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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11권, 세조 4년 1월 17일 병자 2번째기사 1458년 명 천순(天順) 2년

정전의 진황과 왕골 자리에 대한 평산 도호부사 정차공의 상서

평산 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 정차공(鄭次恭)이 상서(上書)하기를,

"이 앞서는 정전(正田)014) 이 비록 간혹 진황(陳荒)하더라도 아울러 모두 세(稅)를 거두었는데, 그 후로는 오직 전부 진황한 것이라야 면세(免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전(元典)》에는 ‘질병이 있어서 경작(耕作)할 수 없는 자는 인리(隣里)와 족친(族親)에게 경작을 권유하여 시기를 잃지 말게 하라.’는 조문이 있는 까닭으로 정전(正田)의 진황자(陳荒者)가 혹은 고장(告狀)하여 그 세(稅)를 면하려고 함이 있어도 수령(守令)은 이 법에 구애되어 관찰사에게 보고할 수 없고, 혹 전보(傳報)하는 자가 있어도 관찰사는 반드시 이 법을 들어서 꾸짖게 되니, 드디어 좋은 법의 아름다운 뜻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도록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헛된 세금을 바치게 하니, 심히 애석합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토지가 협소하여 전지가 없는 백성이 10분의 3에 가깝고, 전지가 있는 자가 연고(緣故)가 있어서 경작할 수 없으면 인리와 족친이 아울러 경작하여 나누는 것이 곧 민간의 상사(常事)입니다. 만약 과연 기름진 땅이 있다면 어찌 진황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초목(草木)이 무성하고 사석(沙石)이 많이 섞여서 감당해 경작하지 못하여도 또한 세(稅)를 거두니, 백성들의 원망이 대개 이에서 깊어집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많은 토지를 넓게 점유하고서도 타인에게 주기를 즐기지 않아 고의로 진황한 자를 제외하고, 척박(瘠薄)하여 쓰지 못하는 전지를 진황한 자는 복사전(覆沙田)015) 의 예를 따라 전주(田主)로 하여금 수령에게 장고(狀告)하게 하고, 〈수령이〉 몸소 살펴서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세(稅)를 거두지 말게 함으로써 백성의 원망을 풀게 하소서.

경상도 안동부(安東府)도회(都會)016) 에서는 진헌할 용문석(龍文席)과 진상(進上)할 자리[席]를 직조(織造)하는데, 소요되는 왕골[莞草]의 수량이 지극히 많아서 전자에는 본부(本府)의 가까운 몇몇 읍(邑)에 나누어 정(定)하여 수납(收納)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미년017) 에 또 67주(州)에 분정하였고, 주·군(州郡)의 대소를 가지고 차등을 매기니, 많이는 1천 여 파(把)에 이르고, 적게는 2백여 파를 내리지 않으므로, 이는 안동 등지의 몇몇 군의 백성에 수고로움을 고르게 하고 쉬도록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읍의 풍토가 몇몇 읍과는 서로 같지 않으며, 그 왕골을 배양(培養)하는 기술과 포백(曝白)하는 법도 또한 달라서, 자리를 짜는 것을 감내하는 자도 있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읍에 나누어 정한 민호(民戶)의 백성 스스로가 마련할 수 없어서 모두 미·포(米布)를 거두어 안동으로 가서 사서 납부하는데, 집리배(執吏輩)들은 취모 멱자(吹毛覓疵)018) 하고 도등(刁蹬)019) 하여 받지 않고 사사로이 비축한 것을 가지고 대납하여 퇴물림을 당한 왕골과 나머지 값을 몰래 받고 또 다른 고을의 납품에 대신합니다. 금년에 이와 같이 하고 명년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여, 본부의 집리(執吏)하는 무리는 날로 더욱 치부(致富)하되, 여러 읍의 백성의 근심하고 탄식함은 어느 때나 그침이 없습니다. 자리[席子] 16장(張)에 들어가는 왕골은 16파(把)인데, 1파(把)마다 중량이 4냥(兩)이요, 그 값은 1냥마다 쌀 1말[斗]이니 총 1장의 값은 쌀 64두요, 50장마다의 값은 쌀 3천 2백 두이니, 총계는 2백 13석 5두입니다. 이로써 자리를 사면 오히려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왕골의 값은 도리어 자리보다 배가 되는 까닭으로 본부에 사는 백성의 수전(水田)이 있는 자는 벼를 심지 않고 왕골을 심어서 대납하는 밑천을 삼고, 경중(京中)의 장사치도 또한 본부의 왕골을 사고 여러 읍의 색리(色吏)020) 와 교결(交結)하여 몰래 진성장(陳省狀)021) 을 받고 대납하였습니다. 대개 이 법은 본시 몇몇 군(郡)의 백성을 휴식(休息)하려고 함이었는데, 도리어 70여 주(州)에 해를 끼칩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제읍(諸邑)에서 납부하는 왕골은 본시 안동 등의 몇몇 읍의 소산물이니, 다른 군에 옮겨서 납부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주(尙州)도 또한 왕골이 생산되는 곳이니, 청컨대 안동 등의 몇몇 읍과 상주의 공물(貢物) 내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을 가려서 다른 군에 옮겨 정(定)하고, 아울러 왕골을 거두게 하여서 온 도(道)의 폐단을 없애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7책 249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진상(進上) / 농업-전제(田制)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공업-수공업품(手工業品) / 물가-물가(物價) / 상업-상인(商人)

  • [註 014]
    정전(正田) : 조선조 때 토지 대장에 기록된 전지(田地). 해마다 쉬지 않고 계속 경작하는 전지였음.
  • [註 015]
    복사전(覆沙田) : 모래가 밀려 덮인 땅.
  • [註 016]
    도회(都會) : 각도마다 사람을 모으거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설치하는 곳.
  • [註 017]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 [註 018]
    취모 멱자(吹毛覓疵) : 남의 잘못을 꼬치꼬치 캐어냄.
  • [註 019]
    도등(刁蹬) : 간사한 아전들이 공물을 대납(代納)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바치는 물건을 이리저리 흠을 잡아 바치지 못하게 막던 것을 말함. 이문(吏文)에서 나온 말임.
  • [註 020]
    색리(色吏) : 조선조 때 감영(監營)이나 군아(郡衙)에서 돈과 곡물을 출납하고, 간수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원.
  • [註 021]
    진성장(陳省狀) : 지방에서 중앙에 올리는 조세 명세서. 또는 그 물목(物目).

平山都護府使鄭次恭上書曰:

前此, 正田雖間有陳荒, 竝皆收稅, 其後唯全陳者免稅。 然《元典》有 "疾病不能耕種者, 隣里族親勸誘耕種, 勿令失時" 之條, 故正田陳荒者, 或有告狀, 欲免其稅, 守令拘於是法, 不得報觀察使, 或有傳報者, 觀察使必擧是法而責之, 遂使良法美意不逮於下, 使民納其虛稅, 甚可惜也。 臣竊以爲我國壤地褊小, 無田之民, 幾乎十分之三, 有田者有故而不能耕種, 則隣里族親竝耕而分, 乃民間常事也。 若果膏腴之地, 豈有陳荒之理哉? 草木暢茂, 沙石磽硧, 不堪耕種, 而亦令收稅, 下民之怨, 蓋深於此。 請自今除廣占土地不肯與他, 故爲陳荒者外, 瘠薄不用田陳荒者, 依覆沙田例, 令田主狀告, 守令親審報觀察使, 勿令收稅, 以解民怨。 且慶尙道 安東府都會織造進獻龍文席及進上席, 所入莞草厥數至多, 前者分定本府傍近數邑收納。 歲在辛未, 又分定六十七州, 以州郡大小爲差, 多至一千餘把, 小不下二百餘把, 是欲使安東等處數郡之民均勞息肩也。 然諸邑風土不與數邑相似, 其莞草培養之術, 曝白之法亦懸, 而堪爲織席者, 未之有也。 由是諸邑分定民戶, 民不能自備, 皆收米布, 往安東買納, 執吏輩吹毛覓疵, 刁蹬不受, 以私備代納, 潛受見退莞草及餘價, 又代他官之納。 今年如此, 明年亦如此, 本府執吏之徒, 日益致富, 而諸邑之民, 愁歎無時而息矣。 席子一張所入莞草十六把, 每一把重四兩, 其價每一兩米一斗, 總計一張之價, 米六十四斗。 每五十張價, 米三千二百斗, 總計二百十三石五斗。 以此買席, 尙有餘矣。 然則莞草之價, 反倍於席子, 故本府居民有水田者不種稻而種莞, 以爲代納之資, 京中商賈亦買本府莞草, 而交結諸邑色吏, 潛受陳省代納。 蓋此法本欲休息數郡之民, 反貽害於七十餘州。 臣竊以爲諸邑所納莞草, 本是安東等數邑所産, 不必移於他郡也。 尙州亦莞草所産之地也, 請安東等數邑及尙州貢物內擇非所産者, 移定他郡, 竝收莞草, 以除一道之弊。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7책 249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진상(進上) / 농업-전제(田制)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공업-수공업품(手工業品) / 물가-물가(物價) / 상업-상인(商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