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들과 형옥의 직결·저폐의 폐단·법령의 폐단 등에 대해 논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지금 중외(中外)의 관리들이 직결(直決)하는 옥사(獄事)가 매우 많다. 변방으로 사민(徙民)하는 형벌 같은 것도 또한 직결하여 시행하고, 비록 조그마한 물건을 훔친 자라도 또한 변방에 옮기니, 내 그 원통함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취지(取旨)257) 하도록 명한다. 그 밖의 직결하는 여러 가지 옥사에도 어찌 이 같은 따위의 일이 없겠는가? 모두 재가를 받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옛날의 임금들은 많이 여러 가지 옥사를 알지 못하였으니, 문왕(文王)이 여러 가지 옥사와 여러 가지 삼가는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후세의 임금들은 회계(會計) 따위의 일까지도 모두 알았는데, 하물며 이러한 형벌의 판결과 같은 큰 것이겠느냐?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아무 죄 이상부터는 재가를 받아야 한다.
또 저화(楮貨)의 값은 관가에서는 무겁고 민간에서는 가벼운데, 여러 관사의 사령(使令)들이 간혹 ‘시준(市准)258) ’ 이라고 칭하여 모두 억지로 팔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시중의 가격에 준하지 말고 백성들의 편의를 들어주려고 하는데 어떠하겠느냐? 아니면 폐지할 수는 없겠느냐?
음사(淫祀)를 금지하는 것은 그것이 요망(妖妄)하기 때문이라면 아주 없애버리는 것이 가한데, 지금까지 폐지할 수 없어서 성황(城隍)이 있고,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내는 신당(神堂)도 있으며, 나라에서 향(香)과 축문(祝文)을 보내고, 또 신세포(神稅布)259) 도 있고, 또 무녀(巫女)로 하여금 병을 고치게 한다. 공가(公家)에서 이와 같이 하고 백성에게 귀신 제사지내는 것을 금지함이 옳겠느냐? 이 같은 작은 일에 대하여 금약(禁約)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한 적이 여러 차례인데도 법사(法司)에서 그대로 여전히 금지하니, 교활한 아전들의 침어(侵漁)하는 구실이 되는데, 불과할 뿐이다."
하니, 구치관(具致寬)·한명회(韓明澮)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下敎)는 진실로 합당합니다. 직결(直決)하는 여러 가지 옥사(獄事)로 말하면, 경중(京中)의 법사(法司)에서는 조사(朝士)로부터 유음 자제(有蔭子弟)와 대궐 안의 여러 색장(色掌)260) 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하 공사(啓下公事)261) 이외의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은 모두 직결(直決)을 행합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잗단 일은 임금이 아실 수 없는 것이니, 장죄(杖罪) 이상만 재가를 받게 하소서. 감사(監司)로 말하면 도형(徒刑)과 유형(流刑) 이하를 모두 다 직결하여 시행하므로 그 권한이 매우 중하나, 그러나 먼 도에서 반드시 취지(取旨)한 뒤에 시행한다면, 신 등은 체옥자(滯獄者)가 많을까 두렵습니다.
저화(楮貨)로 말하면 의금부(義禁府)·한성부(漢城府)·형조(刑曹)·사헌부(司憲府) 등 법사(法司)262) 의 사령(使令)263) 들이 억지로 팔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내응방(內鷹坊)의 별감(別監)은 대내(大內)의 권세를 가탁하여 닭과 개를 억지로 사고, 또 간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은 시전(市廛)264) 을 근거로 삼아 만일 촌민(村民)들이 물건을 안고 오면 속여서 그 자리에서 빼앗는데, 심한 자는 국문(國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물건을 싣고 오는 자를 만나기만 하면 다투어 서로 붙잡아 당기어 그 집으로 끌고 가서 모조리 산 뒤에야 놓아 보내니, 백성들 가운데 와서 물건을 파는 자는 대개 반값만 얻어 가지고 돌아가게 됩니다. 이 같은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저폐(楮幣)뿐만 아니라, 더구나 모든 물건은 시중의 표준 가격이 있는데도 백성들이 준용(準用)하지 아니하니, 저폐의 시중 표준 가격도 또한 한갓 헛된 법문(法文)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공가(公家)에서 출납할 때에는 반드시 시중 표준 가격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하니, 폐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음사(淫祀)로 말하면, 양가(良家)의 부인을 제외하고는 금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전지(傳旨)하기를,
"외방에서 직결(直決)하는 형옥(刑獄)을 모두 취지(取旨)하여 재결(裁決)하게 한다면 참으로 옥사가 지체될 폐단이 있을 것이니, 금후로는 외방에서는 연말에 죄명을 갖추어 써서 아뢰게 함이 어떠하겠느냐? 시사(市肆)의 폐단은 정원(政院)에서 비밀히 사람을 보내어 불의(不意)를 적간(摘姦)하여 금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양가(良家)의 부인이 음사(淫祀)에 가서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일 같은 것은 실행(失行)하는 자가 없을까 염려함에서이다. 만약 이로 인하여 음방(淫放)265) 하게 된다면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하나, 그렇지 않다면 귀신을 섬기는데 무엇을 금지하겠느냐? 또 부녀(婦女)로서 본래 지조를 지키는 자라면 비록 무당의 집에 가더라도 실절(失節)하지 않을 것이고, 진실로 지조가 없다면 비록 자기 집에 있을지라도 스스로 맑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내 들으니, 헌부(憲府)에서 근일에 문밖에서 평민 가운데 귀신을 제사하는 자가 있으면 잡아다가 죄를 논하였다 하니, 심히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하고, 이어 장령(掌令) 김서진(金瑞陳)을 불러 전지하기를,
"내가 도통부(都統府)에 있을 때부터 가혹하게 사찰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그마한 잗단 금령(禁令)은 모두 시행하지 말게 하였었다. 대개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은 진(秦)나라를 망친 법으로 상앙(商鞅)266) 이 만든 것이다. 대저 금령(禁令)이 번다(煩多)하면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작은 허물을 용서하여서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려고 한다. 음사(淫祀)를 금지하는 것은 작은 일인데, 내가 누차 금하지 말라고 명했는데도 헌부(憲府)에서 그전대로 자거(刺擧)267) 한다니, 근일에 논핵(論劾)한 사람이 얼마이며, 또 누구누구인가?"
하니, 김서진이 아뢰기를,
"복색(服色)·음주(飮酒) 등 세세한 일은 일체로 다 금하던 것을 정지하였으나, 음사(淫祀)를 금지하는 것만은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 것이므로 그대로 지금까지 금하고 있습니다. 근일에 한 상인(喪人)이 성 밖에서 야제(野祭)268) 를 지냈는데, 남녀가 거의 수십 명에 이르렀고, 창아(娼兒)들도 참여하여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이미 잡아다가 논결(論決)하였으며, 또 한 무녀(巫女)가 남녀 10여 명을 모아 놓고 그 집에서 술을 마시었으므로, 부리(府吏)269) 가 잡아다가 사실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모두가 그 사람의 일가친척의 남녀이므로 이들은 논죄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전지하기를,
"내가 《육전》의 법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육전》에 실려 있는 것은 그대로 두겠으나, 나는 우선 조그마한 잗단 금령을 시행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도 또한 일시의 법인데, 지금 헌사(憲司)에서 한갓 법조문에만 얽매여 강제로 조그마한 잗단 일만을 금하고 있다. 대저 내 말은 곧 법이다. 오늘날의 유자(儒者)들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귀(貴)하게 되면 망령되게 스스로 고상(高尙)하게 생각하여, 대체(大體)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쾌(快)한 일만을 힘쓰니,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이제 음사(淫祀)도 금하지 말아야 할 일인데도 유사(有司)에서 그것을 반드시 금하려고 하여 법리(法吏)들에게 어취(漁取)하는 소지를 만들어 주게 되니, 내 그들을 잡아다가 고(告)하는 자를 매우 그르게 여긴다. 그 일을 논결할 적에 누가 주장(主張)을 하였느냐?"
하니, 김서진이 아뢰기를,
"부리(府吏)들이 소유(所由)270) 를 거느리고 가서 체포하여 보고하였고, 본부(本府)에서 같이 의논하여 논결하였습니다. ‘신사(神祀)를 금하지 말라.’는 상교(上敎)는 신 등이 듣지 못한 까닭에 종전대로 금방(禁防)하였습니다."
하였다. 전지하기를,
"모든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꼬투리라 하더라도 그 하나만 들추면 그 나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가혹하게 사찰하지 말라.’고 내가 이미 전교(傳敎)했었는데도 한성부(漢城府) 관리들이 아직도 음사(飮射)271) 를 금지하므로, 내 작은 일이므로 논죄하지 말게 하였다. 무사(巫祀)도 또한 음사(飮射)와 같은 종류인데, 함부로 금지하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법이냐? 다른 관사에서는 세력이 대단치 않으므로 일이 생겨도 대단치 않아 그 폐단도 또한 적으나, 사헌부는 청요(淸要)의 관청이므로 거기에서 생기는 일은 긴급하여 그 폐단도 또한 큰 것이다. 혹시라도 전과 같이 하지 말고, 다만 국기일(國忌日)에만 음사(淫祀)를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서진이 명을 듣고 물러가자,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국기일을 세민(細民)들은 모르는 것인데, 이제 국기일에 금지한다면 무지한 백성들이 반드시 죄에 빠질 것입니다."
하였다. 전지하기를,
"내가 잘못 말한 것이다. 비록 국기일을 당하더라도 금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고, 다시 헌사(憲司)를 불러 그것을 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30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금융-화폐(貨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풍속(風俗)
- [註 257]취지(取旨) : 임금의 허락을 받음.
- [註 258]
시준(市准) : 나라에서 정한 시장 가격을 말함. 1년 또는 3개월마다 경시서(京市署)에서 분대 감찰(分臺監察)의 입회 아래 장사아치들을 모아서 물건의 거래 가격을 정하였음. 《세종실록》 제110권을 보면, "시준(市准)의 법은 물건의 시가(時價)에 따라 가격의 높고 낮은 것을 평준하게 하여 민정(民情)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음.- [註 259]
신세포(神稅布) : 신(神)을 섬기는 데 사용한 폐백(幣帛) 가운데 나라에서 세금으로 거두던 포목(布木). 처음에는 무당(巫堂)에게 거두었으나, 나중에는 일반 민호(民戶)에서 1년에 1포(布)씩 거두었음. 신포(神布).- [註 260]
색장(色掌) : 지방의 고을에서 잡다한 일을 맡은 향리(鄕里). 대개 각 동리에서 농사를 권장하고 죄인(罪人)을 추고(推考)하고 조세(租稅)와 군역(軍役) 따위를 감독하였음.- [註 261]
계하 공사(啓下公事) : 임금의 재가(裁可)를 받아 시행하던 공사(公事).- [註 262]
법사(法司) : 조선조 때 법(法)을 맡아 죄수를 다스리던 기관의 통칭. 의금부(義禁府)·한성부(漢城府:일반 서민의 옥사를 다스림)·형조(刑曹)·사헌부(司憲府)를 말함.- [註 263]
사령(使令) : 관아(官衙)에서 심부름하던 사람.- [註 264]
시전(市廛) : 시장의 가게.- [註 265]
음방(淫放) : 음탕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 [註 266]
상앙(商鞅) : 춘추 시대 법가(法家) 사상가. 진(秦)의 효공(孝公)을 도와 개혁 정치를 실시함.- [註 267]
자거(刺擧) : 자세히 살펴서 그 잘잘못을 모조리 들추어냄.- [註 268]
야제(野祭) : 길가나 들에서 잡신(雜神)에게 지내는 제사.- [註 269]
부리(府吏) : 사헌부 아전.- [註 270]
소유(所由) : 죄인을 잡아들이는 일을 맡아 보던 사헌부(司憲府)의 이졸(吏卒).- [註 271]
음사(飮射) : 술을 마시고 활을 쏘던 모임.○傳于承政院曰: "今中外官吏, 直決之獄頗多。 至如徙邊, 亦且直行, 雖盜微物者亦徙邊, 予哀其冤, 特命取旨。 其餘直決庶獄, 豈無如此之類? 欲竝取裁何如? 古之人君多不知庶獄, 若文王之庶獄庶愼, 罔敢知于玆是已。 後世人君會計等事皆知之, 況此刑決政之大者? 不可不知, 自某罪以上爲可取裁。 且楮貨之價, 官重民輕, 諸司使令, 或稱市準, 一切抑賣, 今欲勿令市準, 聽從民便何如? 抑不可廢歟? 禁淫祀, 爲其妖妄也, 則絶之可也, 今旣不可廢, 而有城隍焉, 有諸祀神堂焉, 國遣香祝, 又有神稅布, 又令巫女救病。 於公家如此, 而禁民祀神可乎? 如此細事, 不許禁約者累矣, 而法司因仍禁止, 不過爲猾吏侵漁之資耳。" 承旨具致寬、韓明澮等啓曰: "聖敎允當。 直決庶獄, 則京中法司, 自朝士有蔭子弟, 闕內諸色掌及凡啓下公事外, 笞杖皆行直決。 然細碎事, 人主不可盡知, 杖罪以上取裁。 若監司則徒流以下, 竝皆直行, 其權甚重, 然遠道必皆取旨而後行, 則臣等恐滯獄者多矣。 若楮幣, 則義禁府、漢城府、刑曹、司憲府等, 法司使令抑賣。 不惟此也, 內鷹坊別監, 假借內勢, 抑買雞狗, 且有姦狡之徒, 根據市廛, 一有村民抱物而來, 欺罔立奪, 甚者邀於國門之外, 一遇載物者, 爭相携持, 羅致其家, 盡買而後遣之, 民之來貿者, 率得半價而歸, 如此之(幣)〔弊〕 甚多。 非但楮幣而已, 況凡物皆有市準, 而民皆不用, 則楮幣市準, 亦徒文具。 然公家出納時, 必憑市準施行, 意不可廢。 若淫祀, 則除良家婦人外, 宜勿禁。" 傳曰: "外方直(啓)〔決〕 刑獄, 竝令取決, 則誠有滯獄之弊, 今後外方於歲季開具罪名, 啓達何如? 市肆之弊, 則政院出其不意, 密遣人摘姦, 禁約可也。 若良家婦人, 往參淫祀之禁, 慮有失行者也。 若因此而淫放, 則在所當治, 不然於事神何禁焉? 且婦女本有操守者, 則雖往巫家, 不至失節, 苟無其操, 雖在其家, 不能自防矣。 予聞憲府近日於門外, 有平民祀神者, 拘執論罪, 甚無謂也。" 仍召掌令金瑞陳傳曰: "予自在都統府時, 惡其苛察, 細碎禁令竝令勿行。 夫煩苛, 亡秦之法, 而商鞅所爲也。 大抵禁令煩多, 則民不安生。 今欲赦小過, 以爲治也。 禁淫祀, 細事也, 予屢命不禁, 而憲府刺擧如故, 近日論劾之人幾何, 且某某乎?" 瑞陳啓曰: "服色飮酒等, 細碎之事, 一皆停禁, 但淫祀之禁, 《六典》所載, 因循至今。 近日有一喪人野祭于外, 男女幾至數十, 娼兒輩亦參歌舞, 已拘執論決, 又有一巫女聚男女十餘, 飮于其家, 府吏拿來閱其實, 皆其族親男女也, 此則勿論。" 傳曰: "予非以《六典》之法爲非也。 《六典》所載自如, 而予姑欲勿行細碎之禁。 此亦一時之法, 今憲司徒拘於法, 而强爲細碎之禁。 夫吾言卽法也。 今之儒者, 一朝暴貴, 妄自高尙, 不顧大體, 專務目前之快, 甚爲不可。 今淫祀在所不禁, 而有司必欲禁之, 爲法吏漁取之地, 予甚非之其拘執以告者也。 其論決之際, 誰爲主張?" 瑞陳啓曰: "府使率所由捕告, 而本府同議論決。 若上敎勿禁神祀, 臣等未聞, 故禁防如故爾。" 傳曰: "凡事千頭萬緖, 擧其一, 可知其餘。 前此勿行苛察, 予已傳敎, 而漢城府官吏猶禁飮射, 予以細事勿論。 巫祀亦飮射之類也, 妄行禁止, 是何法也? 他司勢緩, 故其生事也緩, 而其弊亦少, 若憲司淸要之官, 故其生事也緊, 而其弊亦大。 毋或如前, 但禁國忌日淫祀爲可。" 瑞陳聞命而退, 承旨等啓曰: "國忌細民所不知, 今於國忌禁止, 則無知之民, 必陷於罪。" 傳曰: "予誤言之耳。 雖當國忌, 勿令禁止爲可。" 更招憲司言之。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30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금융-화폐(貨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풍속(風俗)
- [註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