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 한을이 대마주 태수의 서계를 가지고 와서 아뢰다
왕세자(王世子)가 장차 양전(兩殿)003) 에게 잔치를 올리려 하여 잔치의 찬구(饌具)가 이미 준비되었는데, 일본국 통신사(日本國通信使) 송처검(宋處儉)이 데리고 갔던 선군(船軍) 한을(韓乙)이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성직(宗盛職)과 수호 대관(守護代官) 종 우마조 성직(宗右馬助盛直)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송처검과 부사(副使) 이종실(李宗實)과 서장관(書狀官) 이근(李覲) 등 1백여 인이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10월 초8일 새벽에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使臣)의 배 2척과 대마도(對馬島) 왜선(倭船) 2척과 함께 출발하였으나, 그날 낮에 큰 풍랑(風浪)을 만나서 송처검·이근 등이 탄 배는 표류(漂流)하여 간 곳을 알지 못하고, 이종실 등 90여 인이 탄 배는 급류(急流)를 만나 전복(顚覆)하여 패몰(敗沒)하고, 이종실 등 5인은 목판(木板)을 부여잡고 표박(漂泊)하여 또한 간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신(臣)은 널판자 하나를 휘어잡아 죽지 않을 수 있었고, 다음날 대마도(對馬島)에 표류하여 도달하였으나, 춥고 굶주려 빈사(濱死) 지경이었는데, 도주(島主) 종성직(宗盛職)에게 고(告)하여 약이(藥餌)로 돌보아 줌을 받았습니다. 또 옷과 갓[笠]을 주고 섬에서 여러 달 동안 머물러 있게 하다가, 피고여문(皮古汝文)을 시켜서 데리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왜선(倭船)들은 대마도(對馬島)에 정박(碇泊)하고 있었는데, 처음에 송처검이 가지고 간 군량미(軍糧米) 40여 석(石)을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의 배에 싣도록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한을이 싣고 돌아왔다. 임금이 이를 애도(哀悼)하여 드디어 명하여 잔치를 정지시키고, 연수(宴需)004) 를 승정원(承政院)과 진무소(鎭撫所)의 입직(入直)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통신사(通信使)의 배가 패몰(敗沒)되었다니,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마땅히 바닷가의 여러 고을에 유시(諭示)하여 그 시체를 수색(搜索)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한을의 말을 듣고서 갑자기 조치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조관(朝官)을 보내어 시체를 수색하고, 겸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7책 36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외교-왜(倭)
○辛巳/王世子將進宴于兩殿, 宴具已備, 日本國通信使宋處儉帶去船軍韓乙齎對馬州太守宗盛職、守護代官宗右馬 助盛直書契來啓: "處儉與副使李宗實、書狀李覲等百餘人, 分騎三船, 十月初八日曉, 與日本國王使臣船二艘、對馬島 倭船二艘俱發, 日午遭大風, 處儉、覲等所騎船漂流不知所之, 宗實等九十餘人所騎船, 中流覆沒, 宗實等五人扶得木板漂泊, 亦不知所之。 唯臣攀一板得不死, 翼日漂到對馬島, 凍餒濱死, 告蒙島主宗盛職藥餌調護。 又給衣笠, 留島數月, 令皮古汝文帶還。" 其倭船則泊于對馬島, 初處儉所齎軍糧四十餘石, 請載于國王使船。 至是竝韓乙載還。 上悼之, 遂命停宴, 分賜宴需于承政院、鎭撫所入直軍士。 議政府啓: "今聞通信使船敗, 不勝驚悼。 宜諭沿海諸邑令索其屍。" 傳曰: "予聞韓乙之言, 頓無得之之理。 然遣朝官索屍兼致祭焉。"
- 【태백산사고본】 7책 1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7책 36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