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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1월 25일 을미 4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현릉에 비석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논의하다

명하여 현릉(顯陵)031) 에 비석[碑]을 세우는 일의 가부(可否)를 정부에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는 말하기를,

"대저 임금의 공업(功業)은 국사(國史)에 기록하는데, 어찌 반드시 비석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예전에 세종(世宗)께서 헌릉(獻陵)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시므로 신(臣)이 ‘불가합니다.’고 하였더니, 세종께서 그대로 따르고자 하셨으나, 변계량(卞季良)이 헌의(獻議)하기를, ‘제왕(帝王)의 원릉(園陵)에 비석을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명(明)나라 태조 황릉(黃陵)에 비석이 있고, 우리 나라 건원릉(健元陵)에도 또한 비석이 있는 것은 모두 창업(創業)한 연고 때문입니다. 이제 태종(太宗)께서는 비록 창업한 임금은 아니나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032) 한 것은 모두 그 공(功)인데 비석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여, 세종께서 그 의논을 따랐습니다. 문종(文宗)께서도 장차 영릉(英陵)에 비석을 세우시려 할 때, 신이 또 의논하여 ‘불가합니다.’고 하였더니, 문종께서 말씀하기를, ‘세종께서는 대통(大統)을 입계(立繼)하여 우리 조정의 법제(法制)를 환연(煥然)하게 모두 갖추어 후세(後世)에 끼쳤으니, 백세(百世)의 불천지주(不遷之主)033) 이시다. 역시 비석을 세워 덕업(德業)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시고, 드디어 세우게 하셨습니다. 문종(文宗)께서는 나라를 다스리심이 오래지 않아 별달리 기록할 만한 일이 없으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 등은 말하기를,

"현릉(顯陵)의 비석은 이미 만들었으니, 마땅히 오는 가을을 기다려 세우게 하소서."

하니, 세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6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1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031]
    현릉(顯陵) : 문종(文宗)의 능.
  • [註 032]
    정사(定社) : 사직의 터전을 정함.
  • [註 033]
    불천지주(不遷之主) : 영원히 제향을 받들 수 있는 공업을 세운 임금.

○命議顯陵樹碑可否于政府, 領議政鄭麟趾以爲: "大抵人君功業, 國史書之, 何必立碑? 昔世宗將立獻陵碑, 臣以爲不可, 世宗將從之, 卞季良獻議曰, ‘帝王園陵立碑, 自古而然。 大明 太祖 黃陵有碑, 我朝健元陵亦有碑, 皆以創業之故。 今太宗雖非創業之主, 開國、定社皆其功也, 不可無碑’, 世宗從其議。 文宗將樹英陵碑, 臣又議不可, 文宗曰, ‘世宗入繼大統, 我朝法制, 煥然極備, 後世賴焉, 所謂百世不遷之主。 亦不可不樹碑, 以紀德業也’, 遂立之。 文宗享國未久, 別無可紀之事, 不必立碑。" 左議政韓確等以爲: "顯陵碑石, 業已治之, 宜待來秋立之。" 命勿立。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6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1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