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조실록 17권, 세조 5년 9월 10일 기축 3번째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지돈령부사 강석덕의 졸기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이 졸(卒)하니, 임금이 쌀·콩 아울러 20석(石), 종이 1백 권, 관곽(棺槨)·유둔(油芚) 등의 물건을 부의(賻儀)로 내려 주었다. 강석덕(姜碩德)의 자(字)는 자명(子明)이고, 진주(晉州) 사람이다. 음직(蔭職)으로 계성전 직(啓聖殿直)에 임명되고, 여러 번 양근 군사(陽根郡事)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치적(治績)이 제일(第一)이었다. 인수부 소윤(仁壽府少尹)으로 천직(遷職)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승진되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형조 참판(刑曹參判)·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역임(歷任)하고는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청렴하고 강개(慷慨)하고 고매(高邁)하며, 옛것을 좋아하였다. 과부(寡婦)가 된 어미를 섬겨서 지극히 효도했으며, 배다른 형제(兄弟)를 대우하여 그 화목을 극진히 하였다. 일찍이 그 아들 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에게 말하기를,

"내가 먹은 나이가 60세가 되었는데, 비록 공리(功利)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했지마는 일을 행하는 데 권모(權謀)와 사기(詐欺)가 없었으니, 스스로 반성(反省)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생각할 적엔 다스리는 방법이 매우 주밀(周密)했으며, 집에 거처할 적엔 좌우(左右)에 도서(圖書)를 비치(備置)하고는 향(香)불을 피우고 단정히 앉았으니, 고요하고 평안하여 영예를 구함이 없었다. 손수 ‘징분질욕(懲忿窒慾)599) ’이란 네 개의 큰 글자를 써서 좌석의 곁에 붙여두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전서(篆書)·예서(隷書)·팔분(八分)600) 의 글씨가 모두 정묘(精妙)하였으며, 시(詩)는 간결(簡潔)하고 단아(端雅)한 것을 근본으로 삼아 반드시 옛날 사람의 법도(法度)에 맞아야만 그제야 발표하였다. 병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또한 여러 아들로 하여금 글을 읽게 하고는 이를 듣고 있었다. 시호(諡號)가 대민(戴敏)이니, 전례(典禮)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대(戴)이고, 옛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는 것이 민(敏)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7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347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예술-미술(美術) / 인사(人事)

  • [註 599]
    징분질욕(懲忿窒慾) : 분노(忿怒)를 참고 사욕(私慾)을 억제함.
  • [註 600]
    팔분(八分) : 예서(隷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을 섞어서 만든 한자(漢字)의 서체.

○知敦寧府事姜碩德卒。 賜賻米豆幷二十石、紙一百卷、棺槨、油芚等物。 碩德子明, 晋州人。 蔭補啓聖殿直, 累除楊根郡事, 治爲第一。 遷仁壽府少尹, 陞司憲執義, 進承政院同副承旨, 歷戶曹參判、司憲府大司憲、吏ㆍ刑二曹參判、開城留守, 入拜知敦寧府事。 碩德性淸廉、慷慨、高邁, 好古事。 寡母至孝, 待異母兄弟, 極其和睦。 嘗語其子希顔希孟曰, "吾行年六十, 雖無功利之及人, 行事無權詐, 則自反無愧矣。" 居官慮事, 綱理甚密, 處家則左右圖書, 焚香端坐, 澹然無營。 手作 ‘懲忿窒慾’ 四大字貼座右, 手不釋卷。 篆ㆍ隷ㆍ八分墨戲俱妙, 詩以簡雅爲宗, 必中古人矩度乃發。 至疾亟, 亦令諸子讀書聽之。 諡戴敏: 典禮不愆 ‘戴’, 好古不怠 ‘敏’。


  • 【태백산사고본】 6책 17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347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예술-미술(美術)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