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로의 간사한 성품과 반역죄로 효수당하기 전까지의 행적
이현로(李賢老)가 이용(李瑢)에게 당부(黨附)하여 밤낮으로 세조를 얽어 모략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있을 때에 남의 뇌물을 받고 속여서 관직을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폄축(貶逐)되었으나 용서를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용(瑢)이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의 술(術)을 안다 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부탁하여 천거하여, 문종의 산릉 도감(山陵都監) 낭청(郞廳)으로 삼아 드디어 선공 부정(繕工副正)이 되었다. 이현로가 임의로 정부(丁夫)919) 를 감하여 면포(綿布)를 거두고 연해(沿海) 여러 고을에 정부(丁夫)를 보내어 널리 해착(海錯)920) 을 토색하고, 새로 집기(什器)를 만들어 매양 산릉 제조(山陵提調)가 예빈시(禮賓寺)에 와서 모일 때 공찬(公饌)921) 이 겨우 베풀어지면 이현로가 친히 사사로이 갖춘 것을 가져다가 바꾸어 놓고 팔뚝을 뽐내며 스스로 자랑하였다. 세조가 용(瑢)·황보인·김종서와 더불어 함께 제조(提調)로서 능소(陵所)에 왕래하는데 이현로가 밤에는 가만히 용(瑢)과 정부(政府)의 하처(下處)922) 에 나아가서 성대하게 주찬(酒饌)923) 을 베풀고, 항상 용(瑢)을 불러 ‘우리 대군(大君)’이라 하였다. 세조가 이현로를 매질한 뒤로부터는 용(瑢)에게 붙은 정부의 사람과 용의 문객이 더욱 의구심(疑懼心)을 품어 밤낮으로 모여 모의하였다. 또한 노산군(魯山君)이 어리어 권세가 정부(政府)로 돌아갔는데, 정부와 요지(要地)가 모두 용(瑢)의 우익(羽翼)인 것을 보고 서로서로 이끌어 주었다.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안완경(安完慶)·체찰사(體察使) 정분(鄭笨)을 따라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종자(從者)가 술을 찾아 먹이니, 이현로가 말하기를,
"뜻밖에도 내가 묶이어 담 밑에서 술을 마시는구나!"
하였다. 이현로가 성품이 간사하여 꾀가 많고, 아첨하여 이(利)를 좋아하여 항상 기절(奇節)924) 을 세우고자 하며, 또 음양(陰陽)의 비술(祕術)과 활 쏘고 말타는 병략(兵略)을 좋아하고 그 재주를 자랑하여 걸핏하면 예전의 유명한 사람을 끌어서 스스로 비교하며, 사람과 말할 때는 반드시 어깨를 치키고 팔을 벌려 성기(聲氣)를 거짓으로 지어 방약무인(傍若無人)이었다. 무릇 자그마한 일도 반드시 괴이(詭異)한 이름을 숭상하여 그 종에 갓을 만드는 자를 초공(草工)이라 하고, 신을 만드는 자를 혁공(革工)이라 하고, 풀무질을 하는 자를 금공(金工)이라 하여, 사람을 대해서도 그렇게 불러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불령(不逞)한 사람들을 꾀어 들여 노복으로 부렸는데, 저들 역시 풍지(風旨)925) 를 이어받아 분주하게 사역에 복종하여 혹시라도 뒤질까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사천(泗川)으로 귀양갈 때에 의상(衣裳)과 기물이 무려 수십 바리가 되어 모두 건장한 종에게 맡겼는데, 실상은 가동(家僮)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도 수행하는 자가 또한 많았는데, 주형(誅刑)을 당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사람됨이 여우처럼 아첨하고 원숭이처럼 사특하여 음흉하고 걸힐(桀黠)926) 한 것이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 동료 강희안(姜希顔)이 자제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녀석을 가까이 하지 말라. 마침내 제 집안에서 죽을 자가 못된다. 내가 일찍이 이 녀석의 골통을 보니, 피에 얼룩진 형상인데, 어떻게 생긴 노파가 이 녀석을 길러냈을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24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註 919]정부(丁夫) : 군역을 담당하던 장정(壯丁).
- [註 920]
해착(海錯) : 해산물.- [註 921]
공찬(公饌) : 예빈시(禮賓寺)에서 나라와 관아(官衙)의 연회(宴會)를 위하여 마련하던 음식물을 말함.- [註 922]
하처(下處) : 임시로 머물러 쉬는 곳. 여사(旅舍).- [註 923]
주찬(酒饌) : 술과 안주.- [註 924]
○李賢老黨附於瑢, 日夜謀構世祖, 無所不至。 嘗以兵曹正郞, 受人財賄, 濫授官職, 事發貶逐, 蒙宥還京。 瑢以賢老知風水之術, 屬議政府, 薦爲文宗山陵都監郞廳, 遂爲繕工副正。 賢老擅減丁夫, 收綿布, 遣沿海諸邑丁夫, 廣索海錯, 新作什器, 每山陵提調來會禮賓寺, 公饌纔設, 賢老親捧私具換設, 攘臂自誇。 世祖與瑢、皇甫仁、金宗瑞, 俱以提調, 往來陵所。 賢老夜則潛詣於瑢及政府下處, 盛陳酒饌, 常呼瑢爲我大君。 自世祖鞭賢老之後, 政府之附瑢者及瑢門客, 益懷疑懼, 日夜聚謀。 且觀魯山幼沖, 柄歸政府, 政府及要地, 皆瑢羽翼, 轉相汲引。 賢老落職, 從忠淸道觀察使安完慶、體察使鄭苯至忠州, 未及下馬, 捕者捽下, 縛置墻陰。 從者索酒饋之, 賢老曰: "不意吾縛在墻陰飮酒耶。" 賢老性姦詐多謀, 謟侫好利, 常欲立奇節。 又好陰陽秘術、射御兵略, 誇詫其才, 動引古昔名人自比。 與人言, 必聳肩張拱, 假作聲氣, 旁若無人。 凡細碎之事, 必尙詭異, 名其奴造笠者曰草工, 造鞋者曰革工, 爐冶者曰金工, 對人呼召, 恬不爲愧。 誘致群不逞之人, 奴僕使之, 彼亦承風望旨, 奔走服役, 猶恐或後。 嘗謫泗川, 衣裳器物無慮數十駄, 悉令健僕掌之, 實非家僮也。 至是, 從行者亦多, 及誅四散。 其爲人狐媚狙詐, 陰兇桀黠, 無與爲比。 其僚姜希顔戒子弟曰: "勿近此子, 終非得死牖下者。 吾嘗見此子髑髏有血糢糊之狀, 何物老媪卵育此子歟?"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24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註 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