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28일 경진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성삼문·이개 등이 환관에게 봉군하는 일의 불가함을 아뢰다

좌사간(左司諫) 성삼문(成三問)·집의(執義) 이개(李塏)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가만히 생각건대, 환시(宦寺)가 예로부터 국가의 환(患)이 된 것은 오래이오니, 처음에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가 반드시 망국(亡國)·패가(敗家)에 이르고야 맙니다. 이는 진실로 뒤를 계승한 임금과 재상이 조종(祖宗)의 옛법[舊章]을 따르지 않으며, 후세의 환(患)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경이(輕易)하게 한 때문입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망함이 모두 이들 때문이었으니, 그 근원은 화제(和帝)1177) ·고조(高祖)1178) 의 규약을 변경하여 정중(鄭衆)을 후(侯)로 삼고, 현종(玄宗)1179)태종(太宗)1180) 의 제도를 개정하여 고 역사(高力士)를 공(公)으로 삼아, 마침내 뒤에 올 침고(沈痼)의 질환을 이루어서 끝내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에 이르러 후회한다 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진종(眞宗)1181) 때에 유승규(劉承規)가 충근(忠謹)으로서 총행(寵幸)을 받았는데,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절도사(節度使)가 되기를 구하자, 진종이 말하기를, ‘유승규에게 이를 대접하여 눈을 감게 하라.’하니, 대신 왕단(王旦)이 불가함을 고집하기를, ‘이는 타일(他日)에 추밀사(樞密使)가 되기 위한 계제를 구하는 것이니, 따를 수 없습니다.’하여 마침내 그만두었습니다. 이로부터 환시의 권한이 점점 쇠미하여졌는데도 뒷날에 오히려 동관(童貫)의 화(禍)가 있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진실로 엎어진 수레바퀴[覆轍]가 앞에 있는데도 뒤따르던 수레[後車]가 경계하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당나라가 한나라를 거울삼지 아니하여 이로써 망하였고, 송나라가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울삼지 아니하여 또한 이로써 망하였습니다. 지금 한나라나 당나라·송나라의 뒤에 있으면서 한·당·송나라로 경계를 삼지 아니하면, 한·당·송나라의 화를 면할 수 없음은 사세로 보아 필연(必然)한 일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엄자치(嚴自治)·전균(田畇)은 전하의 가노(家奴)입니다. 만약 공이 있어 이를 포상하시려면, 재백(財帛)과 전민(田民)을 하사하시면 가합니다. 무릇 봉군(封君)을 중국[中朝]에 비유하면 5등(五等)1182) 의 작위[爵]로서 대우의 융성함이 항상 양부(兩府)1183) 의 위에 있어서, 비록 대신이라도 큰 공이 있지 않으면 또한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엄자치 등이 공신의 열에 끼인 것만도 이미 해괴스러운데, 여기에 중한 호칭까지 더하여 작명(爵命)을 가볍게 더럽히고 조종(祖宗)의 조정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비록 김사행(金師幸)을 구실[藉口]로 삼으나, 김사행고려가 혼란(昏亂)의 극에 달하였을 때에 총행(寵幸)을 인연하여 극품(極品)에 이르렀던 것이며, 〈우리〉 국초(國初)에는 다만 그 옛것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천주(天誅)를 당하였으니, 어찌 총우(寵遇)와 횡자(橫恣)의 극(極)이 이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는 이들을 매우 엄하게 대접하여, 공로가 있어도 상을 함부로 주지 않았고, 죄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으니, 진실로 이들을 대우함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헌의(獻議)한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봉군(封君)은 권병(權柄)도 없고 직사(職事)도 없이 한갓 허호(虛號)만 있을 뿐이라.’고 할 것이나, 이는 생각치 못한 것입니다. 지금 태종·세종의 교훈[貽謀]과 유범(遺範)이 후세를 위하여 걱정하신 바가 매우 잘 갖추어져 있고, 또, 전하의 밝으신 예지(睿智)와 보필하는 대신들이 고금(古今)을 통하고 대체(大體)를 잘 앎으로도, 세종 시대가 지난 지 오래지 아니한데도 오히려 오늘날의 일이 있어, 그 순치(馴致)의 형세1184) 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니, 후일(後日)에 한나라나 당나라·송나라의 말류(末流)의 폐단이 없기를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신 등이 그윽이 헤아리건대, 이 일은 결코 신충(宸衷)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반드시 헌의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과 헌의한 대신·정부·육조(六曹)·신종하는 신료(臣僚)들을 불러, 이들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논힐(論詰)하게 하여, 전하께서 천천히 들으시고 익히 생각하시어, 신 등의 말이 잘못되었다면 마땅히 잘못된 견해를 고집한 죄를 밝게 다스리시고, 그렇지 아니하면 마땅히 곧 윤가(允可)하시어 성명(成命)을 거두셔서, 일국(一國)의 신민(臣民)의 바람을 쾌(快)하게 하시면, 만세토록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으나,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49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註 1177]
    화제(和帝) : 후한(後漢)의 4대 황제.
  • [註 1178]
    고조(高祖) : 한(漢)나라의 시조.
  • [註 1179]
    현종(玄宗) : 당의 7대 황제.
  • [註 1180]
    태종(太宗) : 당의 2대 황제.
  • [註 1181]
    진종(眞宗) : 송의 3대 황제.
  • [註 1182]
    5등(五等) :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말함.
  • [註 1183]
    양부(兩府) : 조선조 때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원(中樞院)을 아울러 일컫던 말.
  • [註 1184]
    형세 : 점차로 나쁜 결과가 오는 형세. 그 조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함.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그 도에 익고 극진하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馴致其道 至堅氷也]"하였음.

○左司諫成三問、執議李塏等上疏曰:

臣等竊惟, 宦寺之自古爲國家患, 久矣。 始之不謹, 則末流之弊, 必至於亡國、敗家而後已。 良由繼體之君相, 不率祖宗之舊章, 不憂後世之患, 而輕易爲之也。 之亡, 皆由此輩, 而其源則和帝高祖之約而封鄭衆爲侯, 玄宗太宗之制而封力士爲公, 遂成後來沈痼之疾, 終至不救。 至是, 雖欲悔之, 其能及乎? 眞宗時, 劉承規以忠謹得幸, 病且死, 求爲節度使。 眞宗曰: "承規, 待此瞑目。" 大臣王旦執不可曰: "此, 他日求爲樞密使之階也, 不可從。" 遂止。 自是, 宦寺之權寢衰, 而猶有後日童貫之禍。 此無他, 良由覆轍在前, 而後車不戒也。 不鑑而以此亡, 不鑑而亦以此亡。 今居之後, 而不以爲戒, 則未免於之禍, 勢之必然, 可不戒乎? 今嚴自治田畇, 殿下之家奴也。 若以有功而賞之, 則賜以財帛、田民可也。 夫封君, 比之中朝, 五等之爵, 待遇之隆, 常在兩府之上, 雖大臣, 非有大功, 且猶不可。 況自治等得列功臣, 已爲可駭, 而加之以重號, 輕褻爵命, 卑辱祖宗之朝廷乎? 雖或以金師幸爲藉口, 然師幸高麗昏亂之極, 夤緣寵幸, 以至極品, 國初但因其舊耳。 然竟伏天誅, 豈非寵遇橫恣之極, 有以致之乎? 我太宗世宗待此輩甚嚴, 而有勞不濫賞、有罪不少貸者, 誠以待此輩不得不爾也。 獻議者必以爲: "封君無權柄、無職事, 徒有虛號耳。" 寔未之思也。 今以太宗世宗之貽謀、遺範, 爲後世慮甚備。 且以殿下之明睿, 輔弼大臣之通古今、識大體, 去世宗未久, 而尙有今日之事, 其馴致之勢, 在所必至, 其能保後日, 無末流之弊乎? 臣等竊料此事, 決非出於宸衷, 必有獻議者。 願殿下召臣等及獻議大臣、政府、六曹、侍從臣僚, 使之論詰可否。 殿下徐聽而熟思之, 以臣等之言爲非, 則當明治固執謬見之罪, 不然, 則宜卽允可, 還收成命, 以快一國臣民之望, 萬世幸甚。

留中不下。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49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