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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29권, 세조 8년 8월 20일 임오 2번째기사 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사은사 김계희·강희안이 통사 장유성을 보내 올린 야인 정황에 대한 견문 사목

사은사(謝恩使) 김계희(金係熙)·강희안(姜希顔)이 통사(通事) 장유성(張有誠)을 먼저 보내어 견문 사목(見聞事目)을 아뢰기를,

"1. 5월 29일에 돌아오다가 영원위(寧遠衛)에 이르니 지휘(指揮) 성광(盛光)이 이르기를, ‘달적(達賊)건주위(建州衛)·모련위(毛憐衛)야인(野人)과 연결하여 지금 사하(沙河) 북쪽의 장장(長墻) 밖 20리 땅에 있는데, 너희 나라에서 지난번에 야인(野人)을 몇이나 죽였느냐?’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모른다.’고 하니 성광이 말하기를, ‘야인들은 너희 나라의 원수이니, 〈중국〉 조정과 너희 나라가 군사를 합해서 이를 공격한다면 남김없이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1. 7월 29일에 조가장역(曹家莊驛)에서 유숙하다가 광녕(廣寧) 차인(差人)이 달자(達子)에게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중국 여자 4인과 우리 나라에서 풀어 보낸 양이부(楊里夫)·김장명(金長命) 등을 안동하고 북경(北京)에 나아가는 것을 만났는데, 양이부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우리를 사로잡은 자는 조삼파(趙三波) 일족(一族)이었는데, 조삼파가 나를 알고 있었으므로 조삼파광녕에 이르러서 묻기를, 「너는 조선의 후문(後門)에서 압록강을 지나 왔을텐데 압록강 깊이는 얼마나 되며, 말을 타고 건널 수 있느냐? 강변에는 농장에 있는가, 없는가? 방어하는 태세는 어떠한가?」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농장은 없고 방어는 매우 견고하며, 압록강은 물이 깊어 그냥 건널 수 없다.」고 하니, 또 묻기를, 「어떤 사람이 너를 데리고 왔느냐?」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사신을 따라서 왔다.」 하니, 또 「사신의 인원은 얼마나 되는가?」하고 묻기에, 「30여 인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고 합니다.

1. 8월 초3일에 십삼산역(十三山驛)에서 유숙하는데, 서반(序班) 왕충(王忠)요동(遼東)에서부터 북경으로 향하기에 신이 성식(聲息)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광녕(廣寧)에 도착하니 총병관(摠兵官)이 내게 이르기를, 「야인 조삼파(趙三波)가 여기 왔기에 내가 말하기를, 너는 건주(建州) 사람으로 조선과 원수됨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사람과 말을 빼앗고 사로잡았느냐?고 하니, 조삼파가 말하기를, 조선에서 죽인 낭발아한(浪孛兒罕)은 바로 나와 형제이므로 복수하려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 초4일에 광녕에서 유숙하였는데, 왕황(王璜)이 말하기를, ‘야인 조삼파·동관치(童關赤) 등 5인이 와서 총병관(摠兵官)에게 고하기를, 「건주(建州) 사람 들이 사냥하려고 개원위(開原衛)에 이르렀는데, 사실 여부를 가리지 아니하고 잡아 죽었습니다.」고 하니, 총병관이 조삼파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만약 사냥을 하려고 하였다면 어찌하여 병갑(兵甲)386) 을 가지고 장장(長墻) 아래도 들어갔느냐? 너희들은 일찍이 조선의 인마(人馬)를 창탈(搶奪)하고 잡아갔으며, 또 중국(中國)을 침범하였다. 너희가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우리가 조선요동과 합하여 공격할 것이니, 그러면 너희 무리는 남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고, 왕황이 또 말하기를, ‘달자(達子)의 성식(聲息)이 안정되면 겨울에 이르러 장차 조선의 군사를 청하여 함께 요주위(遼州衛)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1. 요동에서 동팔참(東八站)야인의 성식이 있음을 듣고 호송군(護送軍) 25명을 더하였습니다.

1. 요동호송 백호(遼東護送百戶) 고보(高輔)가 말하기를, ‘야인(野人)들이 모두 명(明)나라 갑옷을 입고 건자개(乾者介)에 이르러 가축과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에게 묻기를, 「조선 사신이 어느 때 돌아갔느냐?」고 하였으며, 야인들은 지금 산태두(山太豆)에 있으면서 길을 막아 그 치중(輜重)387) 을 약탈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곧 사목(事目)을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강효문(康孝文)·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평안도 관찰사 김질(金礩)·도절제사(都節制使) 김사우(金師禹)에게 유시(諭示)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4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통신(通信)

○謝恩使金係熙姜希顔先遣通事張有誠啓:

聞見事目: "一。 五月二十九日還到寧遠衛, 指揮盛光云 ‘達賊建州毛憐等衛野人連結, 今在沙河北長墻外二十里之地, 汝國向者殺野人有幾?’ 答曰, ‘不知。’ 盛光曰, ‘野人等汝國之讎, 朝廷與汝國合兵攻之, 則可以殄殲無遺。’ 一。 七月二十九宿于曹家莊驛, 廣寧差人管押被擄達子回來女四人及本朝解送楊里夫金長命等詣北京, 楊里夫云 ‘向虜我者與趙三波一族, 故三波知我, 三波廣寧, 見我問曰, 「汝自朝鮮後門, 到鴨綠江而來, 鴨綠江淺深幾許? 騎馬可渡乎? 江邊農莊有無、防禦緊緩何如?」 答云, 「農莊無有, 防禦甚緊, 鴨綠江水深不可徒沙。」 又問, 「何人帶汝來?」 答云, 「隨使臣入來。」 又問, 「使臣多少幾何?」 答云, 「三十餘人。’」 一。 八月初三日宿于十三山驛, 序班王忠遼東北京, 臣問聲息, 答曰, ‘我到廣寧, 摠兵官謂我曰, 野人 趙三波來此, 我語之云 「汝建州人, 於朝鮮無讎怨, 何故搶擄人馬乎? 三波曰, 朝鮮所殺浪孛兒罕乃叔伯, 故欲復讎耳」。’ 一。 初四日宿于廣寧, 王璜曰, ‘野人 趙三波童關赤等五人來告摠兵官曰, 「建州人等田獵到開原衛, 不分情僞, 搶殺之」, 摠兵官謂三波曰, 「汝等若田獵, 則何以帶兵甲入長墻底乎? 汝嘗搶擄朝鮮人馬, 又犯上國。 汝若如此, 我與朝鮮遼東合攻, 則汝類無遺矣。’」 仍曰, ‘達子聲息寧定, 則及冬將請朝鮮兵, 合攻遼州衛矣。’ 一。 遼東東八站野人聲息, 加護送軍二十五名。 一。 遼東護送百戶高輔曰, ‘野人等皆着甲, 到乾者介, 搶掠頭畜財物, 問於人曰, 「朝鮮使臣回來何時?」, 野人等今在山太豆, 欲邀截搶刼奪其輜重。"

卽以事目諭都體察使韓明澮咸吉道觀察使康孝文、都節使康純平安道觀察使金礩、都節制使金師禹


  •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4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통신(通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