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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 8권, 단종 1년 10월 10일 계사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세조가 이용과 결탁하여 반역하고자 했던 김종서·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효수하다

세조가 새벽에 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홍달손(洪達孫)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 아뢰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여러 무사(武士)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조용히 이르겠으니, 그대들은 느지막에 다시 오라."

하고, 드디어 무사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한낮쯤 되어 권남이 다시 왔다. 세조가 나와 보고 말하기를,

"강곤(康袞)·홍윤성(洪允成)·임자번(林自蕃)·최윤(崔閏)·안경손(安慶孫)·홍순로(洪純老)·홍귀동(洪貴童)·민발(閔發) 등 수십 인이 와서 더불어 과녁을 쏘는데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곽연성(郭連城)은 이미 왔으나 어미의 상중(喪中)으로 사양하기에, 여러 번 되풀이하여 타이르니, 비록 허락은 하였으나 어렵게 여기는 빛이 있다. 그대가 다시 말하라."

하고, 세조는 도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권남곽연성을 보고 말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지금 종사의 큰 계책으로 간사한 도적을 베고자 하는데,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이니, 자네는 장차 어찌하려는가?"

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들었습니다. 장부가 어찌 장한 마음이 없을까마는 최복(衰服)이 몸에 있으니 명령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지금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하여 의(義)를 일으키는 것인데, 자네가 어찌 구구하게 작은 절의(節義)를 지키겠는가? 또 충과 효에는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자네는 구차히 사양하지 말고 큰 효를 이루라."

하였다. 곽연성이 말하기를,

"수양 대군께서 이미 명령이 있으니 마땅히 힘써 따르겠으나,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니, 그대는 자세히 방략(方略)을 말하여 보라."

하였다. 권남이 하나하나 말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나머지는 의논할 것이 없고, 다만 수양 대군께서 김종서의 집을 왕래하는 데 이르고 늦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성문이 만일 닫히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이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마땅히 선처하겠다."

하였다. 해가 저무니 홍달손(洪達孫)이 감순(監巡)으로 먼저 나갔다. 세조가 활 쏘는 것을 핑계하고 멀찌감치 무사 등을 이끌고 후원 송정(松亭)에 이르러 말하기를,

"지금 간신 김종서(金宗瑞)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하여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李瑢)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 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하고,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민발(閔發) 등은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

하니, 의논이 분운(紛紜)하여 혹은 북문을 따라 도망하여 나가는 자도 있었다. 세조한명회에게 이르기를,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계교가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큰 일이겠습니까? 일에는 역(逆)과 순(順)이 있는데, 순으로 움직이면 어디를 간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모의(謀議)가 이미 먼저 정하여졌으니,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 청컨대 공(公)이 먼저 일어나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홍윤성(洪允成)이 말하기를,

"군사를 쓰는 데에 있어 해(害)가 되는 것은 이럴까 저럴까 결단 못하는 것이 가장 큽니다. 지금 사기(事機)가 심히 급박하니, 만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른다면 일은 다 틀릴 것입니다."

하였다. 송석손 등이 옷을 끌어당기면서 두세 번 만류하니,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다 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활을 끌고 일어서서, 말리는 자를 발로 차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지금 내 한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하고, 중문에 나오니 자성 왕비(慈聖王妃)가 갑옷을 끌어 입히었다. 드디어 갑옷을 입고 가동(家僮) 임어을운(林於乙云)을 데리고 단기(單騎)로 김종서(金宗瑞)의 집으로 갔다. 세조가 떠나기 전에 권남한명회가 의논하기를,

"지금 대군이 몸을 일으켜 홀로 가니 후원(後援)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권언(權躽)·권경(權擎)·한서구(韓瑞龜)·한명진(韓明溍)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 안 내성(內城) 위에 잠복하게 하고, 또 양정(楊汀)·홍순손(洪順孫)·유서(柳溆)에게 경계하여 미복(微服) 차림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세조가 처음에 권남에게 명하여 김종서를 그 집에 가서 엿보게 하였다. 권남투자(投刺)912) 하니, 김종서가 〈불러들여〉 별실에서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남이 돌아와 보고하니, 세조가 이미 말에 올라탔다. 세조김종서의 집 동구(洞口)에 이르니, 김승규(金承珪)의 집앞에 무사 세 사람이 병기를 가지고 귀엣말을 하고 있고 무기(武騎) 30여 인이 길 좌우를 끼고 있어 서로 자랑하기를,

"이 말을 타고 적을 쏘면 어찌 한 화살에 죽이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세조가 이미 방비가 있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하기를,

"누구냐?"

하니, 그 사람들이 흩어졌다. 양정(楊汀)은 칼을 차고 유서(柳溆)는 궁전(弓箭)을 차고 왔다. 세조양정으로 하여금 칼을 품에 감추게 하고 유서를 정지시키면서 김종서의 집에 이르니, 김승규가 문 앞에 앉아 신사면(辛思勉)·윤광은(尹匡殷)과 얘기하고 있었다. 김승규세조를 보고 맞이하였다. 세조가 그 아비를 보기를 청하니, 김승규가 들어가서 고하였다. 김종서가 한참 만에 나와 세조가 멀찍이 서서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들어오기를 청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하였다.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세조가 굳이 거절하니, 김종서가 부득이하여 앞으로 나왔다. 김종서가 나오기 전에 세조는 사모(紗帽) 뿔이 떨어져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사모 뿔을 빌립시다."

하니, 김종서가 창황(蒼黃)히 사모 뿔을 빼어 주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에서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부인의 일을 탄핵하고자 하는데, 정승이 지휘하십니까? 정승은 누대(累代) 조정의 훈로(勳老)이시니, 정승이 편을 들지 않으면 어느 곳에 부탁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임어을운이 나오니, 세조가 꾸짖어 물리쳤다. 김종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윤광은·신사면이 굳게 앉아 물러가지 않으니, 세조가 말하기를,

"비밀한 청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하였으나, 오히려 멀리 피하지 않았다. 세조김종서에게 이르기를,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하고, 종자(從者)를 불러 가져오게 하였다. 양정이 미처 나오기 전에 세조임어을운을 꾸짖어 말하기를,

"그 편지 한 통이 어디 갔느냐?"

하였다. 지부(知部)의 것을 바치니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세조가 재촉하니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니, 양정이 칼을 뽑아 쳤다. 세조가 천천히 양정 등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흔들게 하여 돌아와서 돈의문에 들어가, 권언 등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이날 김종서가 역사(力士)를 모아 음식을 먹이고 병기를 정돈하다가 세조가 이르니,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하고, 많으면 쏘라."

하였다. 엿보는 자가 말하기를,

"적습니다."

하니, 김종서가 오히려 두어 자루 칼을 뽑아 벽 사이에 걸어 놓고 나왔다. 처음에 세조김종서의 집에 갈 때에 무사들을 저사(邸舍)에 가두게 하고 나왔다. 여러 사람이 오히려 떠들어대며 다투어 튀어나오려고 하자, 권남(權擥)이 문에 서서 막으니, 혹은 말하기를,

"먼저 아뢰지 않고 임의로 대신을 베는 것이 가합니까? 장차 우리들을 어느 땅에 두려고 합니까?"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용렬하지마는 대군(大君)은 고명하니, 익히 계획하였을 것이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 일을 만일 이루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혼자 살겠는가? 장부는 다만 마땅히 순(順)을 취하고 역(逆)을 버리고, 종사를 위하여 공을 세워 공명을 취할 것이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어째서 우리들에게 미리 일러 활과 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다만 빈 주먹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만일 격투할 일이 있으면 비록 그대들 수십 인이 병기를 갖추었더라도 어찌 족히 쓰겠는가? 그대들은 근심하지 말라."

하였다. 한명회(韓明澮)세조를 따라 성문(城門)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또 세조의 명령을 반복하여 고해 이르고, 세조가 돌아오는 것을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권남이 달려 순청(巡廳)913) 에 이르러 홍달손(洪達孫)을 보고 세조가 이미 김종서의 집에 간 것을 비밀히 알리고, 순졸(巡卒)을 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약속하고는, 또 두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숭례문(崇禮門)·서소문(西小門) 두 문을 닫게 하였다. 권남은 스스로 갑사 두 사람, 총통위(銃筒衛) 열 사람을 거느리고 돈의문(敦義門)에 이르러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일로 인하여 문 밖에 갔으니, 비록 종(鍾)소리가 다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라."

하고, 권언(權躽)을 시켜 문을 감독하게 하였다. 장차 대군(大君)의 저사(邸舍)로 돌아가려 하여 미처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성 안으로부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세조가 이르렀다. 웃으며 권남에게 이르기를,

"김종서(金宗瑞)·김승규(金承珪)를 이미 죽였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여러 무사가 아직도 공의 저사에 있으니, 수종(隨從)하게 할까요?"

하였다. 세조가 조금 멈추었다가 부르니 한명회가 거느리고 달려왔다. 세조가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을 시켜 순졸(巡卒)을 거느려 뒤에 따르게 하고, 시좌소(時坐所)914) 로 달려가서 권남을 시켜 입직(入直) 승지(承旨) 최항(崔恒)을 불러내었다. 세조가 손을 잡고 최항에게 이르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이양(李穰)·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원구(元矩)·조번(趙蕃)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당부(黨附)하고,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경성 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㽥)·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 조수량(趙遂良)·충청도 도관찰사(忠淸都都觀察使) 안완경(安完慶) 등과 연결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공모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정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여 조금도 시간 여유가 없다. 김연(金衍)·한숭(韓崧)이 또 주상의 곁에 있으므로 와서 아뢸 겨를이 없어서 이미 적괴(賊魁) 김종서(金宗瑞) 부자를 베어 없애고 그 나머지 지당(至黨)을 지금 아뢰어 토벌하고자 한다."

하고, 연하여 환관 전균(田畇)을 불러 말하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경멸히 여기어 널리 당원(黨援)을 심어 놓고, 번진(藩鎭)과 교통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화가 조석에 있어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한데 또 적당(賊黨)이 곁에 있으므로, 지금 부득이하여 예전 사람의 선발후문(先發後聞)의 일을 본받아 이미 김종서 부자를 잡아 죽였으나, 황보인 등이 아직도 있으므로 지금 처단하기를 청하는 것이다. 너는 속히 들어가 아뢰어라."

하고, 또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기운을 돌리고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천천히 아뢰고 경동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도진무(都鎭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김효성(金孝誠)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세조가 그 아들 김처의(金處義)를 시켜 부르고, 또 입직한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계전(李季甸) 등을 불러 들이어 세조최항·김효성·이계전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고, 황보인·이양·조극관·좌찬성(左贊成) 한확(韓確)·좌참찬(左參贊) 허후(許詡)·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도승지(都承旨) 박중손(朴仲孫) 등을 불렀다. 세조는 처음에 궐문에 이르러 입직하는 내금위(內禁衛) 봉석주(奉石柱) 등으로 하여금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시(弓矢)를 띠고 남문 내정(內庭)에 늘어서서 간적(姦賊)을 방비하여 엿보게 하고, 또 입직하는 여러 곳의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총통위(銃筒衛) 등으로 하여금 둘러서서 홍달손(洪達孫)의 부서를 시위하게 하고, 여러 순군(巡軍)은 시좌소(時坐所)의 앞뒤 골목을 파수하여 차단하게 하고, 친히 순졸(巡卒) 수백 인을 거느려 남문 밖의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 돌다리[石橋] 가에 주둔하고, 서쪽으로는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서쪽 동구에 이르고 동쪽으로 서운관(書雲觀) 고개에 이르기까지 좌우익(左右翼)을 나누어 사람의 출입을 절제하고, 또 돌다리로부터 남문까지 마병(馬兵)·보병(步兵)으로 문을 네 겹으로 만들고, 역사(力士) 함귀(咸貴)·박막동(朴莫同)·수산(壽山)·막동(莫同) 등으로 제3문을 지키게 하고, 영을 내리기를,

"이 안이 심히 좁으니, 여러 재상으로서 들어오는 사람은 겸종(傔從)915) 을 제거하고 혼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조극관(鳥克寬)·황보인(皇甫仁)·이양(李穰)이 제3문에 들어오니, 함귀 등이 철퇴로 때려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을 죽이고, 삼군 진무(三軍鎭撫) 최사기(崔賜起)를 보내어 김연(金衍)을 그 집에서 죽이고, 삼군 진무 서조(徐遭)를 보내어 민신(閔伸)을 비석소(碑石所)에서 베고 【이때에 민신은 현릉(顯陵)의 비석을 감독하고 있었다.】최사기(崔賜起)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신선경(愼先庚)을 보내어 군사 1백을 거느리고 용(瑢)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잡아서 압송(押送)하여 강화(江華)에 두고, 세조가 손수 편지를 써서 그 뜻을 이르고, 또 시켜서 말하기를,

"네 죄가 커서 참으로 주살(誅殺)을 용서할 수 없으나, 다만 세종(世宗)·문종(文宗)께서 너를 사랑하시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다. 용(瑢)이 사자(使者)를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도 또한 스스로 죄가 있는 것을 안다. 이렇게 된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삼군 진무 나치정(羅致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용(瑢)의 아들인 이우직(李友直)을 잡아 압령하여 강화에 두었다. 용(瑢)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급히 그 종 영기(永奇)를 불러 옷을 벗어 입히고 비밀히 부탁하기를,

"네가 급히 가서 김 정승에게 때가 늦어진 실수를 말하여 주라."

하였으니, 대개 김종서가 이미 주살된 것을 알지 못하고 다시 이루기를 바란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일이 만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석(河石)이 반드시 먼저 베임을 당할 것이니, 네가 꼭 뼈를 거두어 오라. 내가 다시 보고야 말겠다."

하였다. 이우직(李友直)강화에 이르러 에게 말하기를,

"제가 여쭙지 않았습니까?"

하니, 용(瑢)이 말하기를,

"부끄럽다. 할 말이 없다."

하였다. 용(瑢)의 당(黨)에 대정(大丁)이란 자가 있어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성씨(成氏)가 여복을 입히어 침병(寢屛) 뒤에 엎드려 있게 하였다. 잡기를 급박하게 하니, 성씨가 부득이하여 내보냈는데, 곧 베었다. 운성위(雲城尉) 박종우(朴從愚)가 문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비록 부르시는 명령은 없으나 변고가 있음을 듣고 여기 와서 명을 기다립니다."

하니, 세조가 불러 들였다. 우승지(右承旨) 권준(權蹲)·동부승지(同副承旨) 함우치(咸禹治)가 또한 오니, 세조권준만 불러 들이었다. 정인지(鄭麟趾)권남을 시켜 붓을 잡고 이계전·최항과 더불어 함께 교서(敎書)를 짓는데, 밤이 심히 추웠다. 노산군(魯山君)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하여 내온(內醞)916) ·내수(內羞)917)세조 이하 여러 재상을 먹이었다. 세조가 군사에게 술을 먹이도록 아뢰어 청하고, 또 아뢰어 용(瑢)의 당(黨)인 환관 한숭(韓崧)·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을 궐내에서 잡아 의금부(義禁府)에 넘기었다. 김종서(金宗瑞)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元矩)를 시켜 돈의문(敦義門)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의정부(議政府)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고하고, 아뢰어 내금위(內禁衛)를 보내라. 내가 나를 상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

하였으나, 문 지키는 자가 듣지 않았다. 김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복(女服)을 입고서, 가마를 타고 돈의문(敦義門)·서소문(西小門)·숭례문(崇禮門) 세 문을 거쳐 이르렀으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 아들 김승벽(金承壁)의 처가(妻家)에 숨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명민(李命敏)도 또한 다시 깨어나서 들것에 실려 도망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홍달손(洪達孫)에게 고하니 호군(護軍) 박제함(朴悌緘)을 보내어 베었다. 세조가 인하여 여러 적이 다시 깨어날 것을 염려하여, 양정(楊汀)과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흥상(李興商)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김종서를 찾아 김승벽의 처가에 이르러 군사가 들어가 잡으니, 김종서가 갇히는 것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걸어 가겠느냐? 초헌(軺軒)을 가져오라."

하니, 끌어내다가 베었다. 김종서의 부자·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구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뒤에 저자 아이들이 난신(亂臣)의 머리를 만들어서 나희(儺戱)918) 를 하며 부르기를,

"김종서 세력에 조극관 몰관(沒官)하네."

하였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하여지자 유시(流矢)가 떨어졌다. 위사(衛士)가 놀라 고하니, 이계전(李季甸)이 두려워하여 나팔을 불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조용히 하여 진압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5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23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

  • [註 912]
    투자(投刺) : 처음으로 윗사람을 뵈올 때에 미리 명함(名銜)을 전하여 드리던 일.
  • [註 913]
    순청(巡廳) : 순라(巡邏)를 맡아 보던 관청. 조선조 때 야간 통행을 관장하였음.
  • [註 914]
    시좌소(時坐所) : 임금이 출궁(出宮)하여 임시로 거처하던 곳. 시어소(時御所).
  • [註 915]
    겸종(傔從) : 사대부집 수청방(守廳房)에서 집안의 잡일을 하거나 시중을 들던 하례(下隷). 청지기, 겸인(傔人).
  • [註 916]
    내온(內醞) : 궁중 술.
  • [註 917]
    내수(內羞) : 궁중의 음식.
  • [註 918]
    나희(儺戱) : 귀신 쫓는 놀이.

○癸巳/世祖晨召權擥韓明澮洪達孫曰: "今日當掃妖賊, 以安宗社, 諸君宜如約。 我熟思之, 姦黨之最姦黠者, 莫如金宗瑞。 彼若先知, 則事不集矣。 我率一二力士, 徑詣其家, 立斬之, 馳啓, 餘賊不足平也。 君等以爲何如?" 皆曰: "可。" 世祖曰: "我今日招諸武士, 射的後園, 從容諭之, 君等向晩更來。" 遂招武士射的後園, 設酌。 當午, 更進, 世祖出見曰: "康袞洪允成林自蕃崔閏安慶孫洪純老洪貴童閔發等數十人來在, 與之射的, 未敢發口。 郭連城已來, 然以母喪辭, 反覆曉諭, 雖許之, 有難色。 子更言之。" 世祖還入後園, 連城曰: "首陽, 今以宗社大計, 欲誅姦賊, 無可與共事者, 故召子。 子將何如?" 連城曰: "吾旣聞之。 丈夫寧無壯心? 然衰麻在身, 難於從命。" 曰: "士爲知己死。 今首陽出萬死之計, 爲國家擧義, 子何區區守小節? 且忠孝無二致, 子無苟辭, 以成大孝。" 連城曰: "首陽旣有命, 固當黽勉從之。 然此非小事, 君詳言方略。" 一一陳之。 連城曰: "餘無可議, 但首陽往來宗瑞家, 早晩未可知。 城門若閉, 爲之奈何?" 曰: "此未及慮。 當善處之。" 旣暮, 達孫以監巡先出。 世祖托以射遠, 引武士等至後園松亭, 語之曰: "今姦臣金宗瑞等弄權專政, 不恤軍民, 怨咨滔天。 不有君上, 日以長姦, 密附於, 將圖不軌。 黨援旣盛, 禍機正迫, 此乃忠臣烈士奮義效死之日也。 吾欲剪除之, 以安宗社, 何如?" 皆曰: "誠如所敎。" 宋碩孫柳亨閔發等曰: "當先啓之。" 議論紛紜, 或有從北門逃出者。 世祖明澮曰: "人多不可, 計將安出?" 明澮曰: "作舍道旁, 三年不成。 小且猶然, 況大事乎? 事有逆順, 以順而動, 何往不濟? 謀已先定, 今議雖不一, 容得已乎? 請公先起, 宜無不從者。" 允成曰: "用兵之害, 猶豫最大。 今事機甚迫, 苟從衆議, 事去矣。" 碩孫等牽衣止之者, 再三, 世祖怒曰: "汝等盡往先告。 吾不汝資。" 遂援弓起立, 蹴其止者, 指天誓曰: "今吾一身, 宗社利害係焉, 托命於天。 丈夫死則死於社稷而已。 從者從, 去者去, 吾不汝强。 如有執迷誤機者, 先斬而出。 疾雷不及掩耳, 兵貴拙速。 吾卽剪除姦兇, 孰敢枝梧?" 及中門, 慈聖王妃提甲被之。 遂衷甲, 率家僮林於乙云, 單騎往宗瑞家。 世祖之未行也, 明澮議以爲: "今大君挺身獨往, 不可無援。" 乃使權躽權擎韓瑞龜韓明溍等伏於敦義門內城上, 又戒楊汀洪順孫柳漵, 以微服從行。 世祖初命宗瑞于其家, 投刺, 宗瑞在別室, 與語良久。 還報, 世祖已上馬矣。 世祖宗瑞家洞口, 見金承珪家前有武士三人持兵耳語, 武騎三十餘人, 夾路左右相誇曰: "乘此馬射賊, 胡不一矢斃之?" 世祖知已有備, 笑謂曰: "誰耶?" 其人乃散。 楊汀佩劍、柳漵弓箭而來。 世祖懷劍, 止漵, 而至宗瑞家, 則承珪坐門前, 與辛思勉尹匡殷語。 承珪世祖迎謁, 世祖請見其父, 承珪入告。 宗瑞良久乃出見, 却立不前, 請入。 世祖曰: "日暮, 恐不及門。 只爲請一事來。" 宗瑞請入再三, 世祖固拒, 宗瑞不得已就前。 宗瑞之未出也, 世祖覺帽角落失, 世祖笑曰: "借政丞帽角。" 宗瑞蒼黃抽角進之。 世祖曰: "宗簿欲劾永膺夫人事, 政丞指揮。 政丞累朝勳老, 政丞不右, 則何所托哉?" 於是林於乙云進, 世祖叱之退。 宗瑞仰天, 良久不言, 匡殷思勉堅坐不退。 世祖曰: "有密請。 汝等其退。" 猶不遠避。 世祖宗瑞曰: "亦有請簡。" 乃召從者取來。 未及進, 世祖於乙云曰: "其一簡何去?" 以進知部, 宗瑞受簡, 退, 照月視之。 世祖促之, 於乙云以鐵椎擊宗瑞, 仆地。 承珪驚, 伏其上, 乃拔劍擊之。 世祖徐令等掉鞅而還, 入敦義門, 令等守之。 是日, 宗瑞會力士犒之, 整礪兵器。 及世祖至, 使人從垣上覘之曰: "少則出接之, 多則射之。" 覘者曰: "少。" 宗瑞猶拔數劍, 置壁間乃出。 初, 世祖之往宗瑞家也, 令閉武士等於邸而出。 衆猶喧呼, 爭欲闌出, 當門止之。 或曰: "不先啓而擅誅大臣, 可乎? 將置吾屬於何地?" 曰: "吾等固庸劣, 大君高明, 計之熟矣, 君等毋疑。 事苟不濟, 我豈獨生? 丈夫但當取順、舍逆, 爲宗社立勳, 以取功名。" 皆曰: "諾。" 或有曰: "何不預告吾曹, 令備弓劍? 今但空拳, 爲之奈何?" 曰: "如有格鬪之事, 雖君等數十人備兵仗, 何足於用? 君等勿憂。" 明澮世祖至城門而還, 又以世祖之命, 反覆告諭, 使留待世祖之還。 馳至巡廳, 見達孫, 密告世祖已往宗瑞家, 約勿發巡卒以待, 又令分遣二人, 閉崇禮西小二門。 自率甲士二人、銃筒(位)〔衛〕 十人, 至敦義門, 使守之曰: "首陽因事往門外, 雖鍾聲已盡, 勿閉門待之。" 使監門。 將還大君邸, 未及渡石橋, 有自城內馳來者, 顧視則世祖乃至。 笑謂曰: "宗瑞承珪已就戮矣。" 曰: "諸武士猶在公邸, 可使隨從。" 世祖小留, 招之, 明澮率以馳來。 世祖至巡廳, 令達孫領巡卒, 殿後馳詣時坐所, 使召入直承旨。 崔恒出來, 世祖握手謂曰: "皇甫仁金宗瑞李穰閔伸趙克寬尹處恭李命敏元矩趙藩等黨附安平, 連結咸吉道都節制使李澄玉鏡城府使李耕㽥平安道都觀察使趙遂良忠淸道都觀察使安完慶等, 共謀不軌, 刻日擧事, 勢甚危迫, 間不容髮。 金衍韓崧又在上側, 不暇來啓, 已剪除賊魁宗瑞父子, 其餘支黨, 今欲啓討。" 仍召宦官田畇曰: "皇甫仁金宗瑞等, 受安平重賂, 輕蔑殿下幼沖, 廣植黨援, 交通藩鎭, 謀危宗社, 禍在朝夕, 勢窘事迫。 且賊黨在側, 今不獲已法古人先發後聞之擧, 已捕殺金宗瑞父子。 皇甫仁等尙在, 今請處斷, 爾速入啓。" 又曰: "爾當下氣柔聲, 徐徐以啓, 不可驚動。" 都鎭撫判中樞院事金孝誠入直, 世祖使其子處義召之, 又召入直兵曹參判李季甸等。 世祖孝誠季甸等議啓, 召克寬、左贊成韓確、左參贊許詡、右參贊李思哲、判中樞院事鄭麟趾、都承旨朴仲孫等。 世祖初到闕門, 令入直內禁衛奉石柱等, 具甲胃、帶弓矢, 列立南門內庭, 以備姦賊窺伺, 又令入直諸所別侍衛甲士、銃筒衛等環侍, 達孫部署諸巡軍, 把截時坐所前後洞。 親率巡卒數百人, 屯於南門外嘉會坊洞口石橋邊, 西至永膺大君家西洞口, 東至書雲觀嶺, 分左右翼, 節人出入。 又自石橋至南門, 以馬、步兵作門四重, 令力士咸貴朴莫同壽山莫同等守第三門, 令曰: "此內甚隘窄, 諸宰相入者, 除傔從, 獨入。" 克寬入第三門, 等椎殺之。 遣人殺處恭命敏等, 遣三軍鎭撫崔賜起于其家, 三軍鎭撫徐遭于碑石所。 【時, 伸監督顯陵碑石。】 又遣賜起及義禁府都事愼先庚, 率軍一百, 捕誠寧大君家, 押置江華世祖手書諭意, 且令語之曰: "汝罪大矣, 固不容誅。 但以世宗文宗愛汝之心, 貸汝不治。" 對使者, 流涕曰: "吾亦自知有罪, 固宜及此。" 三軍鎭撫羅致貞率軍士, 捕友直, 押置江華楊花渡, 急呼其奴永奇, 解衣, 衣之, 密囑曰: "汝亟去, 說與金相後時之失。" 蓋未知宗瑞已誅, 冀其復濟也。 又曰: "事若不濟, 河石必先見誅, 汝須收骨而來。 吾復見乃已。" 友直江華, 語曰: "吾不白乎?" 曰: "負負。 無可言者。" 黨有大丁者, 匿(成寧大君)〔誠寧大君〕 家, 成氏使衣女服, 伏寢屛後, 捕急, 成氏不得已出之, 乃斬之。 雲城尉 朴從愚到門, 不得入曰: "雖無命召, 聞有變故, 來此待命。" 世祖召入。 右承旨權蹲、同副承旨咸禹治亦來, 世祖獨召入。 麟趾使執筆, 與季甸同撰敎書。 夜甚寒, 魯山命宦官嚴自治, 以內醞、內羞饋世祖以下諸宰相。 世祖啓請饋軍士酒, 又啓捕黨宦官韓崧、司謁黃貴存于闕內, 付義禁府。 宗瑞復蘇, 令元矩馳告守敦義門者曰: "吾夜被人所傷, 濱死。 速告議政府, 令醫員齎藥來救。 又速告安平啓, 送內禁衛。 吾欲捕傷我者。" 門者不聽, 宗瑞裹瘡, 衣女服, 乘轎, 歷到敦義西小崇禮三門, 皆不得入, 還, 匿其子承璧妻家。 翌日朝, 命敏亦復蘇, 舁逃。 有人告達孫, 遣護軍朴悌諴斬之。 世祖因慮諸賊復蘇, 遣及義禁府鎭撫李興商往視之。 尋宗瑞, 至承璧妻家, 軍士入捕之。 宗瑞意謂被囚, 曰: "吾何以步歸, 將軺軒來。" 乃曳出, 斬之。 宗瑞父子、克寬處恭命敏等, 竝梟首于市路, 人無不快之。 至有數其罪、以瓦礫擊之者, 諸司婢僕亦罵宗瑞頭, 宦寺等蹴椓其頭。 後, 市童作亂臣之頭而爲儺戱, 呼曰: "金宗瑞有勢, 趙克寬沒官。" 是夜, 月落天暗, 有流矢墮。 衛士驚告, 季甸懼, 請吹角。 世祖笑曰: "何足怪耶? 宜靜以鎭之。"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5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23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