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권남·정창손 등과 지리·형상 등에 대해 말하다
대가가 파평산(坡平山)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종친(宗親)·재추(宰樞)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광탄(廣灘)에 이르러 임금이 한 사람이 굶주려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친히 말 위에 가지고 있던 밥을 풀어서 먹이었다. 밤에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니, 백관(百官)이 대가를 맞이하였다. 임금이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우의정(右議政) 권남(權擥)·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및 육조 판서(六曹判書) 이상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술이 두어 차례쯤 도니 인하여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에 백성을 옮기는 것과 강원도(江原道)의 강무장(講武場)766) 을 파하는 등의 일을 의논했는데, 말이 지리(地理)·형승(形勝)에 미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평양(平壤)에서 행궁(行宮)의 자리를 외성(外城)에서 얻었는데, 매우 좋다."
하고, 인하여 송도(松都) 및 연희궁(衍禧宮)·한양 도읍(漢陽都邑)의 형세를 논하며 서로 칭찬하고 헐뜯고 하였다.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평양은 수세(水勢)는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주산(主山)이 미약하여 궁실(宮室)을 세우는 데 불가(不可)하고, 송도는 주산이 기복(起伏)의 본말(本末)은 있으나 남산이 너무 멀어서 한양만 같지 못합니다. 만일 지리의 심오(深奧)한 것을 논한다면 주상께서는 실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공물(貢物)을 대납하는 간사승(幹事僧)767) 의 침어(侵漁)하는 폐단을 말하므로, 임금이 물으니 정인지가 너무 취하여 조목조목 진달하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술을 마시며 담론(談論)하는데, 정인지가 문득 나를 욕하였으니, 정인지가 무슨 소견(所見)이 남보다 월등하게 나은 것이 있기에 교만하여 남을 깔보고 사람을 업신 여기는 것이 여기에 이르는가? 경박하기가 당시에 제일이다. 정인지가 세종조(世宗朝)에 있어서 매우 총애를 받아 문종(文宗)에게 보도(輔導)의 구의(舊義)가 있으니, 나는 다만 구로(舊老)로서 대접할 뿐이다. 그러나 또한 나에게는 훈로(勳勞)도 없다. 스스로 소년 등과(少年登科)하여 일찍이 뜻을 이루어서 그 폐단이 여기에 이르른 것이다. 유사(攸司)에 붙여서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나, 돌아보건대 노인이고 또 취중에 실수한 것이므로 수죄할 것도 못되니, 내가 죄를 가하지 않겠다."
하였다. 정창손·권남 등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정인지가 늙고 쇠하여 술만 마시면 문득 대답에 실수합니다."
하였으나, 정인지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자주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나에게 어찌 매양 이와 같은가?"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부드럽게 용서하고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를 불러 네 아비를 데리고 나가라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7책 430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과학-지학(地學) / 재정-공물(貢物) / 인물(人物)
○駕至坡平山觀獵, 賜宗親、宰樞酒。 至廣灘, 上見一人飢臥, 親解馬上所賚飯食之。 夜至碧蹄驛, 百官迎駕。 上召河東府院君 鄭麟趾、右議政權擥、蓬原府院君 鄭昌孫及六曹判書以上設酌酒數行, 因議平安、黃海道徙民及罷江原道講武場等事, 語及地理形勝, 上曰: "平壤得行宮坐地於外城, 甚佳。" 因論松都及衍禧宮、漢陽都邑形勢, 互相稱詆。 麟趾對曰: "平壤水勢雖佳, 主山微弱, 不可以建宮室, 松都主山有起伏源委, 南山過闊, 無如漢陽。 若論地理底蘊, 則上實不知。" 又言貢物代納幹事僧侵漁之弊。 上問之, 麟趾醉甚, 不能條陳, 但言不可、不可。 上怒曰: "杯酒談論, 麟趾輒辱我, 麟趾有何所見超邁於人, 傲物輕人至此乎? 輕薄當時第一。 麟趾在世宗朝甚見寵, 於文宗有輔導之舊, 予則只以舊老待之。 然亦無勳勞於我。 自以少年登科, 早自得志, 其弊乃至於此。 可付攸司治罪, 顧以老人且酒失, 不足數也, 予不加罪。" 昌孫、擥等進曰: "麟趾老衰, 飮酒則輒失對。" 麟趾猶未悟, 數曰: "上向我何每每如此?" 上特優容, 召河城尉 鄭顯祖, 將汝父出。
- 【태백산사고본】 8책 2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7책 4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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