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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 2월 25일 경인 3번째기사 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천전의(遷奠儀)의 의식과 지문

천전의(遷奠儀)를 베풀었는데, 그 의식은 이러하였다.

"기일(期日) 전 1일에 충호위(忠扈衛)에서 영장(靈帳)과 길유(吉帷)를 묘(墓) 앞에 동향하여 설치하고, 【길유(吉帷)는 영장(靈帳)의 안에 있다.】 집사자(執事者)가 영좌(靈座)를 길유(吉帷) 안에 설치하고, 시책(諡冊)·인(印)·평시책(平時冊)의 안(案)을 영좌(靈座) 앞에 설치한다. 유사(攸司)에서 상주(喪主)의 자리를 영좌(靈座)의 동쪽에 서향하여 설치하는데, 내관(內官)이 그 뒤에 있다. 집사자(執事者)가 축판(祝版)을 영좌(靈座)의 왼쪽에 올리고 영좌(靈座) 앞에 전(奠)을 설치하고, 향로(香爐)·향합(香合)과 아울러 초[燭]를 그 곁에 설치한다. 방상씨(方相氏)가 먼저 광(壙) 안에 이르러 창[戈]으로써 광(壙)의 네 모퉁이를 친다. 명기(明器)·복완(服玩)·애책(哀冊)·증옥(贈玉)·증백(贈帛) 등이 이르면 현실(玄室) 문밖 좌우에 진열한다.

때가 이르면 섭첨지통례(攝僉知通禮)가 영악청(靈幄廳)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고(告)하기를, ‘대여(大轝)에 오르기를 청합니다.’ 하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의장(儀仗)을 진열하기를 의식과 같이 한다. 【그때 시녀(侍女)는 막차(幕次)로 물러가서 먼저 서울에 들어간다.】 봉구관(捧柩官)이 여구관(舁柩官)과 내관(內官)을 거느리고 영구(靈柩)를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린다. 【2개의 윤여(輪轝)를 사용하여 방향을 바꾸어 올린다.】 내관(內官)이 혼백(魂帛)을 받들어 교자(轎子)에 안치(安置)하고 천전청(遷奠廳)에 이르러, 여(轝)를 인도하여 영유(靈帷) 안에 안치(安置)한다. 내관(內官)이 혼백(魂帛)을 받들어 영좌(靈座)에 안치(安置)하고 우주궤(虞主匱)를 그 뒤에 두고, 명정(銘旌)을 왼쪽에 세워 둔다. 집사자(執事者)가 준소(尊所)를 설치하고, 찬(饌)을 받들어 영좌(靈座) 앞에 전(奠)드린다. 사의(司儀)가 상주(喪主)를 인도하여 자리에 나아가면, 창(唱)하기를, ‘재배(再拜)하고 곡(哭)하라.’ 하면, 상주(喪主) 이하가 두 번 절하고 곡(哭)하여 슬픔을 다한다. 사의(司儀)가 상주(喪主)를 인도하여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으면, 집사자(執事者) 1인이 향합(香合)을 받들고 1인이 향로(香爐)를 받들어 끓어앉아 바친다. 상주(喪主)가 삼상향(三上香)하는데, 집사자가 향로(香爐)를 안(案)에 올린다. 집사자가 차[茶]와 술[酒]을 바치면 상주(喪主)가 차로 강신(降神)하고 술을 세 번 전(奠)드리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가서 꿇어앉는다.

축(祝)이 영좌의 왼쪽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기를 끝마친다. 사의(司儀)가 상주(喪主)를 인도하여 자리에 돌아가면, 창(唱)하기를, ‘재배(再拜)하고 곡(哭)하라.’ 하면, 상주 이하가 두 번 절하고 곡(哭)하여 슬픔을 다하고서 차례로 나간다. 이보다 앞서 상주의 사위(辭位)를 연도(羨道)의 동쪽에 설치하고, 또 애책(哀冊)을 바치는 관원의 자리를 연도(羨道)에 서향하여 설치한다. 서운관(書雲觀)에서 때를 보고하면, 섭첨지통례(攝僉知通禮)가 고(告)하기를, ‘진발(進發)하기를 청합니다.’ 한다. 봉구관(捧柩官)이 여구관(舁柩官)을 거느리고 대여를 인도하여 현실(玄室)의 문밖에 이른다. 명정(銘旌)이 앞에서 인도하고, 【혼백(魂帛)과 우주(虞主)를 길유(吉帷)에 안치(安置)한다.】 상주(喪主) 이하가 곡(哭)하면서 따라간다. 섭첨지통례(攝僉知通禮)가 대여(大轝) 앞에 나아가서 고(告)하기를, ‘대여에서 내려서 순(輴)에 【바로 윤여(輪轝)이다.】 오르기를 청합니다.’ 하면, 봉구관이 여구관과 만사(挽士)를 거느리고 영구(靈柩)를 받들어 순에 안치(安置)한 뒤, 윤대판(輪對板)을 없애고 속을 풀어서 그 상하(上下)를 살피고, 끈을 매다는 곳에 옮겨 안치(安置)한다. 【명주 속에 흰 정포(正布) 끈과 흰 저포(苧布) 속에 흰 정포(正布) 끈을 사용한다.】 점차 곽(槨) 안에다 내려서 안치(安置)하고 구의(柩衣)를 정제(整齊)하고 덮개[蓋]를 덮는다. 윤전(輪轉)하여 현실(玄室)에 들이어 자리에 【황장목(黃腸木)의 평상(平床)이다.】 안치(安置)하고 곽의(槨衣) 2벌을 【백주(白紬)·홍주(紅紬) 각각 1벌씩이다.】 덮고, 명정(銘旌)은 대[杠]를 떼어버리고 그 위에 놓는다. 애책(哀冊)을 바치는 관원이 애책을 받들어 재실(梓室)의 서쪽에 올리고, 차례로 증백(贈帛)·증옥(贈玉)을 애책의 남쪽에 올린다.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가 그 소속을 거느리고 보삽(黼翣)·불삽(黻翣)을 재궁(梓宮)의 양 옆에 꽂고, 다음에 복완(服玩)과 【토등 상자(土藤箱子) 2개에 넣어서 담는다.】 명기(明器)를 받들어 각각 차례대로 편리한 데 따라서 진열한다. 상주(喪主) 이하가 부복(俯伏)하고 곡(哭)하는데, 찬자(贊者)가 창(唱)하기를, ‘곡(哭)을 그치고 재배(再拜)하고 흥(興)·평신(平身)하라.’ 하면, 상주 이하가 두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편다. 찬자(贊者)가 창(唱)하기를 ‘부복(俯伏)·곡(哭)하라.’ 하면, 상주(喪主) 이하가 꿇어앉아 부복하고 곡하여 슬픔을 다한다. 봉사(奉辭)가 끝나면 물러가서 입주청(立主廳)에 【곧 길유(吉帷)이다.】 나아간다. 조묘 도감 제조(造墓都監提調)가 자물쇠로 현실(玄室)을 잠그는데, 장령(掌令)도 아울러 자물쇠로 잠그는 일을 감독한다. 조묘 도감 제조가 흙 아홉 삽(鍤)을 덮으면, 유사(攸司)에서 작공(作工)을 거느리고 흙을 덮는다. 일을 끝내면 지석(誌石)을 내린다. 【묘(墓)의 동쪽 가까운 땅에 묻는데, 석상(石床)의 서쪽이다.】 서운관(書雲觀)에서 후토(后土)에 제사지내기를 의식과 같이 한다. 상하(上下)에서 통용(通用)할 만한 물건 이외에는 모두 다 불태워버린다."

그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빈(嬪) 한씨(韓氏)상당(上黨)162) 의 벌족(閥族)이니, 먼 조상(祖上) 휘(諱) 한난(韓闌)고려 초에 삼한 공신(三韓功臣)이란 칭호를 받았었다. 그 뒤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으로서 한악(韓渥)고려에 벼슬하여 정승(政丞)의 지위에 올라 사숙(思肅)이라 시호(諡號)하고 충혜왕(忠惠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한수(韓脩)가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로서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하였으니, 빈(嬪)에게 고조부(高祖父)가 된다. 증조부(曾祖父) 휘(諱) 한상질(韓尙質)은 본조(本朝)에 벼슬하여 관(官)이 자헌 대부(資憲大夫)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에 이르렀고 문열(文烈)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조부(祖父) 휘(諱) 한기(韓起)는 순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사(領經筵事)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에 추증(追贈)되고 승의랑(承議郞) 사헌 감찰(司憲監察)을 지내었고, 아비 휘(諱) 한명회(韓明澮)는 지금 수충 위사 협책 정난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이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임하였으니, 공훈(功勳)이 현저하게 한 집안에 모여서 정성(鼎盛)하였다. 어미는 여강(驪江) 민씨(閔氏)이니, 고려의 대유(大儒)로서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문인공(文仁公)이라 시호(諡號)한 휘(諱) 민지(閔漬)의 5세손(世孫)인 가정 대부(嘉靖大夫) 한성부 윤(漢城府尹)봉조청(奉朝請)163) 민대생(閔大生)의 딸이다. 안팎에서 문벌(門閥)의 번성(繁盛)하기가 우리 동방(東方)에서 으뜸이었는데, 다 대대로 그 아름다운 덕(德)을 이어받아 여경(餘慶)을 쌓아서, 정통(正統) 10년 을축년164) 정월 16일 경인에 빈(嬪)을 낳았다. 빈(嬪)은 나면서 정숙(貞淑)하고 상냥하였으며, 부드럽고 아름다와 오로지 법도(法度)가 있었으므로 드디어 간택(揀擇)을 받아서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었다. 천순(天順) 4년165) 여름 4월 갑자에 친영(親迎)하여 혼례(婚禮)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공경하고 경계하여 어그러짐이 없었으며, 부도(婦道)를 지키는 데 오로지 조심하였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정성과 효도를 다하여 능히 숙옹(肅雍)166) 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다음해에 임신하여 11월 정유에 갑자기 병에 걸리니, 양궁(兩宮)께서 진려(軫慮)하여 친히 납시어 병을 보살폈고, 의약(醫藥)과 기도(祈禱)를 극진히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드디어 병이 위중하여 낫지 아니하다가 30일이 지난 병인에 원손(元孫)을 낳으시니, 양궁께서 크게 기뻐하여 경내(境內)의 죄인을 사유(赦宥)하고 백관(百官)의 자급(資級)을 내려 주는 등, 온 나라가 기뻐 날뛰었다. 12월 신미에 병이 위독하여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17세였다. 양궁께서 애도(哀悼)하시고 나라 사람들이 대소(大小)가 없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아아, 슬프다. 시호(諡號)를 장순(章順)이라 내려 주고, 다음해 2월 25일 경인에 파주(坡州)보시동(普施洞) 언덕에 안장(安葬)하니, 예(禮)대로 한 것이다. 빈(嬪)은 고아(高雅)한 성질에 조용하여 말이 없었고, 세자[儲位]에 배필이 되어 원손(元孫)을 낳는 등 방가(邦家)를 돈독하게 공경하더니, 어찌 하루 아침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아아, 하늘이 천부(天賦)의 덕(德)을 주고서도 그 목숨에는 인색하므로 하늘을 믿을 수 없음이 심하니, 이루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 명(銘)에 이를기를, ‘훈벌(勳閥)이 성(盛)하여 인지(麟趾)167) 의 아름다움이 덕(德)을 쌓아, 아름다운 숙녀(淑女)를 낳기에 이르렀고, 왕세자[貳極]의 배필이 되기에 이르렀네. 생각건대 양궁(兩宮)의 뜻을 맞추고 능히 빈(嬪)의 법도(法度)를 닦았네. 하늘이 돌보지 않으심인가? 승하(昇遐)하심이 어찌 이다지도 급박(急迫)한가? 목숨이 길고 짧음이 운수(運數)에 있다지만, 하늘의 뜻은 헤아릴 길이 없네. 원손(元孫)이 능히 태어나서 그 울음 소리가 크니, 후세에 복록(福祿)을 내림이 만세(萬世)에 끝이 없겠네.’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7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518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註 162]
    상당(上黨) : 청주(淸州)의 옛 이름.
  • [註 163]
    봉조청(奉朝請) : 문무 당상관(文武堂上官)이 나이가 많아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 그 벼슬을 특별히 그대로 띠고 물러나게 하던 것. 또는 그 칭호.
  • [註 164]
    을축년 : 1445 세종 27년.
  • [註 165]
    천순(天順) 4년 : 1460 세조 6년.
  • [註 166]
    숙옹(肅雍) : 공경하고 화합하는 것.
  • [註 167]
    인지(麟趾) :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것을 말함.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後妃)가 자손의 번창한 것을 《시경(詩經)》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장에서 노래한 데서 나온 말.

○設遷奠。 其儀:

前期一日, 忠扈衛設靈帳及吉帷於墓前東向。 【吉帷在靈帳之內。】 執事者設靈座於吉帷之內, 設諡冊、印、平時冊案於靈座前。 攸司設喪主位於靈座之東西向, 內官在後。 執事者奠祝版於靈座之左, 設奠於靈座前, 設香爐、香合幷燭於其旁。 方相氏先至壙內, 以戈擊壙四隅。 明器、服玩、哀冊、贈玉、贈帛等至, 陳於玄室門外左右。 時至, 攝僉知通禮進靈幄廳, 跪告 "請升大轝", 俯伏、興、退。 陳儀仗如儀。 【時侍女退, 次先入京。】 捧柩官帥舁柩官及內官捧柩升大轝, 【用二輪轝轉升。】 內官捧魂帛安於轎子, 至遷奠廳, 導轝安於靈帷內。 內官捧魂帛安於靈座, 虞主匱置於後, 銘旌植於左。 執事者設尊所, 奉饌奠于靈座前。 司儀引喪主就位, 唱 "再拜、哭", 喪主以下再拜哭盡哀。 司儀引喪主詣靈座前跪, 執事者一人奉香合, 一人奉香爐跪進。 喪主三上香, 執事者奠爐于案。 執事者進茶酒, 喪主酹茶三奠酒, 俯伏、興、少退、跪。 祝進靈座之左跪, 讀祝文, 訖, 司儀引喪主復位唱 "再拜、哭", 喪主以下再拜哭盡哀, 以次出。 先是, 設喪主辭位於羡道之東, 又設進哀冊官位於羡道西向。 書雲觀報時, 攝僉知通禮告請 "進發。" 捧柩官帥舁柩官, 導大轝, 至玄室門外。 銘旌前引, 【魂帛、虞主仍安吉帷。】 喪主以下哭從。 攝僉知通禮進大轝前, 告請 "降大轝升輴。" 【卽輪轝也。】 捧柩官帥舁柩官及挽士捧柩安於輴, 去輪對板, 解裏察其上下, 移安於懸索。 【用紬裹白正布索及白苧布裹、白正布索。】 漸次下安於槨內, 整柩衣加蓋。 輪入玄室, 安於座。 【黃腸木平床】 覆以槨衣二, 【白紅紬各一】 銘旌去杠, 置其上。 進哀冊官奉冊, 奠於梓室之西, 次以贈帛、贈玉奠于哀冊之南。 國葬都監提調率其屬, 以黼翣、黻翣樹梓宮兩旁, 次奉服玩, 【入盛土籠箱子二。】 明器各以次隨便陳列。 喪主以下俯伏、哭, 贊者唱 "哭止、再拜、興、平身," 喪主以下再拜、興、平身。 贊者唱 "俯伏、哭," 喪主以下跪, 俯伏, 哭盡哀。 辭訖, 退詣立主廳。 【卽吉帷也。】 造墓都監提調鎖閉玄室, 掌令竝監鎖閉。 造墓都監提調覆土九鍤, 攸司帥工作覆土。 終事下誌石。 【埋於墓東近地石床之西。】 書雲觀祠后土如儀。 上下通用之物外, 竝皆燒焚。

其誌文曰:

韓氏, 上黨茂族也。 遠祖諱, 在高麗初, 賜號三功臣。 其後最著者曰, 仕高麗位政丞, 諡思肅, 配享忠惠王廟庭。 曰, 判厚德府事, 諡文敬, 於嬪爲高祖。 曾祖諱尙質, 仕本朝官至資憲大夫三司左僕射, 諡文烈。 祖諱,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經筵事上黨府院君行(承儀郞)〔承議郞〕 司憲監察。 父諱明澮, 今爲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在翼功臣輔國崇祿大夫上黨府院君兼判兵曹事, 勳著鍾鼎。 母, 驪江 閔氏, 高麗大儒門下侍中, 諡文仁公五世孫嘉靖大夫漢城府尹奉朝請大生之女也。 內外門閥之盛, 甲於東方, 咸能世濟其美, 積有餘慶, 以正統十年乙丑正月十六日庚寅生嬪。 嬪生而淑婉, 柔嘉維則, 遂膺妙選, 冊封爲王世子嬪。 天順四年夏四月甲子親迎禮成。 自是儆戒無違, 執婦道惟謹。 奉兩宮盡誠孝, 克著肅雍之美。 翌年有身, 十一月丁酉忽遘疾, 兩宮軫慮, 親臨視疾, 醫藥祈禱無所不用其極。 遂彌留不痊, 越三十日丙寅, 誕元孫兩宮喜深, 宥境內, 賜百官資, 擧國懽忭。 十二月辛未疾革遂卽世, 享年十七。 兩宮震悼, 國人無小大罔不悲惋。 嗚呼慟哉! 賜諡曰章順, 翌年二月二十五日庚寅安厝于坡州 普施洞原禮也。 嬪雅性閑靜, 配儲位生元孫, 篤敬邦家, 夫何一朝遽至於斯? 嗚呼! 賦之德而嗇其壽, 天之不可恃也甚矣, 可勝痛哉! 銘曰, "猗歟勳閥, 趾美積德。 廼生淑媛, 廼配貳極。 思媚兩宮, 克修嬪則。 不弔于天, 仙馭何迫? 脩短有數, 天耶叵測。 元孫克岐, 厥聲喤喤。 委祉于後, 萬世無疆。"


  • 【태백산사고본】 10책 27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518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