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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29권, 세조 8년 9월 20일 신해 2번째기사 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도체찰사 한명회가 올린 영북진을 설치하는 데 대한 상서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종사관(從事官) 김수녕(金壽寧)을 보내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삼가 성상(聖上)의 유시를 받고 겸하여 여러 논의를 살펴,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서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진술합니다. 신이 그윽이 살펴보건대, 함길도 5진(五鎭)은 그 형세가 반드시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해야 안팎으로 울타리가 되어 영구히 튼튼할 수가 있을 것이니, 5진을 버려두는 것이 불가하다면 즉 영북진은 결코 설치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삼가 지세(地勢)를 가지고 이를 살펴 보건대, 부령(富寧)·경성(鏡城)·길주(吉州)는 이와 같고 허수라(虛水剌)는 입술과 같은데, 그 입술이 없으면서 이가 시리지 않기를 구(求)한다면,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허수라의 땅은 신이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근래 저 오랑캐들이 와서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이 길을 경유한 뒤에야 감히 들어올 수 있으니, 진실로 그 목구멍을 막는다면 부령 이남의 방수(防守)는 단정코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세종 대왕께서 처음 5진을 설치할 적에 조정의 의논이 모두 어렵다고 하였으나, 세종께서 마침내 이를 실행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5진의 번성함은 다른 진(鎭)의 갑절이 되고, 병졸이 정강(精强)하여 오랑캐가 감히 가볍게 침범하지 못합니다. 대저 세종 대왕의 뜻은, 이미 여러 진을 세웠는데 또 좇아서 영북(寧北)에까지 미친다면 큰 역사(役事)의 뒤에 공력(功力)이 쉽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대로 두고 이루지 못한 것이며, 감히 하지 못한 것이 아니요, 형세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5진을 설치할 적에는 규모를 모두 새로 창설하여 의지할 만한 형세가 없었으나 지금 영북(寧北)부령(富寧)이 근본이 되고 회수(懷綏)가 보조가 되고 있으니, 진(鎭)을 설치하고 참(站)을 설치하는 일은 모두 5진(五鎭)과 같이 어렵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하물며 5진은 벌려 설치한 것도 가능(可能)하였는데, 여기는 홀로 1진(鎭)뿐이니 어찌 또 심히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남쪽의 백성을 옮기는 것은 형세가 필시 원망과 한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신도 또한 이를 염려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지금 5진에 있는 자도 또한 남쪽의 백성이 반을 차지하는데, 생생(生生)411) 하여 영구히 건설하는 이(利)가 있으니, 이는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신은 원컨대 금년에 몇 호(戶)를 옮기고 다음해에 몇 호(戶)를 옮기고, 또 다음해에 몇 호(戶)를 옮기어, 점차로 들어오게 하여 3년 후에 형세를 보아서 설치한다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성상의 유시(諭示)에 이르기를, ‘이미 채우고 설치한다면 어찌 어렵겠느냐?’고 하신 것은, 바로 신의 뜻입니다. 혹자의 말과 같이 오을족(吾乙足)·쌍청(雙靑) 이북과 두리산(豆里山) 이남에 지세를 살펴서 보(堡)를 설치하는 것과, 또 무산보(茂山堡)를 양양만동(梁陽萬洞)의 원천으로 옮기는 것과, 또 황절보(黃節堡)허수라동(虛水剌洞)의 원천으로 옮기는 것의 이 3가지 계책을 살펴보니 과연 명확한 의논이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외롭고 먼 땅에 이 3보(堡)를 설치하면 그윽이 생각하건대, 적(敵)에게 도둑질할 자료를 만들어 더욱 폐단을 이루게 할까 두렵습니다. 신의 계책으로는 경성(鏡城)어유간(魚游澗)·주아온(朱兒溫)길주(吉州)사하북(斜下北)·사말을동(斜末乙洞)과 같은 서북(西北)의 여러 보(堡)는 군사가 적고 응원하는 곳이 멀어서 다만 적을 이롭게 할 뿐이며, 스스로 지키는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 또 3보를 외롭고 먼 땅에 설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1진을 요충지(要衝地)에 설치하는 것이 낫습니다. 진실로 한 번 영북진을 설치한다면 안쪽에 있는 여러 보(堡)는 철폐할 수가 있으니, 여러 보를 철폐하고 영북진에만 주력(注力)한다면 영북진은 당당한 하나의 진(鎭)이 될 것이니, 저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엿보겠습니까? 이는 만세(萬世)를 위하는 장구한 생각이므로 신이 반복하여 여러 번 진술하는 까닭입니다. 만약 영북진을 설치하지 못한다면 단지 예전대로 엄하게 지키는 것만이 마땅하고, 다시 다른 보를 설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밝게 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손수 비답(批答)하기를,

"바로 나의 계책과 합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50면
  •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註 411]
    생생(生生) : 힘차게 활동하는 것.

○都體察使韓明澮遣從事官金壽寧上書曰:

臣敬承聖諭, 兼審諸論, 晝思夜度, 敢陳愚慮。 臣竊見咸吉五鎭, 其勢必須設寧北鎭內藩外籬, 可以永固, 五鎭不可棄, 則寧北決不可置也較然矣。 謹以地勢明之, 富寧如齒, 虛水剌如唇, 缺其唇而求齒之不寒, 不可得也。 虛水剌之地, 臣不目擊, 比來彼虜之內寇者, 皆由是路而後敢入, 誠扼其喉, 富寧以南之防守, 斷可除矣。 臣惟世宗大王初置五鎭, 廷議皆以爲難, 世宗竟行之, 至今五鎭之盛, 倍於他鎭, 兵卒精强, 胡馬不敢輕犯。 蓋世宗之意旣建諸鎭, 又從而及於寧北, 則大役之後, 功力不易, 因循未就, 非不敢也, 勢不可也。 且五鎭之設也, 規模皆所創新, 無有可因之勢, 今寧北富寧爲之本, 有懷綏爲之輔, 設鎭設站, 皆非若五鎭之難也。 況五鎭猶能列置, 則此獨一鎭耳, 豈復有甚難者哉? 南民之搬移者, 勢必怨咨, 臣亦慮此久矣。 惟念今之在五鎭者, 亦是南民居半, 生生有永建之利, 此乃已然之驗也。 臣願今年移幾戶, 明年移幾戶, 又明年移幾戶, 以漸而入, 三年之(外)〔後〕 觀勢而置之, 斯無難矣。 聖諭所謂 "旣實而置之何難?" 此正臣之之意也。 如或者之言吾乙足雙靑以北、豆里山以南, 審地置堡, 又移茂山堡梁陽萬洞源, 又移黃節堡虛水剌洞源, 審此三策, 果確論矣。 臣愚以爲據孤遠之地, 設此三堡, 竊恐秪資敵益致弊也。 臣計如鏡城魚游澗朱兒溫斜下斜未乙洞西北諸堡軍少援遠, 特爲賊耳, 非自守之良計也。 且與設三堡於孤遠之地, 寧置一鎭於要衝。 誠一置寧北鎭, 則內面諸堡可撤, 撤諸堡而益寧北, 則寧北爲一堂堂之鎭, 彼烏敢窺我哉? 此萬世長慮, 臣之所以反覆縷陳者也。 若寧北未設, 只宜仍舊嚴守, 不必更置他堡, 伏惟睿鑑。

上手批云 "正合予策。"


  •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50면
  •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