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조실록2권, 세조 1년 10월 11일 계축 1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중추원 사 김조의 졸기

중추원 사(中樞院使) 김조(金銚)가 졸(卒)하였다. 김조의 초명(初名)은 빈(鑌)이었으며, 자(字)는 자화(子和)인데, 세종(世宗)이 지금의 이름을 내려 주었고, 호(號)는 졸재(拙齋)이며, 김해부(金海府) 사람이다. 사람됨이 단정(端正) 검소하여 화려함이 없었으며, 청렴 공평하고 정직(正直)하였다. 젊어서 서사(書史)를 좋아하고 산업(産業)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학문이 높고도 깊었는데, 더욱이 역산(曆算)에 정통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서 인동 현감(仁同縣監)이 되어 임기가 차기 전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으로 전보(轉補)되었다.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간의대(簡儀臺)에 참여하는 일을 관장하여 자격루(自擊漏)472) 를 제조하여 세종(世宗)의 사랑하심이 날로 높아갔으며, 승지(承旨)에 발탁되고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매양 한 관직이 제수되면 반드시 북향하여 계수(稽首)하고 말하기를,

"한낱 한미한 유생(儒生)이 외람되게도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니, 성은(聖恩)이 망극하여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분묘(墳墓)에서 3년간 여묘(廬墓)살이하였으며 매양 기일(忌日)을 만나면 그 비애(悲哀)가 극진하였다. 항상 아버지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면서 숙부 김작(金酢)을 섬기기를 아버지같이 하였고, 김작의아들을 대하기를 마치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아우처럼 하였다. 처형(妻兄)인 감찰(監察) 박거선(朴居善)이 딸 몇을 낳고 죽었는데, 그 딸들이 모두 그 집에 있었으며 다 자장(資粧)을 갖추어서 시집보냈다. 그러나 성질이 자못 편협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중풍(中風)에 걸려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임금이 내의(內醫)473) 를 보내어 약이(藥餌)를 싸 가지고 가서 구료(救療)하게도 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미·두(米豆)를 아울러 30석(石), 종이 1백 권(卷), 유둔(油芚) 4부(部)와 관곽(棺槨)을 부물(賻物)로 하사하였다. 시호(諡號)를 공간(恭簡)이라 하였으니, 일을 잡기를 견고하게 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평이(平易)하면서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간(簡)이라 이른다. 아들 둘이 있으니, 김여(金輿)김윤(金輪)이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89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註 472]
    자격루(自擊漏) : 세종 때 만든 물시계. 흠경각(欽敬閣) 안에 설치하여 사철의 절기·달·날짜·시간을 모두 표시하였음.
  • [註 473]
    내의(內醫) : 궁중에서 병을 치료하던 내의원(內醫院)의 의원(醫員)을 말함.

○癸丑/中樞院使金銚卒。 初名, 字子和, 世宗賜今名, 號拙齋, 金海府人也。 爲人端介無華, 廉平簡直。 少好書史, 不營産業, 學問高邃, 尤精於曆算。 登第補藝文檢閱, 中重試。 累官至仁同縣監, 秩未滿補集賢殿修撰, 歷直提學, 參掌簡儀臺, 自擊漏製造, 世宗寵遇日隆, 擢承旨, 後拜禮曹判書。 每除一官, 則必北向稽首曰: "一介寒儒, 濫蒙主知, 位至宰輔, 聖恩罔極, 無由上報。" 至或流涕。 性至孝, 廬父母墳三年, 每遇忌日, 輒悲哀切至。 常恨父早歿, 事叔父如父, 視之子如母弟。 妻兄監察朴居善, 生數女而歿, 女皆在室, 悉備資粧嫁之。 然性頗隘。 嘗中風甚苦, 上遣內醫齎藥餌往救。 訃聞, 賜賻米豆竝三十石、紙一百卷、油芚四部、棺槨。 諡恭簡, 執事堅固恭, 平易不懈簡。 有子二, 輿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89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