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추원사 안지의 졸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使) 안지(安止)가 졸(卒)하였다. 안지의 자(字)는 행(行)이고, 전라도(全羅道) 탐진(耽津) 사람이다. 문과(文科)에 제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고, 이조 참판(吏曹參判)·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겼다. 《고려사(高麗史)》 사건으로 고신(告身)을 수탈(收奪)당하였다가 경태(景泰) 6년429) 에 소환(召還)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봉조청(奉朝請)430) 으로 되었다. 남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졸(卒)하니, 시호(諡號)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는데, 글을 널리 많이 본 것은 문(文)이라하고, 온유(溫柔) 강직(剛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은 ‘정(靖)’이라 한다. 안지는 충후(忠厚)하고 문장을 읽어서 잘 짓고 해서(楷書)에 능하였는데, 무릇 시(詩)를 지을 때 이어(俚語)를 섞어서 붓을 잡으면 이루어졌고, 편간 척독(片簡尺牘)에 모두 시(詩)로써 뜻을 나타냈다. 마음가짐이 유연(悠然)하여 세정(世情)에 얽매이지 않았고, 집이 매우 가난하고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스스로 ‘고은(皐隱)’이라 불렀다. 임금이 즉위하여 불러서 벼슬을 주었는데, 그때 안지의 나이가 80세였으나, 기력(氣力)이 강건(强健)하니, 임금이 기뻐서 시(詩)를 지어서 내려 주었다. 안지가 평생 남의 선(善)한 것을 칭찬하고, 오로지 이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안지는 본래 아들이 없었는데, 80세 이후에 첩(妾)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어서 시부(詩賦)의 절구(絶句)에다 절사(絶嗣)를 잇게 할 뜻을 보이었으므로, 안지가 졸(卒)하자 제주관(題主官)431) 유문통(柳文通)이 장차 봉사자(奉祀子)로 쓰려 하니, 적출(嫡出)의 사위 황맹수(黃孟粹)가 그 아이는 장인[婦翁]의 소출(所出)이 아니라고 하여 가로막았다. 안지의 시(詩)를 외우는 자가 있어서 황맹수의 말이 막히니, 유문통이 마침내 이를 썼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3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44면
- 【분류】인물(人物)
- [註 429]경태(景泰) 6년 : 1455 세조 원년.
- [註 430]
봉조청(奉朝請) : 문무(文武) 당상관(堂上官)이 나이가 많아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 그 벼슬을 특별히 그대로 띠고 물러나게 하던 것. 또는 그 칭호.- [註 431]
제주관(題主官) : 신주(神主)에 글을 쓰는 관리.○乙酉/領中樞院使安止卒。 止, 字子行, 全羅道 耽津人。 中文科第二名, 調成均博士, 中重試, 歷集賢殿副提學, 轉吏曹參判、工曹判書。 以史事收告身, 景泰六年召拜知中樞院事, 累陞領中樞院事、奉朝請, 南歸遂卒。 諡曰文靖, 博文多見 ‘文’, 柔直考終‘靖’。 止忠厚善屬文楷書, 凡作詩, 雜以俚語, 援筆立就, 片簡尺牘, 率以詩導意, 胸次悠然, 不拘世情。 家甚貧, 蕭然不蔽風雨, 自號皐隱。 上卽位, 召而爵之, 時止年八十, 氣力强健, 上嘉悅作詩賜之。 止平生譽人之善, 唯恐不及。 止素無子, 八十後於妾得一男, 賦絶句以示繼絶之意, 及止卒, 題主官柳文通將書奉祀子, 嫡女壻黃孟粹, 以兒非婦翁所出沮之。 有誦止詩者, 孟粹語塞, 文通竟書之。
- 【태백산사고본】 12책 3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44면
- 【분류】인물(人物)
- [註 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