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길도 도체찰사 신숙주가 야인 토벌의 전황을 알려 오다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가 군관(軍官) 김교(金嶠)·황수정(黃守正)을 보내어 아뢰기를,
"신(臣)이 제장(諸將)과 길을 나누어 공격(攻擊)하고 토벌(討伐)하여 그 굴혈(窟穴)을 다 없애고 돌아왔는데, 잡아 죽인 것이 4백 30여 급(級)이고, 불태워 없앤 집[室廬]이 9백여 구(區)로 재산(財産)을 함께 없앴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우마(牛馬)가 1천여 마리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김교(金嶠)에게 단의(段衣)를, 황수정(黃守正)에게 주의(紬衣)를 각각 1령(領)씩 주고, 궁전(弓箭)을 내려 주었다. 명하여 북방(北方)을 평정(平定)하였음을 종묘(宗廟)에 고(告)하게 하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그 전문(箋文)에 이르기를,
"천위(天威)가 진동(震動)하자 여러 더러운 무리가 다 소멸(消滅)되어 역마(驛馬)의 첩보(捷報)가 급히 달려오니, 여정(輿情)이 모두 하례(賀禮)하고 조야(朝野)에서 모두 기뻐하며, 경사(慶事)가 종묘(宗廟)에 잇달았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거룩하고 신묘(神妙)하시며 문(文)을 갖추고 무(武)를 갖추시어 거듭 빛나는 은혜로 천하(天下)를 무육(撫育)하시고 오랫동안 이속(異俗)을 인도[梯航]하셨는데, 조그마한 남은 흉도(兇徒)들이 성화(聖化)를 막고 감히 흔단(釁端)을 일으켜 무리를 불러 모으고, 마침내 기회를 틈타서 함부로 날뛰니, 구중(九重)의 신모(神謀)를 세워서 우리의 용맹한 장졸(將卒)을 정비하고 만전(萬全)의 승산(勝算)을 내려 주시어, 저 짐승 같은 무리를 소탕(掃蕩)하고 삼첩(三捷)의 공(功)을 아뢰게 하니, 한번 노하신 그 용기에 다 복종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 등은 외람되게 쓸모없는 자질(資質)로서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춤을 추면서 손뼉을 치고 기뻐하는 정을 갑절이나 더하며 오래도록 거북이와 같이 수(壽)하시기를 항상 축원하겠습니다."
하니, 어찰(御察)로 교지(敎旨)를 내리어 중외(中外)를 사유(赦宥)하였다. 교지에 이르기를,
"천지(天地)의 도(道)는 생성(生成)하는 데에 한결같지만, 그러나 또 냉엄하게 죽이는[肅殺] 때가 있고, 제왕(帝王)의 덕(德)은 인애(仁愛)하는 데에 한결같지만, 그러나 또 위엄(威嚴)을 떨치는 거조(擧措)가 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삭방(朔方)659) 에서 일어나서 문득 동하(東夏)660) 를 차지하셨고, 열성(列聖)께서 그 뒤를 계승하시니, 모든 야인(野人)을 무휼(撫恤)한 까닭은 여러 지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제종 야인(諸種野人)들이 내조(來朝)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불모(不毛)의 땅에 사는 이속(異俗)의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기에 겨를이 없었다. 뜻하지도 않게 낭발아한(浪孛兒罕)이 변장(邊將)과 흔단(釁端)을 일으켜 스스로 주륙(誅戮)당하였다. 그 중에 난(亂)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비거(阿比車)와 패당을 만들어 여러 번 변경(邊境)을 침범하였으므로, 변장(邊將)이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장(武裝)을 하고서 여러 번 군사를 움직일 시기를 청하였다. 나는 조종(祖宗)께서 먼 지방 사람들을 회수(懷綬)한 인정(仁政)과 그들이 전대(前代)부터 귀부(歸附)하여 온 정성(精誠)을 생각하여, 여러 번 변장(邊將)에게 계칙(戒勅)하여 다시 무휼을 더하여서 그들이 스스로 뉘우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완악(頑惡)하고 흉포(兇暴)한 무리들이 하늘에 가득한 큰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날로 더욱 흉악하여져 변방의 백성들이 해독을 받았다. 내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萬物)을 다스리니, 백성들의 부모(父母)가 되는데, 그것을 차마 보고만 있으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원신(元臣)661) 에게 거듭 명하여 가서 군사들을 감독하여 길을 나누어 나란히 진격(進擊)하여 적의 굴혈(窟穴)을 불태워 없애게 하였다. 이에 이달 11일에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가 첩서(捷書)662) 를 치계(馳啓)하였는데, 제장(諸將)이 개선(凱旋)하여 돌아왔고 적(賊)의 소혈(巢穴)이 모두 비었다니, 이것은 실로 조종(祖宗)의 위엄(威嚴)스런 신령(神靈)께서 도와주신 바이다. 변방의 진애(塵埃)가 길이 지식(止息)되고, 모든 백성의 무리들로 하여금 태평(太平)의 즐거움을 평안히 누리게 하였으니, 방가(邦家)의 경사(慶事)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미 비상(非常)한 즐거운 일이 있었으니, 모름지기 비상(非常)한 특이한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겠다. 천순(天順) 4년663) 9월 11일 새벽녁 이전에 모반(謀叛)·대역(大逆)한 것,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와 부모(父母)를 모살(謀殺)하거나 구매(歐罵)한 것,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謀殺)한 것, 노비(奴婢)로서 주인(主人)을 모살(謀殺)한 것, 고독(蠱毒)664) ·염매(魘魅)665) 한 것, 고의(故意)로 모의(謀議)하여 살인(殺人)한 것, 단순히 강도(强盜)를 범(犯)한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發覺)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죄를 면제(免除)한다.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서 죄주겠다. 아아! 적(賊)을 제압(制壓)하고 백성들을 평안히 하는 것은 임금 된 자의 용기이요, 은혜를 미루어 경사(慶事)를 보이는 것은 성인(聖人)의 인정(仁政)이다."
하였다.
처음에 신숙주(申叔舟)가 5진(鎭)에 우리 백성들과 오랑캐가 섞여 살기 때문에 사기(事機)가 새어나가 적(賊)이 숨어 버릴까 염려하여 무산(茂山) 역산(櫟山)의 요로(要路)를 막아서 지키도록 하고, 남쪽에서 오는 자는 반드시 신부(信符)666) 를 조사하고서 그제서야 들어가도록 허락하였다. 신숙주가 5진(鎭)을 순찰(巡察)하고서 고영(古營)에 돌아오니, 남도(南道) 군사들이 이미 부령(富寧)에 모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부서(部署)를 나누고 제장(諸將)과 사졸(士卒)들에게 맹세하여 고(告)하기를
"낭발아한(浪孛兒罕)의 부자(父子)가 오랫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나, 성덕(聖德)을 저버리고 모반(謀叛)하였으니 스스로 천벌(天罰)을 받은 것이다. 올량합(兀良哈) 등이 악(惡)한 자를 당류(黨類)로 하여 난(亂)을 일으켜서, 회령(會寧)·종성(鍾城)·부령(富寧)·경성(鏡城)에 잇달아 침범(侵犯)하였으나, 성상께서 오히려 그 무지(無知)한 것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스스로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도록 허락하여, 그들을 옛날과 같이 대접하였다. 저들이 큰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또 갑산(甲山)·단천(端川)을 침범(侵犯)해서, 전후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아 간 사람이 모두 수십 인이었고, 혹은 배를 가르고 살점을 도려내기도 하여 그 참혹(慘酷)함이 극에 달하였다. 지금 또 황제(皇帝)의 명(命)을 따르지 아니하고 장차 입구(入寇)하려고 음모(陰謀)하면서 오래 묵은 죄를 뉘우치지 않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憤慨)하는 바이다. 이것들을 주멸(誅滅)하지 않고서 어찌 나라를 위(爲)한다 하겠는가? 지금 나는 성상(聖上)의 명령을 삼가 받들어 제장(諸將)의 부서(部署)를 짜고 길을 나누어서 들어가, 바로 적(賊)의 소혈(巢穴)을 탐지(探知)할 것이니, 오로지 제장(諸將)과 사졸(士卒)들은 각각 마음을 다하고 힘을 같이하여 나라의 치욕(恥辱)을 씻도록 하라. 작은 공(功)이라도 반드시 기록할 것이며, 끝내 사대부(士大夫)들로 하여금 헛되게 봉인(鋒刃)667) 을 휘두르지 않도록 하겠다. 만약 이를 어기고 범(犯)하는 자가 있으면 군(軍)에는 상법(常法)이 있으니, 사대부(士大夫)라도 견책(譴責)을 사양할 수가 없을 것이며, 신숙주도 또한 법(法)을 굽혀서 사정(私情)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천신 지기(天神地祈)가 임(臨)하여 위에 계시니, 각자 맹세하는 말을 밝게 듣고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오익창(吳益昌)이 보병(步兵)·기병(騎兵) 8백 명을 거느리고 8월 23일에 경성(鏡城)을 출발하여 오촌(吾村)을 따라서 고개를 넘어 박가비라(朴加非剌)·상동량(上東良)을 공격하고 들어갔던 길을 따라서 돌아왔다. 영북진 절제사(寧北鎭節制使) 강순(康純)이 보병(步兵)·기병(騎兵) 9백여 명을 거느리고 27일에 부령(富寧)을 출발하여 고개를 넘어 들어가 허수라(虛水剌)를 공격하고, 강(江)을 따라 내려가 중동량(中東良)을 공격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곽연성(郭連城)과 만났다. 곽연성은 보병(步兵)·기병(騎兵) 6백 명을 거느리고, 회령진 절제사(會寧鎭節制使) 임득정(林得楨)과 안변 부사(安邊府使) 우공(禹貢)은 보병(步兵)·기병(騎兵) 1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온성진 절제사(穩城鎭節制使) 김처지(金處智)는 보병(步兵)·기병(騎兵) 6백 명을 거느리고 회령(會寧)에 모여 양정(楊汀)의 지휘를 들었는데, 양정은 세 장수를 거느리고 27일에 회령(會寧)을 출발하여 보아하(甫兒下)에 이르러 곽연성으로 하여금 딴 길로 강(江)을 따라 올라가 하동량(下東良)을 공격하고 강순과 만나서 편도(便道)668) 를 따라 돌아오게 하였으며, 운두성(雲頭城)에 이르러 임득정·우공으로 하여금 먼저 강(江)을 건너가서 하다리(何多里)·사지(斜地)·무아계(無兒界)·여포(廬包)를 공격하고 하아안(河兒安)·하주(河主)에 이르게 하였으며, 양정 자신은 영병(營兵) 6백 명을 거느리고 김처지(金處智)를 데리고 강(江)을 건너서 하다리(何多里)를 따라 남라귀(南羅貴)를 거쳐서 진군(進軍)하여 임득정을 성원(聲援)하였으며, 화상리(和尙里)에 이르러 김처지(金處智)로 하여금 딴 길로 서쪽으로 올라가서 임득정과 하아안(河兒安)·하주(河主)를 협공(夾攻)하고 벌인(伐引)의 강물을 따라서 내려가게 하였으며, 양정도 진군(進軍)하여 모리안(毛里安)을 공격하고 임득정 등과 만났다.
신숙주(申叔舟) 자신은 보병(步兵)·기병(騎兵) 4천 명을 거느리고 27일에 종성(鐘城)을 출발하였는데, 그때 니마차 올적합(尼麻車兀狄哈) 우두(亐豆) 등 5인과 남눌 올적합(南訥兀狄哈) 가아타합(加兒打哈) 등 2인이 마침 조현(朝見)하러 종성(鍾城)에 이르렀다가 모두 종군(從軍)하여 스스로 충성을 다하였다. 신숙주가 강(江)을 건너 수주(愁州)를 따라 고개를 넘어서, 먼저 강효문(康孝文)를 보내어 1백 기(騎)를 거느리고 하이란(河伊亂)을 선공(先攻)하게 하고, 따로 한성부 윤(漢城府尹) 김사우(金師禹)를 보내어 북청 부사(北靑府使) 조방림(趙邦霖)을 데리고 1천 기(騎)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상가하(常家下)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김계손(金繼孫)이 경원 절제사(慶源節制使) 김귀손(金貴孫)을 데리고 1천 기(騎)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보리하(甫里下)를 공격하였으며, 신숙주도 홍윤성(洪允成)·이극배(李克培)·정식(鄭軾)·허형손(許亨孫)과 종성진 절제사(鍾城鎭節制使) 박형(朴炯)·행 호군(行護軍) 박대생(朴大生)을 데리고 2천 기(騎)를 거느리고 아치랑귀(阿赤郞貴) 대천(大川)의 숲을 끼고 자주 좌우에서 공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급히 2백여리를 행군(行軍)하여 아치랑귀(阿赤郞貴) 상리(上里)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녘 치중(輜重)669) 으로서 뒤에 있는 것이 거리가 멀므로, 허형손·박대생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물러가서 치중(輜重)을 호위하게 하였다. 신숙주는 또한 소재(所在)한 곳에다 영(營)을 쳤는데, 김계손(金繼孫)이 이미 보이하(甫伊下)를 공격하고 와서 만났다. 적(賊)이 밤을 틈타서 4면에서 공격하여 교란(攪亂)하므로 신숙주가 진(陣)을 굳게 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활을 잘 쏘는 자로 하여금 방패를 가지고 영(營) 밖으로 나가서 번갈아 쏘게 하니, 적(賊)이 많아 화살에 맞고 그제서야 도주(逃走)하였다. 29일에 박형(朴炯)·김귀손(金貴孫)으로 하여금 정병(精兵) 5백 기(騎)를 뽑아서 진군(進軍)하여 모리안(毛里安)을 공격하고 양정 등과 만나 지름길로 회령(會寧)에 돌아오게 하였고, 신숙주는 영(營)으로 돌아왔다. 허형손(許亨孫)이 주둔(駐屯)한 곳에 적(賊)이 길에서 요격(邀擊)670) 하므로, 이를 공격(攻擊)하여 패주(敗走)시켰고, 김사우도 전(前) 1일에 이미 상가하(常家下)를 공격하고 돌아와 허형손과 만나서 주둔하였다. 이날 저물녘에 비가 오고 또 천둥이 치니, 적(賊)들이 4면에서 공격하여 교란하므로, 또 활을 잘 쏘는 자들로 하여금 영(營)을 나가서 쏘게 하니, 적(賊)들이 많이 화살에 맞고 그제서야 도주(逃走)하였다. 30일에 신숙주의 전 군사가 종성(鍾城)으로 돌아왔는데, 적(賊)들이 혹은 요격(邀擊)하기도 하고 혹은 미격(尾擊)671) 하기도 하였는데, 김사우·김계손·강효문이 종일 비를 무릅쓰고 힘껏 싸워서 이를 패주(敗走)시키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양정이 신숙주의 지휘을 어기고 임득정으로 하여금 먼저 진군(進軍)하여 스스로 하다리(何多里)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니, 임득정의 군사들이 양정의 군사들에게 길을 막히게 되어서 진군할 수가 없었다. 사지(斜地)에 이르러 임득정이 경기(輕騎)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진군하니, 오익창(吳益昌)이 오촌(吾村)의 길이 험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돌아와 양정을 따라 진군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남다른 공(功)을 세워 속죄(贖罪)하고자 하여 50여 기(騎)를 거느리고 임득정을 따라갔다. 29일에 〈양정이〉 임득정 등의 나머지 군사들을 아울러 거느리고 지름길로 회령(會寧)에 돌아왔다. 박형 등이 모리안(毛里安)을 공격하는데 임득정이 이르지 않아, 곧 남라귀(南羅貴)를 경유하면서 곳곳에서 비를 무릅쓰고 고전(苦戰)하였다. 30일에 전 군사들이 회령(會寧)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임득정은 여포(慮包)·하아안(河兒安)·하주(河主)·벌인(伐引)을 공격하고 강물을 따라 내려와서 아치랑귀(阿赤郞貴)에 이르니, 적이 곳곳에서 요격(邀擊)하므로 산길을 따라서 오는데, 오익창의 화살에 맞아 도주(逃走)하다가 죽었으며, 땅이 진창이 많고 비도 또한 그치지 않았다. 30일에 수주(愁州) 고성(古城)에 이르니, 서쪽으로 종성(鍾城)과의 거리가 50여 리였는데 산(山)을 의지하여 진(陣)을 쳤으나, 군사들이 스스로 놀라서 밤에 흩어져 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으로 뿔뿔이 달아났다. 신숙주가 제장(諸將)과 더불어 강(江)을 따라서 병사들을 포진(布陣)시켜 응접(應接)하였다. 9월 초4일에 임득정이 길주 판관(吉州判官) 하숙부(河叔溥)와 군관(軍官) 이중결(李仲潔)·홍계용(洪繼庸)과 군사(軍士) 5인을 데리고 종성(鍾城)으로 돌아왔는데, 군사로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20여 인이었다. 곽연성이 허수라(虛水剌)·하(下)·중동량(中東良)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많았으며, 29일에 전 군사가 회령(會寧)으로 돌아왔는데, 군사로서 돌아오지 못한 것은 상동량(上東良)·박가비라(朴加非剌)의 수십 집[家]뿐이었다. 회령(會寧) 성저(城底)의 아목하(阿木河)·올롱초(兀弄草)와 수주(愁州) 이하에 사는 야인(野人)들이 옛날같이 평안하게 거주하였고, 혹은 종군(從軍)하여 향도(鄕導)672) 가 된 자도 있었다. 신숙주가 양정·임득정·오익창 등이 군율(軍律)을 어기었다고 하여 상서(上書)하여서 자책(自責)하기를
"신이 처음에 양정 등이 혹시 진군(進軍)하다가 퇴각(退却)함이 있을까 염려하여 각각 그 나가는 도리(道理)의 원근(遠近)과 험이(險夷)와 부락(部落)의 다소(多少)를 지도(地圖)를 보고서 일일이 가르쳐 주고 삼령 오신(三令五申)673) 하였으며, 또한 각각 맹세하는 글을 만들어 거듭 써서 내려 주도록 하였는데, 뜻하지도 않게 양정이 먼저 지휘를 어기었고, 임득정·오익창이 경솔히 진군(進軍)하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질(蹉跌)은 실로 신(臣)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신이 다시 5진(鎭)을 순행(巡行)하면서 제장(諸將)에게 수어(守禦)할 방략(方略)을 나누어 주고 서울에 돌아가서 대죄(待罪)하겠습니다."
하니, 명하여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홍일동(洪逸童)을 함길도 선위사(咸吉道宣慰使)로 삼고, 종부 소윤(宗簿少尹) 신면(申㴐)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였다. 어찰(御札)로 신숙주에게 이르기를,
"지금 경의 계본(啓本)을 보니 심히 기쁘다. 경이 부서(部署)를 나눈 것이 적의(適宜)하였으며, 기회(機會)를 놓치지 아니하고 길을 나누어 깊이 들어가 적의 굴혈(窟穴)을 불태워 없애어서 변방 백성들의 해묵은 분한(憤恨)을 능히 씻었으니, 이정(李靖)674) 의 공(功)만이 어찌 홀로 훌륭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경은 양정이 영(令)을 어기었고, 임득정이 군율(軍律)을 어기었다고 하여 상장(上章)675) 하여 자책하지만, 그러나 한번 이기고 한번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흔한 형세이니, 어찌 족히 개의(介意)하겠는가? 경이 이미 전 군사를 데리고 개선(凱旋)하여 돌아왔으니, 위엄(威嚴)이 북방(北方)에 떨치어서 나의 뜻에 부응(副應)하였는데, 어떤 일이 이와 같이 좋을 수 있겠는가? 지금 특별히 선위사(宣慰使) 홍일동(洪逸童)을 보내어 경에게 표리(表裏) 3벌을, 홍윤성(洪允成)에게 표리(表裏) 2벌을 내려주고, 또 표리(表裏) 15벌을 보내 주니, 경이 그것을 제장(諸將)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또 경 등에게 잔치를 내려주니 경이 제장(諸將)과 더불어 한번 즐기도록 하라. 논공 행상(論功行賞)은 마땅히 경이 보고하기를 기다리겠으니, 경은 천천히 〈이 일을〉 하고서 오도록 하되, 반드시 순수(巡狩)할 때까지 행할 필요는 없다. 양정의 죄는 진실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다른 예(例)의 공신(功臣)이 아니고, 또 오랫동안 북방(北方)을 진무(鎭撫)한 공(功)도 많은 까닭에, 내가 이미 그 공(功)을 기록하고 그 죄를 용서하였으니, 경도 마땅히 그를 풀어주도록 하라. 경의 아들 신면이 경을 뵙고자 하므로 역마를 주어 내려 보내어서 어버이를 보살피려는 뜻을 이루게 하니, 경은 나의 뜻을 알라."
하고, 또 종이의 끝에다 쓰기를,
"경이 비록 나를 보고 웃었지만, 나의 박[瓢]이 이미 이루었졌으므로, 쪼개어서 술잔을 만들어 지극한 정을 보인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홀로 신숙주를 교태전(交泰殿)에서 인견(引見) 정토(征討)할 계책(計策)을 결정하던 날, 담장 아래 심은 박이 바야흐로 덩굴이 지니, 신숙주가 술에 취하여 박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겠다고 아뢰었었다. 이러한 연고 때문에 이를 희롱(戲弄)한 것이었다. 또 유시(諭示)하기를
"이미 승리하였다고 교만(驕慢)하면 반드시 나태(懶怠)해질 것인데, 이것이 적들이 우리를 엿볼 수 있는 기회이며, 대군(大軍)이 이미 돌아왔으므로 저들이 반드시 방비를 늦출 것이니, 이것이 우리가 적(賊)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다. 경은 반드시 이를 생각할 것이니, 내가 어찌 여러 말을 하겠는가? 며칠 말[馬]을 쉬게 하였다가 홀연히 다시 정복(征服)하되, 경기(輕騎)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유린(蹂躙)한다면 적(賊)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거의 수십년간 다시 세력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경이 다시 잘 생각하여 온전한 계책으로서 움직이라."
하고, 어서(御書)로 종이의 끝에다 쓰기를,
"나에게 구애되어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나는 단지 그 뜻을 보일 뿐이다."
하고, 또 유시하기를
"영북진(寧北鎭)의 일을 경은 어떤 모양으로 포치(布置)하는가? 이곳은 바로 요해지(要害地)이니 모름지기 마땅히 급히 설치하여야 하는데, 다만 형편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다, 경이 마땅히 임의대로 시행하고서, 뒤따라 계달(啓達)하도록 하라."
하고, 어찰(御札)로 양정(楊汀)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경이 어찌하여 신숙주의 지휘를 어기고, 임득정(林得楨)으로 하여금 패배(敗北)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경이 진실로 책임이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은 다른 예(例)의 공신(功臣)이 아닌데다가 또 오랫동안 북방(北方)을 진무(鎭撫)하였으니, 경의 고생한 것을 생각하여 지금 비록 군율을 어기었더라도 내가 어찌 허물하겠는가? 이에 특별히 선위사(宣慰使)를 보내어, 경에게 표리(表裏) 2벌을 내려 주고, 또 잔치를 내려 주며 경의 공(功)을 기록하고 경의 죄(罪)를 용서하니, 경은 그것을 몸받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417면
- 【분류】외교-야(野)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군사-군정(軍政) / 사법-행형(行刑)
- [註 659]삭방(朔方) : 북방(北方).
- [註 660]
동하(東夏) : 동쪽에 있는 문명(文明)의 나라. 곧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말임.- [註 661]
원신(元臣) : 원로 대신(元老大臣).- [註 662]
첩서(捷書) : 첩보(捷報)의 글.- [註 663]
천순(天順) 4년 : 1460 세조 6년.- [註 664]
고독(蠱毒) : 뱀·지네·두꺼비 등의 독이 든 음식을 남에게 먹여 배앓이·가슴앓이·토혈(吐血)·하혈(下血)·부종(浮腫)의 증세를 일으켜 점차 미치거나 실신(失身)하여 죽게 하는 것.- [註 665]
염매(魘魅) : 주문(呪文)이나 저술(詛術)로 남을 저주하여 죽게 만드는 것. ‘염(魘)’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쇠꼬챙이로 심장을 찌르고 눈을 후벼파고 손발을 묶는 것이고, ‘매(魅)’는 나무나 돌로 귀신을 만들어 놓고 저주를 비는 것임.- [註 666]
신부(信符) : 대궐에 드나드는 일정한 하예(下隷)에게 병조(兵曹)에서 내어 주는 문표.- [註 667]
봉인(鋒刃) : 창·칼 같은 무기를 말함.- [註 668]
편도(便道) : 지름길.- [註 669]
치중(輜重) : 군사들의 가볍고 무거운 짐.- [註 670]
요격(邀擊) :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치는 것.- [註 671]
미격(尾擊) : 뒤에서 치는 것.- [註 672]
향도(鄕導) : 군대를 인솔해 가는 데 길을 인도하는 관원.- [註 673]
삼령 오신(三令五申) : 세 번 호령하고 다섯 번을 거듭 말함. 곧 군대에서 되풀이하여 자세히 명령함.- [註 674]
이정(李靖) : 중국 당(唐)나라 때의 유명한 무장. 위국공(衛國公)으로 북적(北狄)을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음.- [註 675]
상장(上章) : 상서(上書).○甲申/咸吉道都體察使申叔舟遣軍官金嶠、黃守正啓: "臣與諸將分道攻討, 窮其窟穴而還, 勦殺四百三十餘級, 焚蕩室廬九百餘區, 財産俱盡, 殺獲牛馬千餘。" 上喜賜嶠段衣守正紬衣各一領及弓箭。 命以平定北方, 告宗廟, 御勤政殿, 百官上箋陳賀。 箋曰:
天威震動, 群醜畢潛。 馹報星馳, 輿情擧賀。 歡均朝野, 慶綿宗祊。 恭惟乃聖乃神, 允文允武, 撫重熙之區宇, 奄殊俗以梯航。 蕞爾殘兇, 梗于聖化, 敢構釁而嘯聚, 遂秉間而陸梁。 運九重之神謀, 整我貔虎, 授萬全之勝算, 掃彼犬羊。 屬奏三捷之功, 咸服一怒之勇。 伏念臣等猥將樗質, 叨居鼎司。 蹈之舞之, 情倍深於鼇抃, 悠也久也, 壽恒祝於龜疇。
御札下敎赦中外。 敎曰:
天地之道, 一於生成, 而又有肅殺之時, 帝王之德, 一於仁愛, 而又有威振之擧。 我太祖康獻大王起自朔方, 奄有東夏, 列聖承襲。 凡所以撫恤野人者, 視諸方尤篤。 迨予承緖, 諸種野人莫不來朝, 窮髮殊俗, 稽顙不暇。 不意浪孛兒罕構釁邊將, 自就誅戮。 其中好亂者, 交黨阿比車, 累犯邊境, 邊將鍊兵坐甲, 屢請師期。 予念祖宗綏遠之仁、前世歸附之誠, 屢勑邊將, 更加撫恤, 以待自悔。 頑兇之徒, 不思彌天之恩, 日益梟獍, 邊民受毒。 予代天理物, 作民父母, 其可視而不之恤乎? 是用申命元臣, 往董師旅, 分道竝進, 焚蕩窟穴。 乃於今月十一日, 咸吉道都體察使申叔舟捷書馳啓。 "諸將凱還, 賊巢皆空", 此實祖宗威神之所佑。 邊塵永息, 使元元之衆, 安享太平之樂, 邦家之慶, 莫大於斯。 旣有非常之喜事, 須有非常之異恩。 自天順四年九月十一日昧爽以前, 除謀叛、大逆、子孫謀殺歐罵祖父母父母、妻妾謀殺夫、奴婢謀殺主、蠱毒、魘魅、謀故殺人、但犯强盜外,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制敵安民, 王者之勇, 推恩示慶, 聖人之仁。
初, 叔舟以五鎭民虜雜處, 慮事洩賊遁, 令把截茂山、櫟山要路, 自南來者, 須驗符乃許入。 叔舟巡察五鎭, 還到古營, 南軍已集富寧, 部分諸軍, 誓告將士曰:
浪孛兒罕父子久蒙國恩, 背德謀叛, 自罹天討。 兀良哈等黨惡構亂, 連犯會寧、鍾城、富寧、鏡城, 上猶憐其無知, 許其自新, 待之如舊。 彼不念大恩, 又犯甲山、端川, 前後殺虜凡數十人, 或剖腹割肌, 極其慘酷。 今又不順帝命, 將謀入寇, 稔惡不悛, 神人所共憤。 此而不誅, 何以爲國? 令我祗承上命, 部署諸將, 分道而入, 直探賊穴, 惟諸將士卒各盡心力, 同雪國恥。 小功必錄, 終不使士大夫虛勞鋒刃。 如有違犯, 軍有常法, 士大夫不得辭責, 叔舟亦不得曲法徇私。 天神地祇臨之在上, 其各明聽誓辭, 毋忽。
令吉州牧使吳益昌領步騎八百, 八月二十三日發鏡城, 從吾村踰嶺, 入攻朴加非剌、上東良, 從入路而還。 寧北鎭節制使康純領步騎九百, 二十七日發富寧, 踰嶺入攻虛水剌, 沿江而下, 攻中東良, 與吏曹參判郭連城會, 連城領步騎六百, 會寧鎭節制使林得楨、安邊府使禹貢領步騎一千三百, 穩城鎭節制使金處智領步騎六百, 會于會寧, 聽楊汀節度, 汀率三將, 二十七日發會寧, 至甫兒下。 令連城別路, 沿江而上, 攻下東良, 與純會從便道而還, 至雲頭城, 令得楨、貢先渡江攻何多里、斜地、無兒界、廬包, 抵河兒安ㆍ河主。 汀自領營兵六百, 率處智渡江, 從何多里, 由南羅貴而進, 爲得楨聲援, 至和尙里, 令處智別路西上, 與得楨來攻河兒安、河主, 沿伐引水而下, 汀進攻毛里安, 與得楨等會。 叔舟自以步騎四千, 二十七日發鍾城, 時尼麻車兀狄哈 亏豆等五人、南訥兀狄哈 加兒打哈等二人適以朝見到鍾城, 皆從軍自効。 叔舟渡江, 從愁州踰嶺, 先遣康孝文, 領百騎先攻河伊亂, 別遣漢城府尹金師禹, 率北靑府使趙邦霖, 領千騎西攻常家下。 江原道觀察使金繼孫率慶源節制使金貴孫, 領千騎東攻甫里下。 叔舟率洪允成、李克培、鄭軾、許亨孫、鍾城鎭節制使朴炯、行護軍朴大生領二千騎來, 阿赤郞貴、大川、(林數)〔林藪〕 左右而攻焚之, 疾行二百餘里, 至阿赤郞貴上里, 日晩, 輜重在後者遠, 令亨孫、大生分兵退護輜重。 叔舟亦於所在下營, 繼孫旣攻甫伊下來會。 賊乘夜四面攻撓之, 叔舟堅陣不動, 令善射者, 持盾出營外迭射之, 賊多中箭乃走。 二十九日, 令炯、貴孫選精騎五百, 進攻毛里安, 與汀等會, 徑還會寧。 叔舟還營, 亨孫所屯處, 賊邀之於路, 擊走之, 師禹前一日旣攻常家下, 還與亨孫會屯。 是日晩大雨且雷, 賊回面攻撓之, 又令善射者, 出營射之, 賊多中箭乃走。 三十日叔舟全師還鍾城, 賊或邀之, 或尾之。 師禹、繼孫、孝文終日冒雨, 力戰走之, 多所殺獲。 汀違叔舟節度, 不令得楨先進自攻何多里, 得楨軍爲汀軍所扼塞, 不得進。 至斜地, 得楨率輕騎百餘先進, 吳益昌以吾村路險, 不得入, 還從汀而進, 至是欲立奇功贖罪, 率五十餘騎隨得楨。 二十九日幷領得楨等餘軍, 徑還會寧。 炯等攻毛里安, 〈得〉楨不至, 乃由南羅貴處處冒雨苦戰。 三十日全師得達會寧, 得楨攻廬包、河兒安、河主、伐引, 沿水而下, 至阿赤郞貴, 賊處處邀擊之, 從山路而行, 益昌中箭走死, 地多泥濘, 雨且不止。 三十日到愁州古城, 西距鍾城五十餘里, 依山而陣, 軍自驚, 夜散散出會寧、鍾城、穩城。 叔舟與諸將沿江布兵應接。 九月初四日, 得楨率吉州判官河叔溥、軍官李仲潔、洪繼庸及軍士五人, 還到鍾城, 軍未還者二十餘人。 連城攻虛水剌、下ㆍ中東良, 多所殺獲。 二十九日全師還會寧, 軍所不至者, 上東良 朴加非剌數十家耳。 會寧城底阿木河、兀弄草及愁州以下野人按堵如舊, 或有從軍嚮導者。 叔舟以汀、得楨、益昌等失律, 上書自劾曰: "臣初慮汀等或有進却, 各其所出道里遠近險夷, 部落多少, 臨地圖一一指授, 三令五申, 又各爲誓書, 申令書授, 不意汀首違節度, 得楨、益昌輕進失道。 然此蹉跌, 實由於臣, 臣更巡五鎭, 分授諸將, 守禦方略, 還京待罪。" 命行僉知中樞院事洪逸童爲咸吉道宣慰使, 令宗簿少尹申㴐從行。 御札諭叔舟曰:
今得卿啓甚喜。 卿部分得宜, 不失機會, 分道深入, 焚蕩窟穴, 克雪邊民積年之憤, 李靖之功, 焉能獨美? 但卿以楊汀違令, 林得楨失律, 上章自劾, 然一勝一負, 兵家常勢, 何足介懷? 卿旣全師凱還, 威振北方, 以副予意, 何善如之? 今特遣宣慰使洪逸童, 賜卿三表裏, 洪允成二表裏, 又送表裏十五, 卿其分與諸將。 又賜卿等宴, 卿與諸將一歡焉。 論功行賞, 當待卿報, 卿徐徐有爲而來, 不必及巡狩行也。 楊汀之罪, 固當治之, 然非他例功臣, 且有久鎭北方之功多, 故予已錄其功, 而赦其罪, 卿宜釋之。 卿子㴐欲謁卿給馹下送, 以遂省親之志, 卿知予意。
又書紙尾曰: "卿雖笑我, 我瓢旣成, 剖而爲杯, 以示至情。" 先是, 上獨引叔舟於交泰殿, 決計征討之日, 墻下種瓢方蔓, 叔舟醉啓瓢終不成, 以故戲之。 又諭曰: "旣勝而驕則必怠, 此賊乘我之機也, 大軍旣旋, 彼必弛備, 此我乘賊之機也。 卿必慮之, 予何多言? 數日息馬, 倐然復征, 輕騎蹂踐如電如雷, 則賊之喪膽, 殆非數十年復振矣, 卿更熟思, 以全而動。" 御書紙尾曰: "勿拘於予而輕動, 予但示其意耳。" 又諭曰: "寧北鎭事卿何樣布置乎? 此正要害之地, 須當急設, 但未知形勢如何耳。 卿宜任意而行, 從後啓達。" 御札諭楊汀曰: "卿何違申叔舟節度, 使林得楨敗衂耶? 是卿固有責矣。 雖然卿非他例功臣, 而且久鎭北方, 思卿艱苦, 今雖失律, 予豈過焉? 玆特遣宣慰使, 賜卿二表裏, 又賜宴, 錄卿之功, 赦卿之罪, 卿其體予。"
- 【태백산사고본】 8책 2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417면
- 【분류】외교-야(野)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군사-군정(軍政) / 사법-행형(行刑)
- [註 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