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을 훔친 자를 잡아 국문토록 하다. 양성지가 서책을 상고하여 교정하고 올린 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니, 내종친(內宗親)과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영의정 신숙주(申叔舟)·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심결(沈決)·공조 판서 김질(金礩)·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김개(金漑)·이조 판서 어효첨(魚孝瞻)·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병조 판서 윤자운(尹子雲)·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행 호군(行護軍) 홍익생(洪益生)·예조 참판(禮曹參判) 김길통(金吉通)·한성부 윤(漢城府尹) 이서(李墅)와 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부장(部將) 문석한(文碩漢)이 총통(銃筒)을 훔친 자를 잡아서 아뢰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계손(李繼孫)에게 명하여 형조(刑曹)에 가서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는 일찍이 흰 기러기[白雁]를 바쳤으니, 이제는 흰 꿩[白雉]을 바쳐야 마땅한데, 누가 갖다가 바칠 만한 자인가?"
하니, 신숙주(申叔舟)가 강례관(講隷官) 노삼(魯參)을 천거하므로, 명하여 보내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학(諸學)은 정(精)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의학(醫學)·산학(算學)·잡학(雜學)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신숙주가 아뢰기를,
"지금의 잡학자(雜學者)는 모두 그 업(業)을 정(精)하게 하는 데 힘쓰지 아니하고, 단지 수직(受職)하는 데만 힘써서 겨우 시재(試才)를 갖출 뿐이니, 심히 불가합니다. 제학(諸學)의 무리가 비록 모두 그 업(業)을 통할 수는 없더라도 그 가운데 2, 3인이 능통(能通)하면 또한 족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양성지(梁誠之)에게 말하기를,
"서책(書冊)을 상고하고 교정(校正)하는 일은 어찌 되었느냐?"
하니, 양성지가 말하기를,
"이미 마쳤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서적(書籍)이 산란(散亂)하여 이제 비록 정제(整齊)하였더라도 이를 간직하여서 고열(考閱)에 갖추게 하라."
하였다. 양성지가 드디어 글[書]을 올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그윽이 역대(歷代)의 서적을 보건대, 혹 명산(名山)에 간직하고 혹 비각(秘閣)에 간직한 것은 유실(遺失)을 대비하여 영구히 전하는 소이(所以)입니다. 전조(前朝)158) 의 숙종(肅宗)이 비로소 경적(經籍)을 간직하고, 그 도서(圖書)의 글[文]을 하나는, ‘고려국(高麗國) 14엽(葉) 신사세(辛巳歲)의 어장서(御藏書) 송나라[大宋] 건중 정국(建中靖國) 원년(元年)·대요 건통(大遼乾統) 9년이라.’ 하고, 하나는 ‘고려국 어장서(高麗國御藏書)라.’ 하였습니다. 숙종조(肅宗朝)로부터 이제까지 6백 63년인데도 인문(印文)이 어제 한 것과 같이 문헌(文獻)을 상고할 만하고, 이제 내장(內藏)된 만권(萬卷)의 서책은 그 때에 소장(所藏)하여 전하는 것이 많습니다. 빌건대, 지금의 장서(藏書) 뒷면의 도서(圖書)는 ‘조선국 제6대 계미세 어장서(朝鮮國第六代癸未歲御藏書) 본조(本朝) 9년·대명 천순(大明天順) 7년이라.’ 일컫고, 진자(眞字)159) 를 가지고 이를 쓰며, 앞면의 도서(圖書)는 ‘조선국 어장서(朝鮮國御藏書)’라 일컫게 하고, 전자(篆字)160) 를 가지고 이를 써서 제책(諸冊)에 두루 나타내어,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며, 혹 신라(新羅)와 전조(前朝) 성시(盛時)의 예(例)에 의하여 따로 연호(年號)를 세워서 표지(標識)를 삼게 하소서.
신(臣)은 또 그윽이 보건대, 군상(君上)의 어필(御筆)은 운한(雲漢)161) 으로 더불어 그 소회(昭回)함이 같으며, 규벽(奎璧)162) 으로 더불어 그 찬란(粲爛)함이 같으니, 만세(萬世)의 신자(臣子)들이 마땅히 준각(尊閣)할 바이고 보장(寶藏)해야 하는 것입니다. 송조(宋朝) 성제(聖製)의 예(例)는 모두 건각(建閣)하고 간직하게 하되, 관(官)을 설치하여 이를 관장하였으니, 태종(太宗)은 ‘용도각(龍圖閣)이라.’ 하고, 진종(眞宗)은 ‘천장각(天章閣)이라’ 하고, 인종(仁宗)은 ‘보문각(寶文閣)이라’ 하고, 신종(神宗)은 ‘현모각(顯謨閣)이라’ 하고, 철종(哲宗)은 ‘휘유각(徽猷閣)이라’ 하고, 고종(高宗)은 ‘환장각(煥章閣)이라’ 하고, 효종(孝宗)은 ‘화문각(華文閣)이라’ 하여, 모두 학사(學士)·대제(待制)·직각(直閣) 등의 관직[官]을 두었으니, 바라건대, 이제 신 등이 어제 시문(御製詩文)을 마감하여 올리니, 인지당(麟趾堂)의 동쪽 별실(別室)에 봉안(奉安)하여 규장각(奎章閣)이라 이름하고, 또 제서 소장(諸書所藏)의 내각(內閣)을 비서각(秘書閣)이라 이름하여, 모두 대제학(大提學)·제학(提學)·직각(直閣)·응교(應敎) 등의 관직[官]을 두어, 당상(堂上)은 다른 관직을 겸대(兼帶)하게 하고, 낭청(郞廳)은 예문 녹관(藝文祿官)을 겸차(兼差)하여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본국 지도(本國地圖)를 내다 신숙주(申叔舟)와 양성지(梁誠之)에게 보이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수찬(修撰)하게 하며, 이어서 양성지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니, 신숙주가 아뢰기를,
"양성지는 젊어서부터 지리(地理)를 강기(强記)하였고, 그가 집현전(集賢殿)에 있으면서 임무를 마칠 때를 당하면, 그 옛적에 생각하였던 한자[一字]를 손바닥 위에 쓰고, 집에 이르면 제서(諸書)를 다 상고하여 보았으니, 옛적에도 이르기를, ‘한 사람에게 갖춘 것을 구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만약 군신(群臣)으로 하여금 각기 장점을 바치게 한다면 국가의 서사(庶事)를 어찌 구제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재추(宰樞)는 모두 내 말을 들으라. 양성지의 일은 진실로 옳다. 무릇 사람이 학문(學文)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내 또한 일찍이 한자[一字]를 써서 유추(類推)하여 행한 것이 자못 많았으니, 양성지가 손바닥에 써 가지고 깊이 생각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자를 불러 어탑(御榻)에 오르게 하고, 세자(世子)에게 이르기를,
"마음의 처음 발(發)하는 것이 가장 간절한 곳이 된다. 동방으로 터 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방으로 터 놓으면 서쪽으로 흐르니, 그 공부를 삼가지 않을 수 없으며, 진실로 네 몸에 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0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재판(裁判) / 재정-진상(進上) / 교육-기술교육(技術敎育) / 역사(歷史) / 과학(科學) / 출판-서책(書冊)
- [註 158]전조(前朝) : 고려조.
- [註 159]
진자(眞字) : 한자 서체(書體)의 하나.- [註 160]
○戊午/御思政殿, 受常參、視事。 內宗親及蓬原府院君 鄭昌孫、領議政申叔舟、判中樞院事沈決、工曹判書金礩、行僉知中樞院事金漑、吏曹判書魚孝瞻、開城君 崔濡、兵曹判書尹子雲、行僉知中樞院事梁誠之、行護軍洪益生、禮曹參判金吉通、漢城府尹李墅及承旨等入侍。 設酌, 部將文碩漢捕得竊銃筒者以啓, 命同副承旨李繼孫往刑曹鞫之。 上曰: "世宗朝嘗獻白雁, 今當獻白雉, 誰可齎進者?" 叔舟薦(講隷官)〔講肄官〕 魯參, 命遣之。 上曰: "諸學不可不精, 雖至醫、算雜學, 皆不可不精。" 叔舟啓: "今之雜學者, 皆不務精其業, 但務受職, 僅備試才而已, 甚爲不可。 諸學之輩, 雖未能皆通其業, 其中二三人能通, 則亦足矣。" 上曰: "然。" 上問誠之曰: "書冊考校幾何?" 誠之曰: "已畢。" 上曰: "在世宗朝書籍散亂, 今雖整齊, 藏之以備考閱。" 誠之遂進書, 其書曰:
竊觀歷代書籍, 或藏於名山, 或藏於秘閣, 所以備遺失而傳永久也。 前朝肅宗始藏經籍, 其圖書之文, 一曰, "高麗國十四葉辛巳歲御藏書大宋 建中靖國元年、大遼 乾統九年。" 一曰, "高麗國御藏書。" 自肅宗朝至今六百六十三年印文如昨, 文獻可考, 今內藏萬卷書, 多其時所藏而傳之者。 乞今藏書後面圖書稱 "朝鮮國第六代癸未歲御藏書本朝九年、大明 天順七年" 以眞字書之, 前面圖書稱 "朝鮮國御藏書", 以篆字書之, 遍着著諸冊, 昭示萬世, 或依新羅及前朝盛時例, 別建年號, 以爲標識。 臣又竊觀君上御筆與雲漢同其昭回, 與奎壁同其粲爛, 萬世臣子所當尊閣而寶藏者也。 宋朝聖製例皆建閣而藏之, 設官以掌之, 太宗曰龍圖閣, 眞宗曰天章閣, 仁宗曰寶文閣, 神宗曰顯謨閣, 哲宗曰徽猷閣, 高宗曰煥章閣, 孝宗曰華文閣, 皆置學士、待制、直閣等官, 乞今臣等勘進御製詩文, 奉安于麟趾堂東別室, 名曰奎章閣, 又諸書所藏內閣名曰秘書閣, 皆置大提學、提學、直閣、應敎等官, 堂上以他官帶之, 郞廳以藝文祿官兼差, 俾掌出納。
上命出本國地圖, 示叔舟及誠之, 令於議政府修撰, 仍命誠之進酒。 叔舟啓: "誠之自少强記地理, 其在集賢殿當仕罷時, 書其舊所思一字於掌上, 到家盡考諸書以觀之, 古云‘無求備于一人。’ 若使群臣各進所長, 則國家庶事, 焉有不濟?" 上曰: "諸宰樞皆聽予言。 誠之之事良是。 凡人於學, 不爲則已, 爲則必須如是。 予亦嘗書一字而推類行之者頗多, 誠之書掌刻, 慮非偶然也。" 上召王世子陞御榻, 謂世子曰: "心之初發最爲切處, 決諸東方則東流, 決諸西方則西流, 不可不謹, 其功夫實在爾躬。"
- 【태백산사고본】 11책 30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재판(裁判) / 재정-진상(進上) / 교육-기술교육(技術敎育) / 역사(歷史) / 과학(科學) / 출판-서책(書冊)
- [註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