 擥遂辭家, 與明澮遍遊名山, 窮搜奇勝。 文宗卽位, 親策取士, 擥指陳時事, 言甚剴切, 擬以第四, 文宗覽之, 擢置上第。 及上之靖難也, 與明澮首先贊襄, 與靖難一等功臣。 上卽位, 擢授吏曹參判, 封吉昌君, 加賜佐翼一等功臣號。 擥嘗有投閒養病之志, 上賜御札曰: "卿之於予, 非可以知心合德論也。 天實爲生役之大任, 予無愛卿之心, 卿無愛我之心, 以宗社功業言之, 則卿有絲毫有私, 予有絲毫有欲, 而冒突水火, 忘身妻子, 誓天及地, 遂定禍亂乎? 得有今日, 卿實功業主人, 予每以卿之有疾, 未得如他數面爲懷, 今見卿林泉之趣, 驚嗟不已。 卿何得解天任?" 使尋除右贊成。 上嘗御便殿, 撫世子, 謂群臣曰: "此吾之寶也。" 擥曰: "非殿下之寶, 乃國家之寶也。" 上, 下床謝曰: "卿言是。" 立賜鞍馬, 進拜右議政。 及晩年, 以病就第, 擥營産頗勤, 嘗治第南山下, 制度過侈, 又縱豪奴, 淩駕士族, 參贊李承孫至被罵辱, 擥不之罪, 人以此譏之。 謚翼平, 思慮深遠‘翼’, 克定禍亂‘平’。
- 【태백산사고본】 13책 3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7책 67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註 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