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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18일 경오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성삼문 등이 환관 엄자치와 전균에게 봉군한 명령을 거두어주기를 청하다

좌사간(左司諫) 성삼문(成三問)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듣건대, 정난 공신(靖難功臣)을 봉하던 날에 환관 엄자치(嚴自治)전균(田畇)이 공이 있다고 하여, 예(例)에 따라 2품 이상으로 봉하여 엄자치영성군(寧城君)으로 삼고, 전균강천군(江川君)으로 삼았다 합니다. 무릇 공이 있으며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이 고금(古今)에 통한 법칙이나, 은혜에 시행하지 못할 바가 있고 의리에 불가한 바가 있사오니,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寺人)1085) 의 벼슬이 시례(詩禮)에 실려 있으므로, 예로부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3대(三代)1086) 이전에는 맡은 바 직책이 규달(閨闥)1087) 의 법금(法禁)을 관장하는 데 불과하고, 내외(內外)의 말을 통(通)할 뿐이었는데, 후세에 내려옴에 미쳐 총행(寵幸)이 점차 융성해져서, 화패(禍敗)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간혹 총명하고 지혜로운 임금이 있어서 권위(權威)를 빌[假]지 못하고 충근(忠謹)한 사람은 스스로 겸손하여 사양[謙退]함을 지켜, 능히 종시(終始)를 보전하고 영원히 이름을 후세에 남겼으니, 옛 첩서(牒書)를 상고하면 이런 사례를 갖추 볼 수 있습니다. 환관의 봉후(封侯)는 중국 한(漢)나라 화제(和帝) 때에 비롯되어 정중(鄭衆)1088)두헌(竇憲)1089) 을 죽였을 때 그 공이 으뜸이었으므로 영지(領地)를 봉(封)하게 되었습니다. 정중이 비록 현명한 사람이나 정당치 못한 예(例)의 단서(端緖)를 열어, 후세에 환시(宦寺)의 환난(患難)의 계제(階梯)를 만들었습니다. 그 뒤 손정(孫程) 등은 염현(閻顯)을 베고, 단초(單超) 등은 양기(梁冀)를 토벌하여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져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그 해독이 천하에 퍼졌습니다. 조충(趙忠)·장양(張讓) 등에 이르러서는 총애가 있어 제후로 봉하여져서,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하여, 자신에게만 화가 미쳤을 뿐 아니라 나라도 곧 망하였습니다. 당나라[李唐]1090) 에 이르러서 그 화가 더욱 심하였으니, 처음에 태종이 제도를 정함에 있어 내시성(內侍省)에 삼품관(三品官)을 두지 않고, 일을 맡기지 아니하고 늠식(廩食)만 주었을 뿐이었는데, 현종(玄宗)에 이르러서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가볍게 고쳐, 고역사(高力士)1091) 를 총애하여 국공(國公)으로 삼아 장주(章奏)를 결재하게 하였다가, 마침내 귀양가서 죽게 하였으며, 그 후 이보국(李輔國)1092) 은 군왕(郡王)으로 진봉(進封)되고 재상(宰相)을 겸임하였다가, 역시 화가 미쳤습니다. 이후로부터 〈황제의〉 총임(寵任)이 날로 성하였으나 하나도 보전(保全)함이 없었고, 당나라도 역시 이로 인하여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라의 여강(呂强)과 당나라의 유정량(劉貞亮)은 그 중에서 가장 걸연(傑然)한 자이었습니다. 여강의 사람됨은 충직(忠直)하고 청렴(淸廉)하게 봉공(奉公)하여,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예(例)에 의하여 환시(宦寺)를 봉하고, 여강을 봉해 도향후(都鄕侯)를 삼으니, 여강이 상소하기를, ‘환관은 품이 낮고 사람이 천한데, 폐하(陛下)께서 망령되게 모토(茅土)를 주시어 개국(開國) 승가(承家)하게 하시니, 소인이 등용되면 음양(陰陽)에 어그러져서, 이로 말미암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사양하기를 지극히 간절히 하니, 황제가 곧 이를 들어 주었습니다. 유정량도 또한 충성되고 강직하여 이치를 알아서 헌종(憲宗)을 도와 세우고, 왕숙문(王叔文)의 간당(姦黨)을 모두 쫓아내고 곧 대신에게 정치를 맡기고 물러나 자처(自處)하여, 추호도 침문(侵紊)1093) 함이 없었고, 헌종도 또한 그를 총애하여 권세를 주는 바가 없어, 사책(史冊)에 그 아름다움을 일컫고 있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지난날 영제여강의 말로 인하여 봉후(封侯)의 일을 그만두고, 헌종이 처음의 선한 마음을 써서 끝까지 잘 하게 할 계책을 삼게 하였다면, 몸과 나라가 어찌 패(敗)하며, 어지러움이 있었겠습니까? 또, 당시의 환시들로 하여금 모두 유정량여강처럼 겸손히 물러나고 충근(忠謹)하게 하였다면, 어찌 몸이 죄에 빠져 주륙(誅戮)되고, 악이 후세에까지 미쳤겠습니까? 진실로 잘한 말입니다.

송(宋)나라 유학자 진덕수(眞德秀)1094) 의 말에 이르기를, ‘한나라·당(唐)나라의 환시(宦寺)로서 충근(忠謹)한 자는 복(福)을 얻지 않은 자가 없고, 교만하고 방자한 자는 화(禍)를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인주가 이를 알면 능히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나라가 보전되면 집도 또한 보전된다. 그리고, 내시(內侍)가 이를 알면 능히 그 몸을 보전할 수 있고, 몸이 보전되면 나라도 또한 보전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부시(婦寺)1095) 의 직(職)이 궁중[中闈]에 고르게 있으니, 부인이 능(能)함이 있다고 하여 귀(貴)해질 수 없는데, 환시가 어찌 공이 있다고 하여 귀해질 수 있겠는가? 공이 있으면 총애를 받게 되고, 총애를 받게 되면 교만 방자하게 되니, 비록 화(禍)가 없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확실한 논리입니다. 우리 국초(國初)에 전조(前朝)1096) 의 옛 제도를 따라 환관이 혹 봉군(封君)되기도 하고, 혹 조정에 참여하여 김사행(金師幸)1097) 이 마침내 화(禍)를 당해 패하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명감(明鑑)입니다. 태종(太宗)께서 즉위하자, 〈이들을〉 보전(保全)하려고 생각하여 일을 맡기지 아니하시고, 의물(儀物)을 감쇄(減殺)1098) 하여, 이들로 하여금 당상관(堂上官)에 함께 있을 수 없게 하시고, 세종 때에는 내시(內侍)의 자급(資級)을 가정 대부(嘉靖大夫)1099) 에서 그치게 하여 영구한 법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환관은 한 사람도 총귀(寵貴)로 인하여 패한 일이 없었으니, 어찌 군신의 사이에 양득(兩得)이 아니겠습니까? 이로써 말하면, 오늘날 두 사람의 봉군(封君)에 대한 일은 옛 법을 따르는 뜻에 합하지 못하고, 또 공신을 보전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는 듯합니다. 신 등이 감히 말하는 것은, 이들 두 사람의 공이 없다고 하여 전하의 상(賞)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전일(前日)의 은총(恩寵)이 뒷날에 환난(患難)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여서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 〈이들을〉 봉군(封君)하여 명일(明日)에 위망(危亡)함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처음에 삼가지 않으면 중국에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다시 잘 생각하시어 이상(履露)1100) 의 조짐을 경계하고, 정당치 못한 예를 만드는 잘못[作俑之非]을 생각하시며, 한나라와 당나라의 전철(前轍)을 깊이 거울 삼으셔서, 빨리 봉군(封君)의 명령을 거두시고, 다른 물건으로 후사(厚賜)하시어 그 공에 보답하시면, 거의 위로는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가히 공이 있는 자로 하여금 보전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정부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42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 / 인사-관리(管理) / 왕실-궁관(宮官) / 역사-고사(故事) / 정론(政論)

  • [註 1085]
    시인(寺人) : 환관.
  • [註 1086]
    3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1087]
    규달(閨闥) :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宮殿).
  • [註 1088]
    정중(鄭衆) : 후한(後漢) 때 수우(雔牛) 사람. 자(字)는 계산(季産), 관(官)은 장제(章帝) 때 중상시(中常侍), 뒤에 의사(議事)에 참여하여 환관의 전정(專政)의 터를 만들었음.
  • [註 1089]
    두헌(竇憲) : 후한 때의 평릉(平陵) 사람. 누이가 황후가 되어 거기 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된 뒤 국가에 공이 많았으나, 교만하고 방자하였으므로, 황제가 정중과 의논하고 두 헌의 인(印)을 몰수하여 자살하게 하였음.
  • [註 1090]
    당나라[李唐] : 중국 당(唐)나라를 말함. 당(唐)나라는 이연(李淵)이 세웠으므로 ‘이씨(李氏)의 당(唐)나라’라는 뜻에서 쓴 것임.
  • [註 1091]
    고역사(高力士) : 당나라 현종때의 환관.
  • [註 1092]
    이보국(李輔國) : 당나라 현종때의 환관.
  • [註 1093]
    침문(侵紊) : 침노하여 문란하게 함.
  • [註 1094]
    진덕수(眞德秀) : 송(宋)나라 때 유학자.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저자.
  • [註 1095]
    부시(婦寺) : 부인과 환관.
  • [註 1096]
    전조(前朝) : 고려.
  • [註 1097]
    김사행(金師幸) : 고려 말 조선 초의 환관. 공민왕(恭愍王) 이후 조선 태조(太祖)에 이르기까지 왕의 총애를 입어 말을 타고 궁중에 드나드는 위세를 떨쳤으나, 1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삼군부(三軍府)의 문에 효수(梟首)되었음.
  • [註 1098]
    감쇄(減殺) : 감하여 없앰.
  • [註 1099]
    가정 대부(嘉靖大夫) : 정2품의 자급.
  • [註 1100]
    이상(履露) : 서리를 밟으면 장차 얼음이 언다는 뜻으로 장래를 경계하는 말.

○庚午/左司諫成三問等上疏曰:

臣等伏聞, 封靖難功臣之日, 以宦官嚴自治田畇有功, 例以二品以上, 封自治寧城君田畇江川君。 夫有功必賞, 古今通規。 然恩有所不施, 義有所不可。 臣等不得不爲殿下陳之。 寺人之官, 載於《詩》《禮》, 自古所不能無也。 然三代以前, 所職不過掌閨闥之禁、通內外之言而已。 降及後世, 寵幸寢盛而禍敗相尋。 間有明智之君, 不假權威, 忠謹之人, 自執謙退, 乃能保全終始, 垂名不朽。 考諸往牒, 事具可見。 宦者封侯, 始於和帝時, 鄭衆竇憲, 以功首, 分茅土之封。 雖賢者, 而開端作俑, 以階後世宦寺之患。 其後孫程等誅閻顯單超等討梁冀, 皆封列侯, 恃寵專權, 流毒天下。 及至趙忠張讓等有寵封侯, 橫恣無忌, 不惟身及於禍, 國隨以亡。 至於 , 其禍尤甚。 初, 太宗之定制也, 內侍省不立三品官, 不任以事, 廩食而已。 至于玄宗, 輕變祖宗之舊, 力士以幸封爲國公, 使決章奏, 卒以流死。 其後李輔國進封郡王, 兼任宰相, 亦及於禍。 自此以後, 寵任日盛, 無一保全, 而亦以此終。 獨呂强劉貞亮, 最其中之傑然者也。 之爲人忠淸奉公, 靈帝時, 例封宦寺, 封都鄕侯, 上疏曰: "宦官品卑人賤, 而陛下妄授茅土。 開國承家, 少人是用, 陰陽乖剌, 罔不由玆。" 因辭讓懇惻, 帝乃聽之。 貞亮亦忠彊識理, 扶立憲宗, 盡逐王叔文姦黨。 乃委政大臣, 退然自處, 無秋毫侵紊, 而憲宗亦無所寵假, 史稱其美。 臣等以爲, 向使靈帝呂强之語, 而寢封侯之擧、憲宗用善始之心, 而爲克終之計, 則身與國豈有敗且亂哉? 又使當時之宦寺盡如貞亮呂强之謙退忠謹, 則亦豈有身陷罪戮而惡流於後哉? 善哉! 眞德秀之言, 曰: "之宦寺忠謹者, 未嘗不獲福; 驕恣者, 未嘗不罹禍。 人主而知此, 則能全其國, 國全則家亦全矣。 內侍而知此, 則能全其身, 身全則國亦全矣。" 又曰: "婦寺之職, 均在中闈。 婦不貴於有能, 則寺豈貴於有功哉? 有功則寵, 寵則驕橫, 雖欲無禍, 得乎?" 此誠確論也。 國初因前朝之舊, 宦官或得封君、或參朝政, 而金師幸卒以禍敗, 此亦明鑑也。 太宗卽位, 思欲保全, 不任以事, 減殺儀物, 使不得同於堂上官。 世宗之時, 內侍資級止於嘉靖, 永爲定法。 自此宦寺無一人以寵貴敗君臣之間, 豈不兩得之哉? 以此言之, 今日二人之封君, 似未合於率由舊章之意, 亦有乖於保全功臣之道。 臣等之敢言, 非謂二人無功而沮殿下之賞也, 誠以有寵於前, 不若無患於後也。 又非謂今日封君而明日危亡也, 誠以不謹於初, 則無及於終也。 伏望, 殿下更留睿思, 戒履霜之漸, 思作俑之非, 深鑑之轍, 亟收封君之命, 厚賜他物, 以酬其功。 庶幾上不負祖宗之成憲, 下可使有功者保全。

命議于政府。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42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 / 인사-관리(管理) / 왕실-궁관(宮官) / 역사-고사(故事)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