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 4월 8일 기미 1번째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서를 받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勅使)를 맞이하고는, 근정전(勤政殿)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받고 행례(行禮)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요사이 변장(邊將)의 주보(奏報)에 듣건대, ‘건주(建州) 삼위(三衛)의 도독(都督) 고납합(古納哈)동산(童山) 등이 사사로이 왕(王)의 나라에 나아가서 상사(賞賜)를 갖추 얻어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이것을 비록 전하는 말로 들었지만 반드시 형적(形迹)이 의심할 만한 것이 있다. 더구나 국왕(國王)은 〈중국〉 조정의 동번(東藩)167) 이 되어 왕의 선대(先代) 이래로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敦篤)히 하고 예의(禮義)를 공손히 지켜서 일찍이 사사로이 외인(外人)과 더불어 교통(交通)하지 않았는데, 어찌 왕에 이르러 이런 일이 있는가? 이제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개유(開諭)하니, 왕은 마땅히 스스로 반성(反省)하여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마는,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왕은 속히 이를 고쳐야 한다. 만약 저들이 스스로 오더라도 또한 마땅히 거절하여 각기 본분(本分)을 편안히 하고 각기 경토(境土)를 지키자고 타일러서 혹시 스스로 불안(不安)한 상태를 만들어 후회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왕에게 있어서는 더욱 마땅히 예절을 지키고 법을 지켜서 혐의(嫌疑)을 멀리 끊으며 전열(前烈)168) 을 계승하여 좋은 명성(名聲)을 보전해야 할 것이니 왕은 이를 삼가라."

하였다. 임금이 전(殿)에 올라가서 진가유(陳嘉猷)와 더불어 행례(行禮)하고, 또 왕월(王軏)에게 행례(行禮)하려고 하니, 진가유(陳嘉猷)가 말하기를,

"왕 서반(王序班)은 부사(副使)가 아니고 곧 흠차 통사(欽差通事)169) 이니, 같이 행례(行禮)하는 것은 불가(不可)합니다."

하였다. 왕월(王軏)이 남쪽 가까이에서 서북(西北)을 향하여 행례(行禮)하니, 임금이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하였다. 왕월(王軏)이 빨리 걸어서 나가니, 임금이 진가유(陳嘉猷)와 더불어 다례(茶禮)170) 를 행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에게 명하여 동랑(東廊)에 나아가서 왕월(王軏)과 더불어 다례(茶禮)를 행하게 하였다. 진가유(陳嘉猷)왕월(王軏)로 하여금 말을 전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야인이 변장(邊將)에게 보고한 것을 변장이 사람을 시켜 복심(覆審)하여 아뢴 까닭으로 이런 칙서(勅書)가 있은 것입니다. 귀국(貴國)은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고 전하(殿下)께서 현명(賢明)하신 것은 천하가 함께 알고 있습니다. 요사이 바다에 표류(漂流)한 전량(錢糧)을 운반하고 인구(人口)를 해송(解送)하였고, 일본(日本)의 조현(朝見)도 또한 아울러 주달(奏達)하니, 〈중국〉 조정에서 전하의 충성을 매우 기뻐하고 있는데, 지금 듣건대, 고납합(古納哈)동창(童倉) 및 여러 야인(野人) 관직을 받고 또 궁검(弓劍)과 안마(鞍馬)171) 를 받았다고 하니, 이 때문에 의심을 하는 것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하(金何)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기를,

"지금 칙지(勅旨)를 보고, 또 대인(大人)의 가리킴을 받고 상세히 알았으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숨기겠는가? 고납합(古納哈)동창(童倉) 등은 일찍이 본국(本國)의 관직을 받았다. 이만주(李滿住)의 아들 4, 5인은 자주 내왕(來往)하였는데, 그 아들 1인은 지난달에도 왔다가 돌아갔다. 이 무리들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과 다름이 없으니, 만약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곧 변방에 흔단(釁端)이 발생하게 될 것이므로 부득이 이들을 대우해 온 것이다."

하니, 진가유(陳嘉猷)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도 또한 이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쉽사리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은 짐승과 같아서 관직을 받았는데도 명년에 관직을 받으려고 하여 욕심이 한이 없는 것은 〈중국〉 조정에서도 아는 바이나, 다만 〈중국〉 조정의 의도(意圖)는 이 두 사람이 일찍이 〈중국〉 조정의 도독(都督)의 직사(職事)를 받았는데 전하(殿下)께서 또 관직을 더 주신다면 도리에 미안(未安)하게 되니, 다만 이 한 가지 절차 뿐입니다. 지금 주본(奏本)에 ‘모인(某人)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와서 모직(某職)과 모모(某某)의 상물(賞物)을 받고서 모일(某日)에 돌아갔다.’고 명백히 갖추어 주문(奏聞)한다면 중국 조정에서 마땅히 저 사람들에게 신칙(申勅)하여 다시는 교통(交通)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감히 다시 오지 못한다면 곧 이것은 조선(朝鮮)의 복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듣건대, 그들이 모두 와서 거주하기를 희망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이만주(李滿住)의 아들 이두리(李豆里)가 요사이 이곳에 와서 거주하기를 원했으나, 들어 주지 않고 돌려보냈다."

하였다. 진가유(陳嘉猷)가 말하기를,

"주본(奏本)에도 또한 모름지기 명백히 갖추어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대인(大人)의 지시와 같이 하나하나 갖추어 주문(奏聞)하겠다. 또 우리 나라는 서북(西北)쪽은 야인(野人)과 연해 있고, 동남(東南)쪽은 왜인(倭人)과 가깝게 있다. 일본국(日本國)은 서로 거리가 멀어서 왕래가 드물지만, 대마도(對馬島)·일기도(一岐島)·패가대도(霸家臺島)등 3섬의 왜인(倭人)이 자주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키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부득이하여 그들의 토색(討索)172) 에 따라 쌀과 베[布]를 주니 번거로운 비용이 적지 않은데,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의 세세한 일을 어찌 알겠는가? 지금 야인(野人)을 응접(應接)하는 것도 또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뿐이다."

하였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하마연(下馬宴)173) 을 베풀려고 하는데 명(明)나라 사신(使臣)이 사양하므로, 임금이 굳이 청하니 명(明)나라 사신이 나와서 임금이 그와 더불어 행례(行禮)하였다. 임금은 서벽(西壁)에 앉고, 진가유(陳嘉猷)는 동벽(東壁)에 앉고 왕월(王軏)은 동벽(東壁)에서 조금 물러나 남쪽 가까이에 앉았다. 음악이 연주(演奏)되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술잔을 돌리고,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좌의정(左議政) 강맹경(姜孟卿)·병조 판서 한명회(韓明澮)·형조 판서 박원형(朴元亨)·예조 판서 홍윤성(洪允成) 등이 차례로 술잔을 돌리었다. 진가유(陳嘉猷)가 말하기를,

"주본(奏本)의 초고(草稿)를 보고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대인(大人)의 곡진한 지시를 받았으니, 매우 감사하고 매우 감사하다. 삼가 마땅히 명령대로 하겠다."

하였다. 진가유(陳嘉猷)가 말하기를,

"듣건대, 고납합(古納哈)에게는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직사(職事)를 제수하였고, 동산(童山)동창(童倉)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또한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제수하였다고 하니, 이와 같이 관직을 제수한 사람은 두 사람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모름지기 주본(奏本)에 기재해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어리첩목아(於里帖木兒)도 또한 일찍이 왔다가 갔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어리첩목아(於里帖木兒)는 일찍이 기억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이를 상고해 보겠다. 동창(童倉)은 먼저 온 칙서(勅書)에도 모두 동창(童倉)이라고 일컬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그 이름을 고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본(奏本)의 초고(草稿)를 갖추어 대인(大人)에게 보내어 보도록 하겠다."

하였다. 잔치가 파하자 궁궐에 돌아와서 도승지(都承旨) 윤자운(尹子雲)과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김하(金何)에게 명하여 인정(人情)174) 의 의복·포자(布子)·잡물(雜物)을 가지고 가서 명(明)나라 사신(使臣)에게 나누어 선사하니, 진가유(陳嘉猷)는 받지 않았으나 왕월(王軏)은 받으면서 말하기를,

"상사(上使)가 받지 않으니, 내가 드러나게 받기가 어렵습니다. 강(江)가에서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하고는, 다만 백저포 철릭(白苧布帖裏) 2, 백초삼아(白綃衫兒) 1벌만 받았다. 두목(頭目)에게 아청 면포 단원령(鴉靑綿布單圓領)을 각각 1벌을 주니, 모두 이를 받았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7책 319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왕실-의식(儀式) / 무역(貿易)

  • [註 167]
    동번(東藩) : 동방의 제후(諸侯).
  • [註 168]
    전열(前烈) : 전대(前代)의 공훈(功勳).
  • [註 169]
    흠차 통사(欽差通事) : 황제가 보낸 통역관.
  • [註 170]
    다례(茶禮) : 외국의 사신(使臣)을 맞아서 임금이 차(茶)를 대접하던 의식.
  • [註 171]
    안마(鞍馬) : 안장 갖춘 말.
  • [註 172]
    토색(討索) : 억지로 구함.
  • [註 173]
    하마연(下馬宴) : 중국의 사신이 우리 나라에 도착하던 날에 임금이 태평관에서 베풀던 위로연.
  • [註 174]
    인정(人情) : 벼슬아치에게 주던 선물.

○己未/幸慕華館迎勑, 至勤政殿受勑, 行禮如儀。 勑曰:

近者邊將奏報, 聞有 ‘建州三衛都督古納哈童山等私詣王國, 俱得賞賜而回’, 此雖傳聞之言, 必有形迹可疑。 且國王爲朝廷東藩, 而王之先代以來, 世篤忠貞, 恪秉禮義, 未嘗私與外人交通, 何至於王乃有此事? 今特遣人齎勑諭王, 王宜自省。 如無此事則已, 果有此事, 王速改之。 如彼自來, 亦當拒絶, 諭以各安本分、各守境土, 毋或自作不靖, 以貽後悔。 在王尤當秉禮守法, 遠絶嫌疑, 繼承前烈, 以全令名, 王其愼之。

上陞殿, 與陳嘉猷行禮, 又欲行禮於王軏, 嘉猷曰: "王序班, 非副使, 乃欽差通事, 不可竝禮。" 近南向西北行禮, 上向東答拜。 趨出, 上與嘉猷行茶禮, 命禮曹判書洪允成, 就東廊與行茶禮。 嘉猷傳語云: "朝廷非有他意。 蓋因野人報邊將, 邊將差人覆審乃奏, 故有是勑也。 貴國世守禮義, 殿下賢明, 天下共知。 近又搬運漂海錢糧, 解送人口, 日本朝見亦幷奏達, 朝廷深嘉殿下忠誠。 今聞古納哈童倉及諸野人受職, 又受弓劍、鞍馬, 以此爲訝耳。" 上令金何答曰: "今見勑旨, 又蒙大人指示備悉, 豈敢小隱? 古納哈童倉等曾受本國之職, 李滿住子四五人頻頻來往, 其子一人前月來還。 此輩人面獸心, 若不許來, 卽生邊釁, 不得已而待之, 有自來矣。" 嘉猷曰: "朝廷亦知此輩易生釁端。 此輩與畜生一般, 今年受職, 明年又欲受職, 欲心無窮, 朝廷所知。 但朝廷之意以爲此二人曾受朝廷都督職事, 殿下又加授職, 於理未安, 只此一節而已。 今奏本書‘某人於某月日來, 受某職及某某賞物, 某日回去,’ 明白具聞, 朝廷當勑彼人等, 勿復交通。 彼人不敢更來, 則便是朝鮮之福也。" 又問: "聞都希來住, 信乎?" 上答曰: "滿住豆里近者來此願住, 不聽送還。" 嘉猷曰: "奏本亦須明白開具。" 上答曰: "當如大人指示, 一一具奏。 且我國西北連野人東南近人。 若日本國則相去窵遠, 往來稀闊; 至如對馬一歧覇家臺等三島人, 屢生邊釁, 我國不得已隨所討索, 給與米布, 煩費不小。 朝廷焉知我國細事? 今應接野人, 亦出於不得已耳。" 上幸太平館, 將設下馬宴, 使辭, 上固請, 使出, 上與之行禮。 上坐西壁, 陳嘉猷東壁, 王軏於東壁差退近南而坐。 奏樂行茶禮。 上行酒, 永膺大君 義昌君 翼峴君 、左議政姜孟卿、兵曹判書韓明澮、刑曹判書朴元亨、禮曹判書洪允成等以次行酒。 嘉猷曰: "要見奏本草。" 上答曰: "蒙大人曲盡指示, 深謝深謝。 敬當如命。" 嘉猷曰: "聞古納哈授正憲大夫職事, 童山改名童倉, 亦授正憲大夫。 如此授職者不止二人。 亦須載諸奏本。 又聞於里帖木兒亦曾來去。" 上答曰: "於里帖木兒不曾記憶, 當考之。 童倉則前來勑書皆稱童倉, 不是我國改其名也。 然具奏本草, 送與大人看了。" 宴罷還宮, 命都承旨尹子雲、行僉知中樞院事金何齎人情衣服、布子、雜物, 分贈使, 嘉猷不受, 受之, 云: "上使不受, 予難顯受。 望送諸江上。" 只受白苧布帖裏二、白綃衫兒一。 贈頭目鴉靑綿布單圓領各一, 皆受之。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7책 319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왕실-의식(儀式)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