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찬성 황수신이 아산에 전지를 차지하였다고 사헌부에서 상소하다
지평(持平) 이영부(李永敷)가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황수신(黃守身)은 공신(功臣)이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으나, 그 죄는 심히 무겁습니다. 지금 만약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경계하는 바가 없을 것이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과죄(科罪)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황수신은 죄가 없다. 그것을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인하여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이 삼가 《서경(書經)》의 《주서(周書)》편을 보건대, 삼공(三公)173) 을 세워서 ‘도리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였고, 삼고(三孤)174) 는 ‘이공(貳公)으로서 교화(敎化)를 넓힌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관직(官職)은 반드시 다 갖출 것이 없으나, 오로지 그 적당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대저 삼공(三公)과 삼고(三孤)는 나라의 중임(重任)이고 신하의 극위(極位)이지만, 진실로 그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오히려 그 자리를 비워 놓을 것이요, 오히려 그 적당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써 그 자리를 도둑질하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일전에 좌찬성(左贊成) 황수신(黃守身)이 나라에서 아산(牙山)을 혁파(革罷)하는 편부(便否)를 의논하던 때를 당하여, 몰래 그 땅에 전지(田地)를 차지하고 그 고을에 집을 지을 계획을 품었는데, 우연히 진휼사(賑恤使)의 명(命)을 받아 그 도(道)에 사신으로 가서, 몰래 족인(族人) 김극강(金克剛)의 이름을 도용(盜用)하여 황효원(黃孝源)에게 제의하여 보낸 것을 받도록 청하고, 조원지(趙元祉)에게 입안(立案)하고서 이르기를, ‘일을 이미 비밀로 하였고 또 틀림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를 당하여 고을 사람 희무(希武)가 뒷날에 다투리라고 그가 어찌 짐작하였겠습니까? 희무가 이를 다투자, 공아(公衙)의 채전(菜田)을 재빨리 공가(公家)에 붙이고 깊이 스스로 불쾌하게 여기다가, 하사(下賜)를 받고자 꾀하여 그 아내를 이장(移葬)한다고 핑계하고 모람되게 계달(啓達)하여, 쓸모없는 사석(沙石)의 땅을 가지고 그 비옥한 땅과 바꾸어 받았습니다. 이리하여 그 현(縣)이 복구되는 것을 꺼려서 공아(公衙)를 부수고자 꾀하였고, 또 강제로 사고자 하여 조원지에게 청탁한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사창(社倉)을 두는 것을 싫어하여 급히 집을 부수고자 하여서 함우치(咸禹治)에게 글을 보낸 것이 매우 간절한 사연이었습니다. 또 반인(伴人)175) 을 시켜서, 채전(菜田)의 화리(花利)를 청구(請求)하여 다 써버렸고, 관노(官奴) 도자(道者)를 모람되게 받아서 역사(役使)시켰습니다. ‘평산(平山)의 전지(田地)를 공가(公家)에 환속(還俗)시켰다.’고 이름하고 그것을 경작하여 수확하기를 태연자약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황수신이 나라의 땅을 가지고 자기의 농장(農場)으로 삼은 것입니다. 진휼사(賑恤使)의 명(命)을 빌려서 전지(田地)를 구(求)하는 구실로 삼고, 김극강의 몸으로써 자기의 몸을 대신하게 하여, 황효원과 서로 짜고서 조원지에게 지시하여 사석(沙石)의 땅을 가지고 비옥한 땅을 바꾸어 받은 것이니, 이것은 나라를 메마르게 하고 자신을 살찌게 하는 일입니다. 속공(屬公)하였다고 이름하고서도 한편 경작하고 한편 거두었으니, 이것은 나라의 재물을 훔치는 일입니다. 그 사창(社倉)을 싫어하여 글을 보낸 것은 나라에 병이 되는 일입니다. 부수고자 꾀하다가 그것을 강제로 사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그 관가(官家)를 사사로이 차지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채전(菜田)의 화리(花利)를 구하기에 이르러 털끝만한 작은 이익도 계산하여 따졌으며, 관노(官奴)를 모람되게 부리는 것은 몰래 인민(人民)을 점유(占有)하는 일입니다. 아아, 일찍이 묘당(廟堂)176) 의 대신(大臣)이라 하면서 성상을 속이고 사정(私情)을 행한 것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미 아내를 장사지내겠다고 아뢰고서도 끝내 이장(移葬)하지 않았으니, 또한 심한 점이 있습니다. 황수신은 ‘국론(國論)이 정해지지 않아서 장차 다시 세울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그리하였다.’고 하지만, 신 등은 생각건대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이미 그 편부(便否)를 살피고서 혁파(革罷)한 지 오래인데, 국론(國論)이 이미 정해지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말이며, 다시 세울 리가 만무한데 급급히 부수어서 취(取)하겠다는 글을 이미 함우치에게 보냈다니 이게 또 무슨 염려인가?’ 합니다.
농장(農場)을 만들고자 하여서 아내를 장사지내겠다고 아뢰었으니, 그 꾀가 심히 간교(奸巧)합니다. 지금 이미 다 폭로되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변명하고자 하니, 그가 천총(天聰)을 속이는 것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대저 황수신이 조정(朝廷)을 속인 것은 특히 그의 탐욕(貪欲)에서 나왔으니 족히 책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일찍이 묘당(廟堂)의 대신(大臣)이 되어서 천총(天聰)을 속인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인신(人臣)의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 징계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시경(詩經)》 절남산지십(節南山之什)에 이르기를, ‘혁혁(赫赫)한 태사(太師)와 윤씨(尹氏)여! 백성들이 모두 그대들을 우러러본다.’ 하였고,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서 ‘자로(子路)가 임금 섬기는 도리를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황수신은 이미 인신(人臣)의 행동이 없으며, 또 임금을 속인 죄가 있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훈구(勳舊)의 신하로 논(論)하여서 대신(大臣)으로 대접하고 여러 사람이 우러러 보는 암랑(巖廊)177) 의 자리에 처(處)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황수신이 중한지, 묘당(廟堂)이 중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황수신을 중하게 여기시면 묘당(廟堂)을 가볍게 보는 것이요, 묘당(廟堂)을 가볍게 보면 묘당의 신하도 또한 가볍게 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황수신을 아끼십니까? 신 등은 묘당을 위해서 이를 아끼는데, 또 후에 이를 논할 때 ‘재상에 그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고 할런지 알지 못하겠으므로 신 등은 두려워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황수신을 법대로 밝게 처치하여서 인신(人臣)의 탐욕하고 무망(誣罔)하는 죄를 바로 잡으소서."
하였다. 상소(上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종이 말미(末尾)에다 친히 쓰기를,
"황수신이 비록 조금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임금을 무망(誣罔)한 데에 이르렀겠는가? 진실로 소인(小人)처럼 간교하게 대는 꾸며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허물이 드러난 것이다. 공신(功臣)의 죄는 죽을 죄도 또한 마땅히 용서하는데, 하물며 일체 사정이 없겠는가?"
하였다. 장령(掌令) 유계번(柳季潘)이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7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20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농업-전제(田制)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창고(倉庫)
- [註 173]삼공(三公) :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
- [註 174]
삼고(三孤) : 소사(小師)·소부(小傅)·소보(小保).- [註 175]
반인(伴人) : 공신이나 고급 관료(官僚)를 따라다니면서 그 몸을 보호하던 병졸(兵卒). 수종인(隨從人).- [註 176]
묘당(廟堂) : 의정부(議政府).- [註 177]
암랑(巖廊) : 궁전 옆의 월랑.○癸巳/持平李永敷將本府議啓: "黃守身以功臣特赦, 然其罪甚重。 今若不治, 人無所警, 請依法科罪。" 傳曰: "守身無罪, 其勿復言。" 司憲府因上疏曰:
臣等謹按《周書》, 立三公曰, "論道經邦。", 三孤曰, "貳公弘化。" 又曰, "官不必備, 惟其人。" 夫公、孤國之重任, 臣之極位, 苟無其人, 寧虛其位, 寧可以非其人而竊其位乎? 日者左贊成黃守身當國家議革牙山便否之日, 陰懷有田其地、家其官之計, 偶受賑恤之命, 而使於其道, 潛用族人金克剛之名, 請受議送於黃孝源, 立案於趙元祉而謂已秘且固矣。 當其時, 豈料邑人希武爭之於後乎? 希武爭之而公衙菜田遽屬於公, 則深自病焉, 謀欲受賜, 托以移葬其妻, 而冒爲啓達, 以其沙石不用之地, 換受膏腴。 於是病其縣之復也, 則謀破公衙, 且欲抑買而請囑元祉者屢屢。 惡置社倉, 欲急破家而通書禹治者懇懇。 且使伴人而菜田花利求請盡用, 官奴道者冒受役使。 名曰, "平山之田, 還屬於公", 而其耕穫自若, 是則守身以國家之地爲己之農庄。 假賑恤之命爲求田之資, 以克剛之身爲己之身, 表裏孝源, 指使元祉以沙石換受膏腴, 瘠國自肥也。 名屬公而且耕且收, 竊其國財也。 惡其社倉而通書者病於國也。 謀破而欲其抑買, 私其官也。 至於菜田花利之求計析秋毫, 官奴冒濫之使, 隱占人民。 嗚呼! 曾謂廟堂大臣而誣上行私, 一至於此乎? 旣啓葬妻而終不移葬, 則又有甚焉。 守身則以爲 "慮其國論未定, 將以復立而然也", 臣等以爲 "屢遣使臣, 已審便否, 而革之有年矣, 非國論已定而何? 復立萬無, 急急破取之書, 旣通於禹治矣, 又何慮乎?" 欲爲農場而啓以葬妻, 其謀甚巧。 今旣畢露而猶欲自明, 其爲罔冒天聰極矣。 夫守身之欺罔朝廷, 特其貪欲, 不足責也, 曾以爲廟堂大臣, 而罔冒天聰至此乎, 人臣之罪, 莫大於此。 此而不治, 將安所懲? 《詩》曰, "赫赫師尹, 民具爾瞻", 子路問事君, 子曰, "勿欺。" 守身旣無人臣之行, 又有欺君之罪, 殿下寧可論以勳舊而待以大臣, 使處巖廊具瞻之地乎? 且未知守身重歟? 廟堂重歟? 殿下重守身則廟堂輕矣, 輕廟堂則廟堂之臣亦輕矣。 殿下惜守身歟? 臣等爲廟堂惜焉。 又未知後之論此, 以爲"相惟其人耶" 臣等懼焉。 伏望殿下將守身明置於法, 以正人臣貪饕誣罔之罪。
疏上, 御書紙尾曰: "守身雖小有過誤之事, 豈至於誣罔? 眞不如小人巧飾之行, 故其過彰耳。 功臣之罪, 死亦當宥, 況一無情乎?" 掌令柳季潘更啓, 不允。
- 【태백산사고본】 10책 27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20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농업-전제(田制)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창고(倉庫)
- [註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