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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7월 5일 무인 3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민심 수습·제도 정비·강명·예법 등에 관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문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그 문무(文武)의 비상하신 자질로써 새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공경히 종묘(宗廟)에 알현하시니, 이는 정히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게 하실 때입니다. 신이 비졸(鄙拙)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선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우러러 성총(聖聰)에 번독하는 바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睿鑑)으로 굽어 살피소서.

1. 민심을 얻는 것입니다. 대개 인주가 나라를 누리는 데 있어 그 장단이 바로 민심을 어느 정도 얻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 폐해를 제거하고 인민을 구제하는 정신으로 앞에서 창업해 놓으면 이를 계승하는 임금이 다시 그 인민을 능히 사랑해 길러 그 은택이 인심 속에 흡족히 배어 있으므로 비록 쇠잔한 세대에 이르러도 선왕의 덕을 생각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경사(經史)를 가지고 상고컨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비로소 왕업을 열어 놓으니, 무왕(武王)이 이어서 능히 그 공훈을 이루었고, 성왕(成王)·강왕(康王)이 서로 이어가며 백성을 무육(撫育)하였기 때문에, 인심이 굳게 뭉쳐 8백 년에 이르도록 잊지 않았고, 한(漢)나라의 고제(高帝)가 진(秦)나라와 항우(項羽)의 포학(暴虐)을 제거하고 천하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혜제(惠帝)·문제(文帝)·경제(景帝)가 서로 이어가며 인민을 편안하게 휴식시키고 그 정치가 백성을 기르는 데 있었으며, 광무(光武)가 다시 중흥하였고 명제(明帝)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치의 기본을 삼았기 때문에 그의 역년(曆年)이 4백 년에 이르렀으며, 당(唐)나라의 태종(太宗)고조(高祖)를 도와 수(隋)나라의 난(亂)을 평정하고 몸소 태평 세월을 이룩하였고, 현종(玄宗)에 이르러서도 개원(開元)의 치(治)109) 가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년(曆年)이 거의 3백 년에 이르렀으며, 송(宋)나라의 태조(太祖)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써 오계(五季)의 난(亂)110) 을 평정하였고 사종(四宗)111) 이 번갈아 일어나서 백 년간 무사하였다가 고종(高宗)이 강남으로 건너갔으나 〈남송(南宋)〉 효종(孝宗)도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인주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3백 년간 비록 민(閩)·광(廣)112) 지방에 힘을 못펴고 지냈지만 민심은 하루같이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송(宋)나라의 원가(元嘉)113) 와 수(隋)나라의 문제(文帝)와 주(周)나라의 세종(世宗)과 금(金)나라의 대정(大定)114) 에 이르러서는 소강(小康)115) 을 이루었다고 이를 수 있으나, 혹은 창업한 뒤에 쌓아 나가는 공이 없었고, 혹은 대를 이어 수성(守成)에 힘쓰는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장구한 역년(曆年)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주(周)나라의 인후(仁厚)함과 한(漢)나라의 관인(寬仁)함과 당(唐)나라의 인의(仁義)와 송(宋)나라의 충후(忠厚)와 더불어 같은 날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東方)으로 말하면 전조(前朝)116)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그 공덕(功德)이 사람들 머리 속에 남아 있었고, 그 뒤에 성종(成宗)·목종(穆宗)·현종(縣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선종(宣宗)·숙종(肅宗)·예종(睿宗)·인종(仁宗)의 10대에 걸쳐 모두가 백성을 기르는 데 힘썼기 때문에 그 역년(曆年)이 5백 년을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신성(神聖)하신 자질로써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셨고, 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께서 서로 대를 이어 일어나셔서 도(道)가 몸에 배시고 정사를 잘 다스리시어 인민이 편안하고 물자가 풍성하게 되었으므로 그 역년(曆年)의 장구할 것을 실로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도 또한 하늘이 군왕을 세워 백성을 사랑하게 한 마음과, 전대(前代)에서 민심을 얻어 긴 역년(曆年)을 누리게 된 효험을 가지고 반복해 생각하시고 순전히 생민의 산업을 기르고 민간의 숨은 고통을 구휼(救恤)하는 것을 일삼아 하신다면 본조의 성업이 곧장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 그리고 전조(前朝)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 백성을 사랑하는 길이란 다름아닌,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며 형벌을 덜어 주는 세 가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1. 제도(制度)를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성을 휴양해 생식(生息)하도록 하는 것은 본시 인군의 선무(先務)이나,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것도 또한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법을 세우는 것은 세상을 규제하는 한 방법으로서 본시 이것은 거행하고 저것은 벌릴 수도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제를 고정하지 않으면 한때의 전장(典章)117) 을 수시로 세우고 고치게 되어 후세 자손들이 실로 빙고(憑考)하여 의지할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周)나라의 성왕(成王)·강왕(康王)이 예악(禮樂)을 제작하였고,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한가(漢家)의 법도를 세웠으며, 당(唐)나라에서는 정관(貞觀)·개원(開元) 연간에 다같이 제도를 만들어서 모두 한 조대(朝代)의 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다만 송(宋)나라의 신법(新法)118) 의 제도가 너무 번거로와서 또한 화(禍)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세우지 않을 수도 없으면서 또한 급작스럽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동방에서는 전조(前朝) 때 토지 제도의 전시과(田柴科)119) 와 군사 제도의 부위제(府衛制)120) 의 제도가 지극히 정밀하고 상세하여 잘 정제(整齊)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전제(田制)가 문란해져서 사전(私田)으로 되면서 겸병(兼倂)과 양탈(攘奪)121) 이 자행되어 산과 내로써 토지의 경계로 삼았으며, 병제(兵制)는 폐하여져서 사병(私兵)이 되었으므로 몽고(蒙古)왜구(倭寇)가 번갈아 침입해 와도 방어할 만한 군사가 없었습니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조(太祖)·세종(世宗)《원전(原典)》《속전(續典)》이 있었고, 또 《등록(謄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좋은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제(田制)와 의주(儀註)122) 가 아직 일정한 법제를 이루지 못하였고, 병제(兵制)와 공법(貢法)도 임시로 적당하게 한 법이 많았으니, 어찌 성대(盛代)의 불충분한 전장(典章)이 아니겠습니까? 빌건대 대신(大臣)에게 명하시어 이에 다시 검토(檢討)를 더하여 한 조대(朝代)의 제도를 정하시어 자손 만대의 법칙으로 삼게 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전대(前代)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저 당(唐)·우(虞)삼대(三代)123) 의 정치는 본시 만대 제왕의 귀감(龜鑑)이 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漢)·당(唐)·송(宋)·금(金)이라 할지라도 또한 어찌 모두 본받을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다만 세상의 운수가 후하고 박함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를 본받는다면 백성을 기르는 정치가 지극할 것이며, 한(漢)나라의 고제(高帝)·광무제(光武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난(亂)을 뿌리뽑고 세상을 건진 공을 어찌 적다 할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규모(規模)와 기상(氣象)의 광명 정대함을 주자(朱子)는 이르기를, ‘요(堯)·순(舜)과 합치한다.’고 하였으며, 금(金)나라 세종(世宗)대정(大定) 연간의 정치는 전대사(前代史)에서도 이를 칭송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당(唐)·우(虞)와 삼대(三代)를 본받으시고 겸하여 한(漢)·당(唐)·송(宋)·금(金)의 정치를 취하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또 우리 동방 사람들이 다만 중국의 부성(富盛)함만을 알고 동방의 일들을 상고할 줄 모르는 것은 몹시 불가한 일이니, 빌건대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백성을 구제한 것, 성종(成宗)이 제도를 정비한 것, 현종(顯宗)이 수성(守成)한 것, 문종(文宗)이 양민(養民)한 것을 모범(模範)으로 삼고, 또 의종(毅宗)이 시주(詩酒)를 좋아한 것, 충렬왕(忠烈王)이 응견(鷹犬)을 좋아한 것, 충혜왕(忠惠王)이 연유(宴遊)를 즐긴 것, 공민왕(恭愍王)신돈(辛旽)을 서용한 일들로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대 역사에서 구하는 것이 오히려 조종(祖宗)에서 구함만 같지 못하니, 원컨대 태조(太祖)의 용지(勇智)와, 태종(太宗)의 영명(英明)과, 세종(世宗)의 예악(禮樂)의 제작 및 생민(生民)의 무양(撫養)과, 문종(文宗)이 문교(文敎)에 전념하시면서도 무비(武備)를 잊지 않으신 일들을 모범으로 삼으시면 반드시 멀리 다른 데서 구하지 않으셔도 그 다스리는 방법이 다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1. 대체(大體)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인주의 직책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며 어진 이를 서용하여 백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넓은 집과 고운 방석 위에 계실지라도 항상 성려(聖慮)를 더하셔서 현재 여러 관서의 백관(百官)은 무슨 일이 급하며 팔도(八道)의 폐단은 어느 것이 심한가를 살피소서. 이리하여 평안도(平安道)는 유리(流離)하여 옮긴 인민들을 소생 회복케 할 대책을 의논하여 절제사(節制使)를 정하고 관사(官司)를 설치할 지역을 정할 것이며, 함길도(咸吉道)는 육진(六鎭)의 편중이 가져오는 폐해를 고려하여 용성(龍城)에 영(營)을 설치하여서 편리함을 생각할 것이며, 황해도(黃海道)의 역질(疫疾)은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고, 강원도(江原道)강무장(講武場)124) 은 어느 것을 없앨 수가 있으며, 경기(京畿) 백성들의 부세(賦稅)는 어떻게 하면 번거롭지 않게 하고, 어떻게 하면 요역(徭役)이 무겁지 않게 하겠습니까? 또 하삼도(下三道)125) 는 공법(貢法)의 시행을 살펴 대납(代納)126) 하는 폐단을 제거해야 할 것이며, 충청도(忠淸道) 이남은 누호(漏戶)127) 의 금령(禁令)을 더욱 엄하게 하고, 경상도(慶尙道)왜인(倭人)을 지대(支待)하는 방법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전라도(全羅道)제주(濟州)의 수령을 잘 택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외방(外方)의 폐단으로서 큰 것은 모두 열거(列擧)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안으로 이조(吏曹)에서는 관제(官制)를 정하고, 호조(戶曹)에서는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를 정하며, 예조(禮曹)에서는 의주(儀注)를 정하며, 병조(兵曹)에서는 병제(兵制)를 정하고 진법(陣法)을 심의할 것이며, 형조(刑曹)에서는 노비(奴婢)의 번상(番上)하는 법을 정하고, 공조(工曹)에서는 국토의 지도(地圖)와 지적(地籍)을 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의(謀議)는 의정부(議政府)에 위임하고, 출납(出納)128) 은 승정원(承政院)에 위임하고, 간쟁(諫爭)과 탄핵(彈劾)은 대간(臺諫)에게 위임하고, 논사(論思)는 강관(講官)에게 위임하고, 직사(職事)를 맡기는 일은 육조(六曹)에 위임할 것이며, 인민을 침해 수탈한 외리(外吏)에 이르러서는 창고리(倉庫吏)를 죄주고, 외방의 군민(軍民)은 감사(監司)와 수령(守令)과 대소의 수륙 장수(水陸將帥)로 하여금 이를 단련해서 기르게 하면 내외 백관의 직무가 또한 다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주(周)나라에서 민심을 얻은 소이연(所以然)을 생각하고, 한(漢)나라와 같은 제도를 세우며, 전대의 정치를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을 채용하여 일은 미연에 생각하고, 시종 근신하면서 안정(安靜)을 다스림의 바탕으로 삼고, 강명(剛明)을 행정의 자세로 삼으며, 국속(國俗)을 변경하지 않고, 예로써 중국을 섬기며, 신료(臣僚)를 대접하기를 법도 있게 하고, 문무(文武)를 대하기를 하나 같이 하시면, 인군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결단코 유실함이 없을 것입니다.

1. 작은 일에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은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큰 변고(變故)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은 이를 소홀하게 여겼다가 결국 망하였으니, 진(秦)나라는 형벌로 망하였고, 전한(前漢)은 외척(外戚)으로 망하였고, 후한(後漢)은 환관(宦官)과 무장(武將)으로 망하였고, 위(魏)나라는 종실(宗室)이 약하여 망하였고, 진(晉)나라는 강호(羌胡)129) 의 처치를 잘못하여 망하였고, 양(梁)나라는 불교를 숭상하고 후경(侯景)130) 을 받아들여서 망하였고, 수(隋)나라는 연유(宴遊)와 고구려(高句麗)의 정벌로 망하였고, 당(唐)나라는 안으로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한 것이 화(禍)의 시초가 되어 번진(藩鎭)과 환관(宦官)이 번갈아 난역(亂逆)을 선동해서 망하였고, 후당(後唐)은 창우(倡優)131) 로 망하였고, 송(宋)나라는 왕안석(王安石) 때문에 망하였는데, 왕안석이 신법(新法)을 세우고 나서 수대(數代) 사이에 군자와 소인이 원수같이 되었습니다. 남송(南宋)이 망한 것은 원(元)과 더불어 금(金)나라 사람을 협공한 것이 실책이었고, 요(遼)나라는 응견(鷹犬)132) 으로 망하였고, 금(金)나라는 근본이 되는 땅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망하였고, 원(元)나라는 오랑캐로서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니 정령(政令)에 기강(紀綱)이 없어 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니, 이는 족히 따를 만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 동방의 신라(新羅)가 망한 것은 여왕의 황음(荒淫) 때문이었고, 백제(百濟)가 망한 것은 갑작스런 승리로 적을 멸시한 때문이었으며, 고구려(高句麗)가 망한 것은 강한 것만 믿다가 병력이 궁진한 때문이었습니다. 전조(前朝)는 처음에는 무신(武臣)의 원한을 사게 되어 대권(大權)을 절취당하였고, 중간에는 고임받는 무리가 그 세력을 믿고 정사를 해쳤으며, 마침내에는 권세 잡은 간신들이 정권을 쥐고 백성을 침해하였는데, 왜구(倭寇)가 네 차례나 침입하여 인민이 생활에 안정하여 살 수가 없게 되어서는 나라를 유지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본조(本朝)는 조종(祖宗)의 공과 덕이 전조에 양보할 것이 없고 가법(家法)의 정대함은 훨씬 앞서고 있으나, 다만 전조 병제(兵制)의 훌륭한 점은 비록 오늘에 와서도 아직 쉽게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시고, 생민을 위하여 극진하게 하시어 일언 일동(一言一動)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고, 일정 일사(一政一事)에도 사리에 합당하도록 힘쓰시어 쉬운 것도 어렵게 도모하시고, 미세한 것에서 큰 것을 이루시면, 종사와 생민을 위하여 크게 다행하겠습니다.

1. 그 시초에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이 즉위한 처음에는 백관이 우러러 보고 만민이 의지해 기대하며, 인국(隣國)도 주의 깊게 듣고 보는 바 되어, 자손 만대의 터전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인주가 신하를 지휘하는 권세를 조종하면 한 세상 사람을 분주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에 사진(仕進)을 구하는 사람들이 혹은 변방에서의 공로를 가지고, 혹은 토목(土木)의 역사를 가지고, 혹은 불·신(佛神)의 일을 가지고, 혹은 사장(詞章)을 가지고, 혹은 성색(聲色)133) 또는 화리(貨利)134) , 혹은 응견(鷹犬)과 국얼(麴糱)135) 을 가지고 틈을 타고 그 틈에 뛰어들어서 분잡하게 나오기 때문에, 인주가 어느 한 가지 일에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시초에 삼가지 않았으므로 그 종말은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정치하기는 어렵지 않으니, 먼저 그 나라 거실(居室)136) 에게 원망을 사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주가 간(諫)하는 것을 따르면 사대부(士大夫)의 마음이 흡연(翕然)히 합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와 반대가 될 것입니다.

1. 안정(安靜)을 숭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개 조심스럽게 수성(守成)해 나가는 인군은 근신하여 이미 이루어진 규모를 지켜 나갈 따름입니다. 만일 구제해야 할 폐단이 있으면 점차 이를 개정하여 전의 법규와 같게 할 뿐입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생선(生鮮)을 삶는 것과 같다고 옛사람은 말하였습니다. 능히 소요스럽지만 않게 하면 족한 것입니다. 민심이 한번 흔들리게 되면 그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니, 송(宋)나라의 신법(新法)이 곧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폐스러운 법은 본래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군이 숭상할 것은 안정(安靜)뿐입니다. 한사(漢史)137) 에 이르기를, ‘청정(淸靜)을 이루니 백성이 드디어 안정하게 되었다.’고 함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1. 강명(剛明)을 중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의 덕은 인(仁)보다 큰 것이 없는데, 인후(仁厚)한 것은 강명한 것과 상반(相反)되는 것 같기도 하나, 강명하지 않으면 내알(內謁)138) 이 성행(盛行)하게 되며, 따라서 중귀(中貴)139) 가 교만하여 전횡(專橫)하게 마련이고, 그 아래 조그마한 액예(掖隷)140) 까지도 방자하게 됩니다. 척리(戚里)141) 는 은총만 믿으며, 권신(權臣)은 대권(大權)을 절취하게 되고, 사신(詞臣)142) 은 총애만을 취하며, 간신(姦臣)·영신(侫臣)을 좌우로 맞아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 뜻을 얻게 되면 비록 인후한 정치를 행함이 있어도, 그 뜻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인군의 덕이 마땅히 강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예법(禮法)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신은 듣건대 서하(西夏)는 그 나라의 예속(禮俗)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 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원호(元昊)143) 는 본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금의(錦衣)와 옥식(玉食)은 번국(蕃國) 사람 체질에 편리한 것이 아니다’ 하였고, 금(金)나라의 세종(世宗)도 또한 매양 상경(上京)의 풍속을 생각하며 종신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요(遼)나라에서는 남부(南府)·북부(北府)가 있었고, 원(元)나라에서는 몽관(蒙官)·한관(漢官)이 있었는데, 원 나라 사람은 그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비록 중원(中原)을 잃었어도 사막(沙漠)144) 이북의 본토는 옛과 같았습니다.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역시 달라서 단군(檀君) 이래 관아(官衙)와 주군(州郡)을 설치하고 독자적인 성위(聲威)와 교화(敎化)를 펴 왔으며, 전조(前朝)의 태조(太祖)는 신서(信書)를 지어 국민을 가르쳤는데, 의관(衣冠)과 언어(言語)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더불어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착되지 않아서 마치 제(齊)나라 사람이 노(魯)나라에 간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전조 때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서로 잇달아서 몽고(蒙古)투화(投化)145) 한 것은 한 국가로서는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바라건대 의관은 조복(朝服) 이외에 반드시 다 중국 제도를 따를 필요는 없고, 언어는 통사(通事) 이외에 반드시 옛 습속을 변경하려 할 것이 아니며, 비록 연등(燃燈)146) ·척석(擲石)147) 이라 할지라도 역시 옛 습속을 좇아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1. 사대(事大)하기를 예(禮)로써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법의 상도(常道)로서, 예로부터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 국가는 실로 동방에 위치한 황복(荒服)148) 의 땅입니다. 멀리 해뜨는 해변에 위치해 있고 또 산과 계곡의 천험(天險)의 지리(地利)를 가지고 있어서 수(隋)·당(唐)의 창성(昌盛)함으로도 오히려 신하로 삼지 못하였으며,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의 예로 대하였고, 금(金)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일컬었으며, 송(宋)나라는 빈례(賓禮)로 대하였고, 원(元)나라는 혼인을 서로 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원(元)나라는 전쟁을 일으킨지 수십 년에 마침내 신하로 복속케 하였고 비록 생구(甥舅)149) 로 일컬었으나, 동국(東國)의 모든 일은 옛날과 아주 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 고황제(高皇帝)150) 께서 즉위하시고 군병을 일으키려 하자 천하가 비로소 평정하여졌으니, 이 군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것이 없어 행인(行人)을 구속하여 욕을 보이기도 하고, 세폐(歲幣)를 늘려 곤란을 주기도 하다가 그 뒤 무진년151) 에 이르러 황제의 위엄과 노여움이 비로소 그쳤고, 번국(蕃國)으로 봉(封)하는 일도 정하여졌던 것인데, 번국의 사세는 기내(畿內)의 사세와 다르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법을 다하지 않을 수도 없고, 또한 자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전조에서는 종(宗)이라 일컫고 개원(改元)152) 하였는데, 오늘에 있어서 소소한 절차를 반드시 전례에 구애받을 것은 없고 다만 그 성의를 다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는 상례의 은공(恩貢)에 표문(表文)을 붙여 치사하고 사명(使命)을 번거롭게 하지 말며, 평안한 백성을 좀 휴식케 하시면서 사대(事大)의 체통을 유지하게 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신료(臣僚)를 대접함에 있어 법도(法度)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은 그 존귀함이 아무도 더불어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마땅히 예로써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감히 간(諫)하는 자를 명예를 구하는 행위라고 이르지 못하며, 부지런하고 재간(才幹) 있는 자를 녹봉 받기 위한 행위라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명예를 구하고 녹봉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마땅히 용감하게 간한 것과 재간과 근면한 그것을 취할 뿐입니다. 나아가서 사상(死喪)에 즈음하여는 은혜를 베풀고, 형옥(刑獄)에 계류된 사람이라도 예로써 대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에서 이와 같이 충후(忠厚)한 풍속으로 선비를 대접하여 하나의 풍속을 이루게 되면, 백대를 내려가도 그 사대부가 역시 충후한 마음으로 윗사람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1. 문·무(文武)를 하나 같이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예로부터 문무 사이에는 시기(猜忌)와 혐오(嫌惡)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문리(文吏)는 세력도 있고 청요(淸要)의 직위를 가지는데, 무반(武班)은 근로하면서도 권세가 없어, 만일 인주가 편파적으로 문신을 믿고 언어(言語)와 예모(禮貌)에 있어 그들을 대하는 것이 혹 다르게 되면, 전조 때 경계(庚癸)의 사건153) 이 실로 염려됩니다. 의종(毅宗) 이후 충렬왕(忠烈王)에 이르기까지 무신이 권병(權柄)을 잡고는 온 조정을 죽여 없애버린 것이 거의 다 문무 사이에 서로 얽힌 혐오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의정부와 승정원(承政院)을 비롯하여 대간(臺諫)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무로 교체해 가며 임명하고 있어, 그 배려 또한 주도(周到)합니다. 그러나 병조(兵曹)와 진무소(鎭撫所)의 사령(使令)·영사(令史)들이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를 대하는 것이 몹시 까다롭고 박하며, 시위패(侍衛牌)에 이르러서는 마치 노예(奴隷)처럼 보곤 합니다.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문무를 대하심이 하나 같다고 이를 만합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백 년을 승평(昇平)하더라도 오늘의 일들을 잊지 않으시면 종사(宗社)와 신민을 위하여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광(司馬光)이 이르기를, ‘인군이 마음을 가지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어질고 밝고 용감한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긴요한 것이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사람을 가려서 맡기고, 간(諫)하는 것을 따르며,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고 하여 이로써 소(疏)를 지어 4조(四朝)에 바쳤는데, 신도 역시 이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반복 참작하여 임신년154) 겨울에 상왕(上王)께 바쳤습니다. 이제 그 고본(藁本)155) 이 승정원에 있을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하여 그 1통(通)을 베껴서 올리도록 하시고 특히 예람(睿覽)하여 주시면 이에서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임신년에 올린 소(疏)와 행성(行城)156) 을 파하자는 소를 가져다 보고, 양성지(梁誠之)에게 이르기를,

"너의 두 가지 소(疏)는 모두가 매우 긴절한 것이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歷史) / 무역(貿易)

  • [註 109]
    개원(開元)의 치(治) :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베풀었던 훌륭한 정치. 713년에서 741년 사이의 전성 시대를 말함. 개원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연호.
  • [註 110]
    오계(五季)의 난(亂) : 당(唐)나라가 멸망하고, 송(宋)나라가 건국하기까지 50여 년 사이에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의 5대(五代)의 혼란기.
  • [註 111]
    사종(四宗) : 태종(太宗)·진종(眞宗)·인종(仁宗)·신종(神宗).
  • [註 112]
    민(閩)·광(廣) : 복건(福建)·광동(廣東).
  • [註 113]
    원가(元嘉) : 문제(文帝)의 연호.
  • [註 114]
    대정(大定) : 금(金)나라의 세종(世宗)의 연호.
  • [註 115]
    소강(小康) : 대체로 안정함.
  • [註 116]
    전조(前朝) : 고려를 가리킴.
  • [註 117]
    전장(典章) : 법도.
  • [註 118]
    신법(新法) : 송(宋)나라 신종(申宗) 때 왕안석(王安石)이 만든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 균수법(均輸法)·시역법(市易法)·모역법(募役法)·청묘법(靑苗法)과 보갑법(保甲法)·보마법(保馬法)이 그 주내용임.
  • [註 119]
    전시과(田柴科) : 고려 시대 문무 백관(文武百官)에게 그 관급(官級)에 따라 토지와 땔나무를 댈 임야(林野)를 나누어 주던 토지 제도.
  • [註 120]
    부위제(府衛制) : 고려 시대 시행되었던 병농 일치제(兵農一致制). 부병제(府兵制).
  • [註 121]
    양탈(攘奪) : 수탈.
  • [註 122]
    의주(儀註) : 예절.
  • [註 123]
    삼대(三代) : 하(夏)·상(商)·주(周).
  • [註 124]
    강무장(講武場) : 나라에서 봄·가을 두 철에 무예 연습을 겸한 사냥을 하던 장소. 처음에는 일정한 장소가 없었으나 세종 때 평강(平康)·이천(利川)·철원(鐵原) 등지로 정하였음.
  • [註 125]
    하삼도(下三道) : 충청도·경상도·전라도.
  • [註 126]
    대납(代納) : 어떤 특정인이 그 지방의 공물(貢物)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백성들로부터 배징(倍徵)하던 일.
  • [註 127]
    누호(漏戶) : 호적에 빠지는 것.
  • [註 128]
    출납(出納) : 왕명의 출납.
  • [註 129]
    강호(羌胡) : 중국 5호 16국(五胡十六國) 시대 5호(五胡)의 하나. 서장(西藏) 티베트(Tibeth) 계통의 유목 민족.
  • [註 130]
    후경(侯景) : 양(梁)나라 삭방(朔方) 사람. 무제(武帝) 때 반란을 일으켜 대성(臺城)을 함락하여 진(晉)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한제(漢帝)라 칭하였음.
  • [註 131]
    창우(倡優) : 배우(俳優).
  • [註 132]
    응견(鷹犬) : 황제나 귀족(貴族)들이 사냥할 때 쓰는 매[鷹]와 사냥개를 말함. 즉 사냥하는 것을 이름.
  • [註 133]
    성색(聲色) : 여색.
  • [註 134]
    화리(貨利) : 재리.
  • [註 135]
    국얼(麴糱) : 술.
  • [註 136]
    거실(居室) : 경대부.
  • [註 137]
    한사(漢史) : 한(漢)나라 역사.
  • [註 138]
    내알(內謁) : 은밀한 청.
  • [註 139]
    중귀(中貴) : 내시.
  • [註 140]
    액예(掖隷) : 액정.
  • [註 141]
    척리(戚里) : 임금의 외척.
  • [註 142]
    사신(詞臣) : 문사(文詞)를 맡은 신하.
  • [註 143]
    원호(元昊) : 서하(西夏)의 경종(景宗) 이낭소(李曩霄).
  • [註 144]
    사막(沙漠) : 고비 사막.
  • [註 145]
    투화(投化) : 귀화.
  • [註 146]
    연등(燃燈) : 정월 보름에 불을 켜고 부처에게 복(福)을 빌며 놀던 민속적 의식.
  • [註 147]
    척석(擲石) : 오월 단오날에 돌을 던져서 무예(武藝)를 겨루던 민속 놀이의 하나. 대개 두 패로 나누어 강가에서 행하였음.
  • [註 148]
    황복(荒服) : 중국에서 옛날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5백 리마다 순차적으로 나눈 5복(五服:후복(侯服)·전복(甸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의 하나. 즉 중국 왕성(王城)에서 가장 멀리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말임.
  • [註 149]
    생구(甥舅) : 사위와 장인.
  • [註 150]
    고황제(高皇帝) : 명나라 태조.
  • [註 151]
    무진년 : 1388 고려 우왕 14년.
  • [註 152]
    개원(改元) : 기년(紀年)을 고쳐 쓰는 것.
  • [註 153]
    경계(庚癸)의 사건 : 고려 의종(毅宗) 24년 경인(1170)년과 명종(明宗) 3년 계사(1173)년에 무신(武臣)들이 일으킨 두 차례의 난(亂)을 말함. 무신(武臣) 정중부(鄭仲夫) 등이 문신(文臣)을 학살한 사건임.
  • [註 154]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155]
    고본(藁本) : 첫 초고(草稿).
  • [註 156]
    행성(行城) : 원래 행영성(行營城)을 말하나, 여기서는 변방(邊方)의 강 연안에 직선으로 쌓은 성을 말함.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恭惟我主上殿下, 以文武不世出之資, 新登寶位, 祗謁宗廟, 此正勵精圖治, 以新庶政之時也。 臣不揆鄙拙, 姑將管見, 仰瀆聖聰, 伏惟睿鑑垂察。

一, 得民心。 蓋人君享國之長短, 在於得民心之如何。 自古帝王之興, 以除害救民, 創業於前, 而繼體之主, 又能愛養斯民, 澤洽人心, 故雖衰世, 思先王之德而不能離。 臣以經史考之, 文王始開王業, 武王克成厥勳, 而成王康王相繼撫之, 故人心固結, 至于八百年而不忘。 高帝之虐, 以有天下, 而相與休息, 政在養民, 光武中興, 明帝亦以愛民爲政, 故其歷年至于四百年。 太宗高祖, 平亂而身致太平, 以至玄宗 開元之治, 亦有愛民之意, 故歷年幾三百年。 太祖以上聖之資, 削平五季之亂, 四宗迭作, 百年無事, 高宗南渡, 孝宗又愛民之主也。 故三百年之間, 雖顚沛, 而民心如一日。 至於元嘉文帝世宗大定, 可謂小康, 而或創業無積累之漸, 或繼世無守成之主, 故俱不得歷年之永, 豈可與之仁厚、之寬仁、之仁義、之忠厚, 同日語哉? 吾東方前朝太祖統一三韓, 功德在人, 其後十世, 皆以養民爲務, 故歷年垂五百年。 恭惟我太祖康獻大王以神聖之資, 拯民塗炭, 太宗世宗文宗相繼而作, 道洽政治, 民安物阜, 歷年之久, 固未易量也。 願殿下亦以上天立君愛民之心, 前代得民永年之效, 反覆思之, 全以休養生聚, 勤恤民隱爲事, 則本朝之業, 直與檀君箕子、三國、前朝而竝美矣。 其愛民之道無他, 不過輕徭、薄賦、省刑三者而已。

一, 定制度。 蓋休養生息, 固人君之先務, 而立法定制, 亦不可緩也。 愛民則爲國之本, 立法則馭世之道, 固不可擧此而遺彼也。 若法制未定, 則一時典章, 隨立隨改, 後世子孫, 固無所憑依矣。 故制禮作樂, 武帝家法度, 貞觀開元俱有制作, 以維持一代之體。 但之新法制度太煩, 亦以之基禍。 然則法不可不立, 而亦不可草草爲之也。 吾東方前朝之時, 田柴之科、府衛之制, 至精至詳, 可謂盛矣。 然惟後世田制紊, 而爲私田, 兼竝攘奪, 山川爲標, 兵制廢而爲私兵, 迭侵, 無軍可禦。 本朝太祖世宗之時有《元典》《續典》, 又有謄錄, 皆良法也。 然田制、儀注未成一定之制, 兵制、貢法多爲權宜之法, 豈非盛代之闕典歟? 乞命大臣更加商確, 以定一代之制, 以爲萬世子孫之則, 幸甚。

一, 法前代。 蓋三代之治, 固萬世帝王之所龜鑑也。 然, 亦皆無可法者乎? 但世運有淳漓耳。 若取法漢, 則養民之政至矣, 太宗拔亂濟世之功, 何可少哉? 太祖規模氣象光明正大, 朱子以謂, ‘與合’, 世宗 大定之治, 前史亦稱之。 願殿下上法三代, 兼取之政幸甚。 且東方之人, 徒知有中國之盛, 而不知考東方之事, 甚爲不可, 乞以前朝太祖之救民、成宗之定制、顯宗之守成、文宗之養民爲法, 又以毅宗之喜詩酒、忠烈之好鷹犬、忠惠之嗜宴遊、恭愍之用辛旽爲戒。 然求之於前代, 不若求之於祖宗, 願以太祖之勇智、太宗之英明、世宗之制禮作樂撫養生民, 文宗之專心文敎, 不忘武備爲法, 則不必遠求於他, 而爲治之道, 盡在於此矣。 一, 知大體。 蓋欲知爲國之道, 當知人君之職代天理民也, 用賢以養民也。 願殿下於廣廈細氈之上, 常加聖慮, 當今諸曹、百官何事爲急, 八道之弊何者爲甚。 於是平安道, 議流移蘇復之策, 定節制置司之地, 咸吉道慮六鎭偏重之害, 思龍城置營之便, 黃海疾疫若何以可救, 江原講武場何者可除, 京畿之民賦何以不煩, 而役何以不重也? 又下三道審貢法之行, 除代納之弊, 忠淸以南尤嚴漏戶之禁, 慶尙道愼待之道, 全羅道濟州之守。 如是則外方之弊, 大者皆擧矣。 於是內而吏曹定官制, 戶曹定田制定貢賦, 禮曹定儀注, 兵曹定兵制審陣法, 刑曹定奴婢番上之法, 工曹定輿地圖籍之事。 以之謀議則委政府, 出納則委政院, 諫爭彈劾則委臺諫, 論思則委講官, 任事則委六曹, 至於侵漁外吏, 則罪倉庫吏, 其外方軍民, 令監司、守令、大小水陸將(師)〔帥〕 爲之鍊養, 則內外百官之職, 亦無不盡矣。 於是思家之得民, 立家之制度, 法前(伐)〔代〕 之治, 撮爲國之要, 慮事未然, 謹終于始, 以安靜爲治, 以剛明爲政, 不變國俗, 以禮事大, 接臣僚有法, 待文武如一, 則人君代天理民之道, 斷斷無遺矣。

一, 慮微。 蓋天下之事, 莫不自微而始, 以至於大故。 愚闇之人, 忽之以亡, 之亡以刑戮, 前之亡以外戚, 後之亡以宦官武將, 之亡以宗室弱, 之亡以羌胡處置失宜, 之亡以崇佛以納侯景, 之亡以宴遊以伐高句麗, 之亡以內寵楊貴妃始禍, 而藩鎭、宦官迭爲煽亂, 後之亡以倡優, 後之亡以契丹, 後之亡以主少, 之亡以王安石, 王安石新法立而數世之間, 君子、小人如仇讎矣。 南之亡, 以與夾攻人爲失策也, 之亡以鷹犬, 之亡, 以棄根本之地而南下也, 則夷主中國, 政令無紀, 天下大亂, 無足道矣。 吾東方新羅之亡, 以女主荒淫, 百濟之亡, 以驟勝驕敵也, 高句麗之亡, 以恃强窮兵也。 前朝則初以武臣搆怨而竊柄, 中則嬖倖恃勢而害政, 終則權姦用事而虐民, 至於倭寇四侵民不聊生, 則國不可爲矣。 恭惟我本朝祖功宗德, 無讓前朝, 而家法之正, 則遠過焉。 但前朝兵制之盛, 雖今日或未易擬也。 伏望殿下, 爲天地立心, 爲生民立極, 一言一動不違於天, 一政一事務合乎理, 圖難于易, 爲大於細, 則宗祧幸甚, 生民幸甚。

一, 謹始。 蓋人君卽位之初, 百官之所瞻仰, 萬民之所倚望, 隣國之所聽聞, 而子孫萬世之基, 正在於此, 而人主操駕馭之權, 以奔走一世之人, 故干進之人, 或以邊功, 或以土木, 或以佛神, 或以詞章, 或聲色、貨利, 或鷹犬、麴糱, 乘間投隙, 雜然而進, 人主不悟一事之中, 則始之不謹, 終不可言矣。 且孟子云, "爲政不難, 不得罪於巨室。" 人主聽諫, 則士大夫之心翕然矣, 不然則反是矣。

一, 尙安靜。 蓋持盈守成之君, 在謹守成規而已。 如有可救之弊, 則漸改之使如前規而已。 故治民如烹鮮, 能勿擾之足矣。 民心一搖, 則邦本危矣, 之新法是已。 然則弊法, 固不可不更張, 而人君所尙者安靜而已。 史云, "載其淸靜, 民乃寧謐。" 此之謂也。

一, 重剛明。 蓋人君之德, 莫大於仁, 仁厚則與剛明似相反也, 非剛明, 則內謁盛行, 中貴驕橫, 小竪專恣。 戚里恃恩, 權臣竊柄, 詞臣取寵, 姦臣、佞臣左右逢迎, 而讒諛得志, 則雖有仁厚之政, 不得如其志矣, 此人君之德, 所當剛明者也。

一, 儀從本俗。 蓋臣聞, 西夏以不變國俗維持數百年, 元昊英雄也。 其言曰, "錦衣玉食, 非蕃性所便", 金世宗亦每念上京風俗, 終身不忘。 有南、北府, 官, 而元人則以根本爲重, 故雖失中原, 沙漠以北如古也。 吾東方世居遼水之東, 號爲萬里之國。 三面阻海, 一面負山, 區域自分, 風氣亦殊。 檀君以來設官置州, 自爲聲敎, 前朝太祖作信書敎國人, 衣冠、言語悉遵本俗。 若衣冠、言語, 與中國不異, 則民心無定, 如。 前朝之於蒙古, 不逞之徒相繼投化, 於國家甚爲未便。 乞衣冠則朝服外, 不必盡從華制, 言語則通事外, 不必欲變舊俗, 雖燃燈、擲石, 亦從古俗無不可也。

一, 事大以禮。 蓋以小事大, 禮之常也, 自古皆然。 我國家實東方荒服之地也。 邈處日出之濱, 且有山谿之險, 之盛, 猶不得臣, 用隣國之禮, 稱父母之邦, 以賓禮, 通婚媾。 然則用兵數十年, 卒以臣服, 雖稱甥舅, 東海之事, 與昔日不同矣。 我高皇帝卽位欲加兵, 則天下初定, 不之加則無以示威, 拘行人以辱之, 增歲幣以困之, 後至戊辰, 天威始霽, 而蕃國之封定, 蕃國之勢, 與畿內之勢異, 事大之禮, 不可不盡, 而又不可以數也。 前朝則稱宗改元矣, 在今日小小節次, 不必拘例, 但盡其誠意而已。 今後例恩附表以謝, 勿煩使命, 以休平安之民, 以存事大之體幸甚。

一, 待臣僚有法。 蓋人君貴, 無與敵也。 然待下當以禮。 敢諫者, 不可曰干名也, 勤幹者, 不可曰爲祿也。 雖有干名爲祿之人, 當取其敢諫勤幹而已。 至於死喪之際, 施之以恩, 刑獄之間, 待之以禮。 國家以如此忠厚之俗待士而成風, 則百世士大夫亦皆以忠厚報其上矣。

一, 待文武如一。 蓋自古文武之間, 猜嫌易起。 文吏有勢而淸要, 武班勤苦而無權, 萬一人主偏信詞臣, 而言語禮貌之間待之或異, 則前朝庚癸之事, 誠可慮也。 毅宗以後至于忠烈, 武臣執柄, 芟夷朝廷, 幾盡以文武交構故也。 今政府、政院以至臺諫, 皆以文武交差, 其慮亦周矣。 然兵曹鎭撫所使令、令史之待別侍衛甲士, 甚爲苛薄, 至於侍衛牌, 則視之如奴隷焉。 臣觀殿下之待文武, 可謂如一。 乞自今昇平百年, 毋忘今日, 則宗社幸甚, 臣民幸甚。 臣竊惟司馬光以爲, "人君處心之要有三, 曰仁、明、武, 治國之要亦有三, 曰任人、聽諫、賞罰", 以此爲疏, 獻于四朝, 臣亦以此六事反覆參詳, 於壬申冬獻于上王。 今其藁在政院, 伏望殿下命寫一通, 特賜睿覽, 不勝幸甚。

上命取壬申年疏及罷行城疏以觀, 謂誠之曰: "汝之兩疏, 皆甚切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歷史)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