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이인손의 졸기
우의정(右議政)으로 잉령 치사(仍令致仕)227) 한 이인손(李仁孫)이 졸하였다. 자(字)는 중윤(仲胤)이니, 광주(廣州) 사람 이집(李集)의 손자로서, 총명하고 지혜롭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영락(永樂)신묘년228) 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정유년229)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보임(補任)되었다. 선덕(宣德)갑인년230) 에 사헌 감찰(司憲監察)에 제수되고, 누차 벼슬하여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세조(世祖)가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게 되자, 뽑혀서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고, 을해년231) 에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니,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겸 판호조(兼判戶曹)에 승했다가 의정부(議政府)의 우찬성(右贊成)과 우의정(右議政)으로 옮겼는데, 얼마 아니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病)으로 졸(卒)하니, 나이가 6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이미 물건을 내려 주어서 예대로 부의(賻儀)하였는데, 또 특별히 쌀·콩 아울러 30석(石)·종이 1백 권(卷)을 하사(下賜)하였다. 충희(忠僖)라고 시호(諡號)하였으니, 청렴(淸廉)하고 방정(方正)하여 공정(公正)한 것을 충(忠)이라고 하고, 소심(小心)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을 희(僖)라고 한다. 성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강하고 과감하여 관가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한결같이 경계하고 삼갔으며, 담백(淡泊)한 것을 좋아하고 성색(聲色)과 분잡(紛雜)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가할 때 전고(典故)를 익히고 일에 임하면 결단력이 있었다. 아들이 다섯 있으니 이극배(李克培)·이극감(李克堪)·이극증(李克增)·이극돈(李克墩)·이극균(李克均)인데, 모두 과거에 올랐다. 해마다 그 부인(夫人)에게 쌀 20석(石)을 내려 주었다. 이극배·이극감은 또한 공신(功臣)으로 봉군(封君)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7책 582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註 227]잉령 치사(仍令致仕) : 국가의 원로 대신(元老大臣)으로서 70살이 넘은 종2품 이상의 대신이 벼슬에서 물러날 때 현직 벼슬을 그대로 띠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던 것.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조회에도 참여하였고, 또 녹봉(祿俸)도 그대로 지급하여 대우하였음.
- [註 228]
신묘년 : 1411 태종 11년.- [註 229]
○庚午/右議政仍令致仕李仁孫卒。 字仲胤, 廣州人, 集孫。 聰慧好學, 永樂辛卯中成均試, 丁酉中文科, 選補藝文檢閱。 宣德甲寅拜司憲監察, 累官至刑曹參判。 及世祖輔政, 擢爲戶曹判書, 乙亥, 世祖卽位, 陞判中樞院事、兼判戶曹, 轉議政府右贊成、右議政, 未幾致仕。 至是, 以病卒, 年六十九。 訃聞輟朝三日, 旣賜例賻, 又賜米豆幷三十石、紙一百卷。 諡忠僖, 廉方公正 ‘忠’, 小心畏忌 ‘僖’。 性沈毅强果, 處官居家, 一以戒愼, 好淡泊, 不喜聲色、紛華, 閑練典故, 臨事有斷。 有五子, 曰克培、克堪、克增、克墩、克均, 皆登第。 歲賜夫人米二十石, 克培、克堪又以功臣封君。
- 【태백산사고본】 11책 3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7책 582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註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