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신·박원형 등과 아산군의 설치·과거에 관한 일 등에 대해 논의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政事)를 보니,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심회(沈澮)·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호조 판서(戶曹判書) 김국광(金國光)·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 행 상호군(行上護軍) 이윤손(李允孫)·임원준(任元濬),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길통(金吉通)·공조 참판(工曹參判) 강희맹(姜希孟)과 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이어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재상(宰相)들로 하여금 교대로 일어나서 상수(上壽)를 드리게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이 아산군(牙山郡)을 다시 설치할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정부(議政府)의 의논은 무어라고 하던가?"
하였다. 노사신이 대답하기를,
"흑자는 말하기를, ‘이미 혁파(革罷)하였으니, 다시 설치할 수 없다.’고 하고, 흑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본군(本郡)을 찾아가서 물어보고 만약 다시 설치하고자 한다면 다시 설치하자.’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로 정부(政府)에 내려 주어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아산(牙山)을 혁파(革罷)하여 온양(溫陽)·평택(平澤)·신창(新昌)에 나누어 붙였는데, 황수신(黃守身)이 충청도 진휼사(忠淸道賑恤使)로서 돌아와서,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 황효원(黃孝源)의 현명하고 유능[賢能]함을 지극히 칭찬하고, 이어서 아산(牙山)의 공해(公廨)259) 의 기지(基地) 북쪽에다 자기 처(妻)의 무덤을 이장(移葬)하겠다고 청(請)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항소(抗疏)하여 정쟁(庭諍)260) 하고, 고을 사람들이 상언(上言)하여 진소(陳訴)하였었다. 그때 내섬 판사(內贍判事) 김숙(金潚)이 사민 경차관(徙民敬差官)으로서 먼저 충청도에 갔는데, 임금이 명하여 그 일을 김숙에게 맡겨서 현지에 가서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다. 김숙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본 고을은 왜선(倭船)이 왕래하는 관문(關門)이고 조세(租稅)를 수납(輸納)하는 요지(要地)이니, 수령(守令)을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해(公廨)의 기지(基地)가 큰 냇물에 부딪혀 무너지고 관우(館宇)가 황폐하여 허물어졌다는 것은 모두 뜬 소문이다.’고 하니, 다시 설치하는 것이 편(便)하겠습니다."
하였었으나, 박원형(朴元亨)·함우치(咸禹治)는 모두 말하기를,
"혁파(革罷)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었다. 이 때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의 호소로 인하여 이것을 의논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또 정창손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 이미 불혹(不惑)261) 의 나이가 지났지만 심기(心氣)가 더욱 강장(强壯)하고 조금도 쇠퇴하여지지 않으니,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는 것은 힘이 부족(不足)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연(經筵)은 옛날 성현(聖賢)들이 행한 일이 아니니, 요(堯) 임금·순(舜) 임금도 경연을 베풀지 않았으며, 주공(周公)도 진실로 사부(師傅)가 없었는데, 송조(宋朝)의 인주(人主)들이 구구(區區)하게 처음으로 만들어낸 일을 어찌 족히 본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를 불러서 말하기를,
"근래 과거(科擧)의 법(法)은 일정한 법식이 있기 때문에 과거를 보는 자들이 정문(程文)에 얽매여서 박학(博學)하고 폭넓은 식견을 가진 선비를 보기가 어렵다. 혹시 경서(經書)를 강(講)하거나 혹시 사서(史書)를 강할 때 무경(武經)을 겸(兼)하게 하고, 혹시 제술(製述)을 쓸 때 임시하여 사람을 작정(酌定)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 서(書)에만 전심(專心)하지 못할 것이고, 한 가지 기예(伎藝)에만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요행(僥倖)을 바라는 자들도 사라질 것이다. 명년 봄부터 이와 같이 시험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면 아래에서 반드시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는데, 내가 근래 병사(兵士)를 정(精)하게 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에 무재(武才)의 성함이 근대(近代)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이나, 그러나 진유(眞儒)는 보기가 드물다. 대저 지금 유자(儒者)가 된 사람으로서 오로지 학문(學問)에 뜻을 두지 아니하여서 《효경(孝經)》에 통(通)한 자는 이미 구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학식이 매우 높고 식견이 두루 넓은 선비를 구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문(文)에 뜻을 기울이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인재(人才)가 이처럼 저질스러운 하류이다. 요컨대 문풍(文風)을 진작(振作)시킬 방도를 너희들이 명심(銘心)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이파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세자(世子)로 하여금 《집주(集註)》262) 를 읽지 말게 하라. 《집주(集註)》란 문의(文義)를 밝게 보이는 것뿐이다. 《논어(論語)》에 ‘정사를 공경히 하고 신의를 지키며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며, 백성들을 때에 맞추어 부려야 한다. [敬事而信 節用而愛民 使民以時]’고 하였는데, 이항(李沆)263) 의 《촬설(撮說)》에는 ‘정사를 공경히 하고 신의를 지킨다. [敬事而信]’는 것을 마음에 따른 실상이라고 하였다. 잠저(潛邸) 때의 공부(工夫)는 책을 끝마치는 것이다."
하고, 이것을 가지고 글제로 삼아서 입시(入侍)한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글을 지어서 바치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시제(詩題)에 등급을 매겼는데, 임원준의 시(詩)를 보니 이러하였다.
"병부(兵符) 잡고 도록(圖籙)264) 에 응하여 정치가 융성해지니
원량(元良)에게 성학(聖學)의 공부를 훈계하여 보이시네.
의리(義理)는 즐겨 문자(文字) 위에서 찾고
공부(功夫)는 다만 존심(存心)을 기르는 데 있도다.
믿음은 하늘에도 통하고 아울러 땅에도 통하며
공경(恭敬)은 모름지기 처음도 이루고 마지막도 이루리라.
이 두 글자야말로 천하(天下)의 치도(治道)에 이르리니,
하물며 지금 베푸신 말씀 다시 밝디 밝음에랴!"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크게 칭찬과 감탄을 더하면서 말하기를,
"임원준의 재주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 이런 시를 많이 얻기란 쉽지 않다."
하고, 여러 재상(宰相)에게 두루 보이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3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621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행정(行政)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풍속-예속(禮俗) / 교통-육운(陸運) / 어문학-문학(文學)
- [註 259]공해(公廨) : 관청.
- [註 260]
정쟁(庭諍) : 임금의 면전에서 간하여 다투는 것.- [註 261]
불혹(不惑) : 마흔살.- [註 262]
《집주(集註)》 : 여러 사람이나 서책의 주석을 한데 모은 책.- [註 263]
이항(李沆) : 송(宋)나라 비향(肥鄕) 사람. 자는 태초(太初). 벼슬이 평장 정사(平章政事)에 이르렀는데, 당시 성상(聖相)이라고 일컬었음.- [註 264]
도록(圖籙) : 도참(圖讖).○甲辰/御思政殿, 受常參、視事。 召蓬原府院君 鄭昌孫、領中樞院事沈澮、靑城尉 沈安義、左參贊崔恒、戶曹判書金國光、同知中樞院事梁誠之、行上護軍李允孫ㆍ任元濬、禮曹參判金吉通、工曹參判姜希孟及承旨等入侍。 仍設酌, 令諸宰迭起爲壽。 都承旨盧思愼啓牙山郡復立事, 上曰: "議政府之議, 云何?" 思愼對曰: "或言, ‘已革不可復立。’ 或言, ‘宜訪問本郡, 若欲復立, 則復之。’" 上曰: "還下政府, 更議施行。" 初, 革牙山, 分屬溫陽、平澤、新昌, 黃守身以忠淸道賑恤使還, 盛稱本道觀察使黃孝源賢能, 仍請於牙山公廨基北, 移葬其妻, 上聽之。 司憲府抗疏庭諍, 邑人上言陳訴。 時內贍判事金潚以徙民敬差官先往忠淸, 命下其事於潚, 就令覆審。 肅刷還言: "本邑, 倭舶往來之門、租稅輸納之會, 不可無守。 且諸言, ‘公廨之地, 大川衝破, 館宇廢毁者, 皆虛言。’ 復立便。" 朴元亨、咸禹治皆言可革。 至是, 復因邑人之訴議之。 上又召昌孫曰: "予已年踰不惑, 心氣愈壯, 無小衰憊, 日御經筵, 非力不足也。 然經筵非古聖賢所爲, 堯、舜不經筵, 周公固無師, 宋朝人主區區草創之事, 何足法也?" 又召右承旨李坡曰: "近來科擧之法有恒式, 故擧業者拘於程文, 鮮見博學宏材之士。 或講經書或講史, 兼以武經, 或用製述, 皆臨時酌定, 則人皆不專於一書, 不拘於一藝, 僥倖者息矣。 其自明春, 如此試之。" 上又曰: "古人云,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予近勵精兵事, 故武才之盛, 近代無比, 而眞儒則罕見。 大抵, 今之爲儒者, 專不致志於學問, 通《孝經》者已難得, 況碩大宏博之士乎? 予非不致意於文, 而人才汚下如此。 要振文風, 爾其刻心焉。" 仍命坡書云: "勿令世子讀《集註》, 《集註》曉文義而已。 ‘敬事而信, 節用而愛民, 使民以時。’ 李沆 《撮說》, ‘敬事而信, 從心之實。’ 潛邸功夫書畢。" 以此爲題, 令入侍文臣製進。 上親自品題, 得元濬詩曰: "握符應籙治升隆, 示訓元良聖學功。 義理肯尋文字上? 功夫秪在養存中。 信可徹天幷徹地, 敬須成始又成終。 二字可臻天下治, 況今宣語更昭融?" 上覽之, 大加稱賞曰: "元濬才調過人。 未易多得", 令徧示諸宰。
- 【태백산사고본】 12책 3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621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행정(行政)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풍속-예속(禮俗) / 교통-육운(陸運) / 어문학-문학(文學)
- [註 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