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에서 군령에 관한 일에 대해 계문하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도승지(都承旨) 한명회(韓明澮)·동부승지(同副承旨) 김질(金礩)·병조 참의(兵曹參議) 한종손(韓終孫)에게 명하여 새로 제정한 병제(兵制)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송중문(宋仲文)·한서귀(韓瑞龜) 등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여러 장수들을 시험해 보겠다."
하고는, 인하여 부장(部將)을 부르는 표신(標信)을 가지고 도진무(都鎭撫)를 부르고, 위장(衛將)을 부르는 표신(標信)을 가지고 부장(部將)을 부르니, 도진무(都鎭撫) 홍윤성(洪允成)과 이흥상(李興商)이 표신(標信)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모등(某等)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하고는 가지 아니하였다. 부장(部將) 허형손(許亨孫)과 김교(金嶠)는 표신(標信)을 보고는 표신(標信)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어찌 위장(衛將)을 부르는 것을 사용하여 모등(某等)을 속이려고 하는가?"
하였다. 부장(部將) 조방림(趙邦霖)과 이종현(李宗顯) 등은 표신(標信)을 보고는 곧 달려서 나가다가 김교(金嶠) 등이 가지 않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의심이 나서 중지하였다. 송중문(宋仲文)과 한서귀(韓瑞龜)가 이로써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윤성(洪允成)은 진실로 속일 수가 없구나. 내가 본디부터 그 사람된 품을 알고 있었다."
하고는, 이내 명하여 시식(侍食)하도록 했는데, 위장(衛將)과 진무(鎭撫)도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홍윤성에게 큰 녹비(鹿皮) 1장(張)을 내려 주고, 김교(金嶠)와 허형손(許亨孫)에게 각궁(角弓)을 각각 1장(張)씩 내려 주었다. 한명회(韓明澮)에게 명하여 조방림(趙邦霖)과 이종현(李宗顯)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너희들은 송중문(宋仲文)에게 속힌 바가 되었으니, 죄는 마땅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모자를 벗고 벌주(罰酒)를 마셔야 한다."
하였다. 송중문이 부장(部將)을 능히 속인 이유로써 각궁(角弓) 1장(張)을 내려 주고, 또 조방림과 이종현에게도 각궁(角弓)을 각각 1장씩을 내려 주었다.
병조(兵曹)에서 아뢰었는데,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1. 평상시에 영(令)을 내릴 때는 본조(本曹)406) 에서 진무소(鎭撫所)에 이문(移文)하고, 진무소(鎭撫所)에서 위장(衛將)에게 이문(移文)하게 하고, 만약 긴급(緊急)한 일을 아뢸 때에는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패(牌)를 발송하여 진무(鎭撫)를 불러 대면(對面)하여 부탁하게 하소서.
1. 오위(五衛)에서 군령(軍令)을 범한 군사는 위장(衛將)이 바로 위에 아뢰게 하고, 본조(本曹) 및 진무소(鎭撫所)에서 적간(摘奸)할 때나 행순(行巡)할 때 금령(禁令)을 범한 군사도 또한 각기 바로 위에 아뢰게 하소서.
1. 궁성(宮城)의 안팎을 순작(巡綽)407) 하는 군사의 수효는 위장(衛將)이 마감(磨勘)하여 본조(本曹)에 보내어 시각(時刻)을 나누고 길을 나누게 하고, 또 궁성(宮城) 안팎의 여러 문을 파직(把直)하는 군사의 성명(姓名)을 기록하여 1건(件)은 진무소(鎭撫所)에 보내고 1건(件)은 본조(本曹)에 보내면, 본조(本曹)에서는 다시 이름을 써서 위에 아뢰게 하고, 궁성(宮城) 밖의 군사는 위장(衛將)이 고찰(考察)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1. 상호군(上護軍)과 대호군(大護軍)의 수효가 적어서 행군(行軍)하기가 간고(艱苦)하니, 출번(出番)한 부장(部將)으로써 화회(和會)하여 차정(差定)시키게 하소서.
1. 위장(衛將)은 이조(吏曹)에서 당상관(堂傷官) 16원(員)을 가지고 주의(注擬)408) 하여 수점(受點)409) 하도록 하고, 매번(每番)에 5인이 3일을 번갈아 직숙(直宿)하고, 나누어 시위(侍衛)하는 것은 직차(職次)를 사용하고,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할 때도 또한 수점(受點)하도록 하소서.
1. 부장(部將)은 매부(每部)의 1인은 본조(本曹)에서 주의(注擬)하여 점(點)410) 을 받아서 각기 본부(本部)에서 직숙(直宿)하도록 하고, 선전관(宣前官) 15원(員)은 인원을 정하여 3번(番)으로 나누어 3일마다 서로 교체하여 사정전(思政殿) 문 안에서 직숙(直宿)하게 하고, 선전(宣傳)할 때는 서서 전하고 마주보고 꿇어앉지 못하도록 하소서.
1. 진무소(鎭撫所)의 진무(鎭撫) 30명 내에 15명은 줄이고, 15인으로써 인원을 정하여 3번(番)으로 나누어 경복궁(景福宮) 내소(內所)에 3인, 광화문(光化門) 외소(外所)에 1인, 창덕궁(昌德宮)에 1인이 직숙(直宿)하고, 외소(外所)의 진무(鎭撫)는 명령하는 바가 있으면 모름지기 선전 표신(宣傳標信)을 받아야 하고, 본조(本曹)의 낭관(郞官)이 명령을 받들어 전할 때에도 또한 선전 표신(宣傳標信)을 상고하도록 하소서.
1. 여러 위(衛)에는 순찰(巡察)하는 바가 없지마는, 그러나 여러 사람을 경계하여 해이(解弛)하지 않는 것은 병가(兵家)의 소중하게 여기는 바이니, 혹은 대신(大臣)에게 명하기도 하고, 혹은 종친(宗親)에게 명하기도 하고, 혹은 병조(兵曹)와 진무소(鎭撫所)의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기도 하여, 환관(宦官)·사알(司謁)·사약(司鑰)과 승정원(承政院)의 조례(皂隷)에 이르기까지 만약 선전 표신(宣傳標信)을 받아 가지고 간다면 병졸과 오장(五長) 이상은 장수에게 고(告)하지 않고도 명령을 받들게 되며, 만약 대장(大將)이 전명(傳命)하는 표신(標信)이라면 그 위장(衛將)에게만 명령할 뿐이며, 위장(衛將)이 전령(傳令)하는 표신(標信)이라면 그 부장(部將)에게만 명령할 뿐이니, 부장(部將)이 대장(大將)의 영(令)을 듣지 않고, 통장(統將)이 위장(衛將)의 영을 받지 않는 것도 모두 이 예(例)에 따르도록 하소서.
1. 충의위(忠義衛)는 국가에서 우대하고 돌보아서 평상시 진(陣)에 따르지 못하도록 하되, 만약 〈임금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릴 때는 이러한 예(例)에 구애받지 않으며, 충순위(忠順衛)와 충찬위(忠贊衛)는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의 갑사(甲士)의 예(例)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1. 예전부터 내려온 관례에는 영추문(迎秋門)에는 절제사(節制使) 1원(員)과 진무(鎭撫) 1원(員)이 직숙(直宿)했는데, 지금부터는 직숙(直宿)하지 말도록 하고, 선전 표신(宣傳標信)을 가지고 문을 여닫게 하소서.
1. 대장(大將)을 건치(建置)한다면 본조(本曹)에서 낭관(郞官) 2원(員), 취라치(吹螺赤) 2인, 태평소(太平簫) 2인을 정하고, 형명(刑名)에는 각각 나장(螺匠) 10인, 영사(令史) 2인을 차비(差備)시키고, 거기에 쓸 종이·붓·먹을 공급해 주소서.
1. 이전에는 진무소(鎭撫所)를 삼군 진무소(三軍鎭撫所)라 일컬었으나, 지금은 삼군(三軍)이 이미 혁파(革罷)되었으니, 오위 진무소(娛衛鎭撫所)로 고쳐 일컫게 하소서.
1. 내금위(內禁衛)는 오위(五衛)에 예속되지 않았으니 그 절제사(節堤使) 6인은 내금위 장(內禁衛將)이라 일컫고, 오위장(五衛將)과 더불어 똑같이 아문(衙門)을 설치하고 매번(每番)마다 두 장수가 아울러 사금(司禁)을 거느리고 직숙(直宿)하며,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할 때는 수점(受點)하도록 하소서.
1. 오위 도진무(五衛都鎭撫)의 인(印)과 대장(大將)의 인(印), 의흥위장(義興衛將)의 인(印), 용양위 장(龍驤衛將)의 인(印), 호분위 장(虎賁衛將)의 인(印), 충좌위 장(忠佐衛將)의 인(印), 충무위 장(忠武衛將)의 인(印), 내금위 장(內禁衛將)의 인(印)을 각각 1개씩 주조(鑄造)하여 주도록 하소서.
1. 선전관(宣傳官)과 진무(鎭撫)와 부장(部將)은 대성(臺省)411) 과 정조(正曹)412) 의 예(例)에 의거하여 자손(子孫)이 음직(蔭職)으로 물려받도록 하소서.
1. 위장(衛將)은 배영사(陪令史)가 각각 1명, 배조례(陪皂隷)가 각각 1명, 구사(驅使)가 각각 3명, 수청 영사(隨廳令史)가 10명, 사령(使令)이 10명, 나장(螺匠)이 3명이 되게 하소서.
1. 부장(部將)은 배영사(陪令史)가 각각 1명, 배조례(陪皂隷)가 각각 1명, 구사(驅使)가 각각 2명, 수청 영사(隨廳令史)가 5명, 사령(使令)이 5명, 나장(螺匠)이 2명이 되게 하소서.
1. 선전관(宣傳官)은 구사(驅使)가 각각 2명, 수청 영사(隨廳令史)가 6명, 사령(使令)이 7명이 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90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선발(選拔)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註 406]본조(本曹) : 병조(兵曹).
- [註 407]
순작(巡綽) : 순찰(巡察).- [註 408]
주의(注擬) : 관리를 임명할 때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에서 3망(三望:세 사람의 후보자)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일.- [註 409]
수점(受點) :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음.- [註 410]
점(點) : 낙점.- [註 411]
대성(臺省)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통칭하는 말.- [註 412]
정조(正曹) : 문선(文選)을 맡아 보던 이조(吏曹)와 무선(武選)을 맡아 보던 병조(兵曹)를 통칭하는 말. 전조(銓曹).○御思政殿, 命都承旨韓明澮、同副承旨金礩、兵曹參議韓終孫, 議新兵制。 召宣傳官宋仲文、韓瑞龜等謂曰: "予其試諸將。" 乃以召部將標信, 召都鎭撫, 以召衛將標信, 召部將, 都鎭撫洪允成、李興商見標信笑曰: "非召某等也。" 不赴。 部將許亨孫、金嶠見標信, 謂持標信者曰: "爾何用衛將之招, 紿某等也?" 部將趙邦霖、李宗顯等見標信, 卽走出, 望見金嶠等不赴, 疑而中止。 仲文、瑞龜以啓, 上曰: "允成信不可紿也。 予固知其爲人也。" 仍命召侍食, 衛將、鎭撫皆與焉。 賜允成大鹿皮一張, 金嶠ㆍ許亨孫角弓各一張。 命明澮傳于邦霖、宗顯曰: "汝等爲宋仲文所誤, 罪當罰也。 其脫帽飮罰酒。" 以仲文能紿部將, 賜角弓一張, 又賜邦霖、宗顯角弓各一張。 兵曹啓: "一, 常時出令, 本曹移文鎭撫所, 鎭撫所移文衛將, 若啓緊急事, 依舊例發牌, 招鎭撫面囑。 一, 五衛犯令軍士, 衛將直啓, 本曹及鎭撫所摘奸及行巡時犯禁軍士, 亦各直啓。 一, 內外巡綽士之數, 衛將磨勘送本曹, 分更分道, 且錄內外諸門把直軍士姓名, 一件送鎭撫所, 一件送本曹, 本曹更書名以啓, 宮城外軍士, 衛將毋得考察。 一, 上、大護軍數少, 行巡艱苦, 以出番部將, 和會差定。 一, 衛將則吏曹以堂上官十六員注擬受點, 每番五人, 更三日直宿, 分衛用職次, 扈駕時亦受點。 一, 部將每部一人, 本曹注擬受點, 各其本部直宿, 宣傳官十五員定額, 分三番三日相遞, 思政殿門內直, 宣傳時立傳, 毋得對跪。 一, 鎭撫所鎭撫三十內減十五, 以十五人定額, 分爲三番, 景福宮內所三人、光化門外所一人、昌德宮一人直宿, 外所鎭撫有所令, 則須受宣傳標信, 本曹郞官承傳時, 亦考宣傳標信。 一, 諸衛無所巡察, 然警衆不弛, 兵家所貴, 或命大臣, 或命宗親, 或命兵曹、鎭撫所宣傳官, 宦官、司謁、司鑰, 至於政院皂隷, 若受宣傳標信而往, 則卒及五長以上, 不告將帥而奉命, 若大將傳命標信, 則令其衛將而已, 衛將傳令標信, 則令其部將而已, 部將不聽大將之令, 統將不受衛將之令, 皆從此例。 一, 忠義衛國家優恤, 常時不使隨陣, 若親將時, 不拘此例, 忠順、忠贊衛, 則依內禁別侍衛、甲士例。 一, 舊例迎秋門節制使一員、鎭撫一員直宿, 今勿令直宿, 以宣傳標信開閉。 一, 建置大將, 則本曹定郞官二員、吹螺赤二人、太平簫二人, 形名各差備螺匠十人、令史二人, 給該用紙筆墨。 一, 前此鎭撫所稱三軍鎭撫所, 今三軍已革, 改稱五衛鎭撫所。 一, 內禁衛不隷五衛, 其節制使六人稱內禁衛將, 與五衛將一樣設衙門, 每番二將幷率司禁直宿, 扈駕時受點。 一, 五衛都鎭撫印、大將之印、義興衛將之印、龍驤衛將之印、虎賁衛將之印、忠佐衛將之印、忠武衛將之印、內禁衛將之印, 各鑄一顆以給。 一, 宣傳官、鎭撫、部將, 依臺省、政曹例子孫襲蔭。 一, 衛將陪令史各一、陪皂隷各一、驅使各三、隨廳令史十、使令十、螺匠三。 一, 部將ㆍ陪令史各一、陪皂隷各一、驅使各二、隨廳令史五、使令五, 螺匠二。 一, 宣傳官驅使各二、隨廳令史六、使令七。" 從之。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90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선발(選拔)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註 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