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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0월 16일 무오 3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중궁과 세자와 더불어 부벽루에 나아가다

이보다 먼저 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로 하여금 문사(文士)·무사(武士)를 모아 향시(鄕試)751) 를 보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시(殿試)752) 를 보았다. 명하여 좌의정(左議政) 신숙주(申叔舟)·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원형(朴元亨)·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극감(李克堪)·도승지(都承旨) 성임(成任)·예조 참의(禮曹參議) 강효문(康孝文)을 참시관(參試官)으로 삼고,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 오백창(吳伯昌), 예조 정랑(禮曹正郞) 권윤(權綸)·정침(鄭忱), 이조 정랑(吏曹正郞) 유계번(柳季潘)을 대독관(對讀官)으로 삼아 문과(文科)를 취하게 하였다. 그 책제(策題)에 이르기를,

"왕이 이렇게 말하였다. 황해도(黃海道)·평안도(平安道) 2도는 전조(前朝)753) 부터 본래 부강(富强)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근년 이래로 인물(人物)이 유망(流亡)하여 전야(田野)가 진황(陳荒)하고 군액(軍額)이 감소되니, 군사가 피곤하고 군마(軍馬)가 약하여졌다. 어떻게 하면 유망한 사람이 돌아와서 전야가 다 개간되고 군액(軍額)이 펴져서 군사와 군마가 정강(精强)하여지겠는가? 제생(諸生)들은 두 도에서 생장하여 눈으로 보고 귀에 익었으니 이를 헤아리기를 자세히 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각각 숨김없이 진달하라."

하였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세자(世子)와 더불어 부벽루(浮碧樓)에 나아가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한명회(漢明澮)·이조 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질(金礩)·참의(參議) 구신충(具信忠)을 참시관(參試官)으로 삼고, 병조 정랑(兵曹正郞) 임효검(林效儉)·정종주(鄭宗周), 좌랑(佐郞) 이극증(李克增)·신환(申煥)을 참고관(參考官)으로 삼아 무거(武擧)의 사후(射侯)하는 것을 친시(親試)하였다. 도관찰사(都觀察使) 조효문(曹孝門)·도절제사(都節制使) 황석생(黃石生) 등이 연탁(宴卓)을 올리었다. 임금이 현판(懸板)의 제영(題詠)에 고려(高麗) 의종(毅宗)의 시(詩)가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어제(御製)하기를,

"광대한 강의 흐름 어찌 다하랴! 근원이 있는 것은 모두 이렇다. 당당한 큰 업을 어디서 시작하랴! 아득하고 어둑하여 천지(天地)가 없다. 외람되이 요도(瑤圖)를 쥐어 화란(禍亂)을 평정한 것이 어찌 나의 공이랴. 온전히 여러 사람의 지혜를 씀에 힘입었다. 눈을 달리매 천산(千山)이 한 지경을 이루었으니, 고금의 호걸(豪傑)이 두가지 이치가 없다. 군사를 훈련하고 방면을 살피고 백성의 폐단을 찾으니, 팔조(八條) 교민(敎民)이 어찌 전대에만 아름다우랴!"

하였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재추(宰樞)에게 이를 화답(和答)하기를 명하고, 또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게 하니, 기록하기를,

"경진년754) 초겨울 초하룻날 임금이 서쪽 땅에 순행(巡幸)하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고, 사마(士馬)를 정돈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니 평양구도(舊都)755) 라 이르고, 명하여 평안(平安)·황해(黃海) 두 도의 선비를 모아 책문(策問)을 발하여 문사(文士)에게 두 도의 시무(時務)로써 묻고, 대가(大駕)를 명하여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강에 임하여 무사(武士)가 사후(射侯)하는 것을 보아 등제(等第)를 정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조효문(曹孝門)이 헌수(獻壽)하기를 절하여 청하니, 호종(扈從)하는 군신(群臣)에게 모두 차례로 잔[爵]을 올릴 것을 명하였다. 술이 행하여지자 붓을 가져오라 명하여 시를 지으니, 군신들이 앉은 자리에서 화답(和答)하여 올리었다. 조효문이 판(板)위에 달기를 청하니 허락하고, 신숙주를 돌아보며, ‘네가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라.’ 하였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시어 난(難)을 평정하고, 문(文)으로 태평을 이루게 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사방(四方)을 순시(巡視)하였습니다.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며, 언로(言路)를 열고 현준(賢俊)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까 급급하셨습니다. 이에 또 등람(登覽)하여 하상(遐想)하며 높이 천고(千古)를 회상하여 물건에 붙여 감회를 일으키어 시(詩) 밖에 애연(藹然)합니다. 천파(天葩)가 휘황하게 비치어 만세의 광휘(光輝)를 남기었으니, 참으로 기주(箕疇)와 아름다움을 함께 한 것이며, 그것은 서토(西土) 사람의 천일(千一)의 다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면 어찌 백성의 질고를 살피고 사마(士馬)를 정돈하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臣) 신숙주는 배수(拜手) 계수(稽首)하고 삼가 기록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2권 9장 B면【국편영인본】 7책 427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과학-지학(地學)

  • [註 751]
    향시(鄕試) : 각도(各道)에서 그 도 안의 유생(儒生)에게 보이던 초시(初試)를 말함.
  • [註 752]
    전시(殿試) : 임금이 친히 보이는 과거 시험. 과거의 마지막 시험으로서 여기에서 장원(壯元)과 갑·을·병과로 나누어 33인을 시취(試取)하였음.
  • [註 753]
    전조(前朝) : 고려.
  • [註 754]
    경진년 : 1460 세조 4년.
  • [註 755]
    구도(舊都) : 옛서울.

○先是, 令平安黃海道聚文武士取鄕試, 至是殿試。 命左議政申叔舟、刑曹判書朴元亨、吏曹參判李克堪、都承旨成任、禮曹參議康孝文爲參試官, 藝文直提學吳伯昌、禮曹正郞權綸鄭忱、吏曹正郞柳季潘爲對讀官, 取文科。 其策題:

王若曰。 黃海平安二道, 自前朝素號富强, 近年以來人物流亡, 田野陳荒, 軍額減耗, 士馬疲弱。 何如則流亡復而田野盡闢, 軍額敷而士馬精强? 諸生生長二道, 目覩耳熟, 計之詳矣, 其各陳無隱。

上與中宮、世子幸浮碧樓, 以兵曹判書韓明澮、吏曹判書具致寬、兵曹參判金礩、參議具信忠爲參試官, 兵曹正郞林效儉鄭宗周、佐郞李克增申煥爲參考官, 親試武擧射侯。 都觀察使曺孝門、都節制使黃石生等進宴卓。 上見懸板題詠, 有高麗 毅宗詩, 遂御製云: "蕩蕩江流何窮盡? 有其源者皆如是。 堂堂洪業云何肇? 眇寞冥冥無天地。 叨握瑤圖平禍亂, 豈予全賴用衆智? (聘)〔騁〕 目千山成一界, 古今豪傑無二致。 治戎省方求民瘼, 八敎焉能獨前美?" 命隨駕宰樞和之, 又令叔舟記之, 記曰:

歲在庚辰孟冬初吉, 上巡省西土, 視民疾苦, 整勅士馬, 至于平壤, 謂平壤爲舊都, 命集平安黃海二道之士, 發策問文士以二道時務, 命駕登浮碧樓臨江, 觀武士射侯而科第之。 平安道觀察使曺孝門拜請獻壽, 命與扈從群臣以次進爵。 酒行, 命筆製詩, 群臣於座和進。 曺孝門請懸之板, 上許之, 顧臣叔舟, 汝爲記其顚末。 臣伏覩我殿下神武定難, 文致太平, 猶不自安, 巡視四方。 治兵恤民, 開言路求賢俊, 汲汲如不及。 玆又登覽遐想, 高撫千古, 屬物興懷, 發之於詩, 恢化撫世, 追蹤前聖之意藹然於詩外。 天葩焜煌, 照映垂耀萬世, 眞與箕疇竝美矣, 其不爲西土之人千一之幸歟? 至是而豈止視民疾苦, 整勒士馬而已哉? 臣申叔舟拜手稽首謹記。


  • 【태백산사고본】 8책 22권 9장 B면【국편영인본】 7책 427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과학-지학(地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