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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 8권, 단종 1년 10월 5일 무자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김용·안중후 등이 역적 김문현의 후손을 중선에 참여시키는 일의 불가함을 아뢰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김용(金勇)·성균 박사(成均博士) 안중후(安重厚)·교서랑(校書郞) 임숙(任淑) 등이 상서하기를,

"신 등은 생각건대, 과거(科擧)는 국가의 중한 선택이요, 시역(弑逆)은 천하의 큰 죄악인데, 대악(大惡)의 후손으로 중선(重選)에 참여하는 것은 크게 인륜(人倫) 세교(世敎)의 다행함이 아닙니다. 신 등이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김문현(金文鉉)이 역전 신돈(辛旽)에게 당부(黨附)하여 몰래 부형(父兄)을 죽였는데, 그 죄를 얽어서 무함한 일은 신돈이춘부(李春富)가 항상 말한 것이고, 일국의 신민이 모두 아는 것입니다. 그 아비가 죽기에 임하여 또한 김문현에게 무함되었다고 말하였고, 헌사(憲司)에서 베기를 청하므로 김문현이 도망하였으니, 김문현은 참으로 시역(弑逆)한 자 중에서 심한 자여서 천지가 용납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두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비록 자손에 이르더라도 마땅히 멀리 변방에 쫓아내어 장안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자입니다. 어찌 사류(士類)에 끼어서 명교(名敎)를 어지럽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손자 김부필(金富弼)이 지난 봄 과장(科場)에 부거(赴擧)할 때에 신 등이 사유를 갖추어 해당 조(曹)에 보고하여 해당조에서 수교(受敎)하였는데, 해당 절목에, ‘김부필의 증조 김문현(金文鉉)의 죄상은 연대가 오래고 멀어서 일이 애매한데에 가깝고 그 친아들 김사청(金士淸)을 2품 직을 제수하였고, 친손자 김소남(金召南)은 법사(法司)를 제수하였으며, 김약회(金若晦)는 또 무과에 합격하여 지금 수령(守令)으로 차임(差任)하였다. 김문현(金文鉉)을 고쳐 김문구(金文久)라고 한 것은 김부필(金富弼)이 한 짓이 아니고 조선(祖先) 때부터 이미 고친 것이다.’ 하고, 드디어 부거(赴擧)하는 것을 허락하였었습니다.

신 등이 오래 근심을 품어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니, 무릇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몸의 살고 죽음이 없고, 때의 옛과 지금이 없이 사람마다 토죄(討罪)할 수 있는 것이 《춘추(春秋)》의 큰 법입니다. 지금 연대가 오래고 멀다 하여 용서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김문현의 시역(弑逆)은 당세(當世)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고, 사책(史冊)에 자세히 씌어 있습니다. 김문현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도망하여 숨기에 이르렀으니 그 정상이 명백합니다. 오늘에 이르러 애매하다고 논하여 사책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친아들·친손자가 아름다운 벼슬에 승진하고 과거에 오른 것이 모두《고려사(高麗史)》가 나오기 전에 있었으니 세상에서 대개 알지 못하고 잘못 쓴 것입니다. 문종조(文宗朝)에 있어 간관(諫官)의 청으로 인하여 명하여 김약회(金若晦)내승(內乘)887) 의 직책을 파면하니, 김문현의 죄악이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또 본조(本朝)의 고사(故事)에, 음란한 여자의 후손은 혹 문무과(文武科)로 인하여 벼슬이 달관(達官)에 이르더라도 동모제(同母弟)는 오히려 뒤에까지 정거(停擧)888) 하였는데, 어찌 친 자손이 이미 현직(顯職)의 제수를 받고 김부필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무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음녀(淫女)의 후손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역적의 후손이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쓴 것은 할 수 없지마는, 알고서 쓰면 대악(大惡)을 무엇으로 징계하겠습니까? 김문현의 이름을 고친 것이 비록 김부필의 한 짓은 아니더라도 죄악을 숨기고 이름을 고치어 그 사실을 없애고자 한 것은 한가지입니다. 대개 난신 적자(亂臣賊子)의 죄악이 원래 경중이 없는데, 난신의 후손은 영원한 세대까지 금고(禁錮)하고, 홀로 적자에 있어서는 널리 소략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신 등은 두렵건대, 삼강(三綱)이 이로부터 폐결(廢缺)됨이 있을까 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하였으니, 과거는 충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역자(逆子)의 후예로서 중선(重選)에 참여하면 후세에 우리 조정에서 취사한 것을 어떻다 하겠습니까? 신 등의 직책이 삼관에 있어 이름을 기록함에 있어 분함을 이기지 못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殿下)는 대의로 결단하시어 신 등의 청을 굽어 좇으시어, 김문현의 후손을 부거(赴擧)하지 못하게 하여 강상(綱常)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르게 하시면 인륜이 다행하고 세교(世敎)889) 가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정부에 보이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20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 / 정론-정론(政論) / 윤리-강상(綱常)

  • [註 887]
    내승(內乘) : 내사복시(內司僕寺)의 한 벼슬.
  • [註 888]
    정거(停擧) : 유생(儒生)에게 가(加)하던 벌의 하나로서 일정한 기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던 일.
  • [註 889]
    세교(世敎) : 사회의 풍교(風敎).

○藝文奉敎金勇、成均博士安重厚、校書郞任淑等上書曰:

臣等竊謂, 科擧, 國家之重選; 弑逆, 天下之大惡。 以大惡之裔, 得與重選, 大非人倫世敎幸也。 臣等謹按《高麗史》, 金文鉉黨附逆, 潛殺父兄。 其交構誣陷之事, 辛旽李春富之所常說, 一國臣民之所共知, 其父臨死亦言: "爲文鉉所陷。" 及憲司請誅, 而文鉉逃, 則文鉉誠弑逆之尤者, 而覆載所不容, 千載所不赦, 雖至子孫, 固當逬諸四裔, 不與同中國者也。 豈可使得齒士類, 以亂名敎哉? 其孫富弼, 去春場赴擧時, 臣等具事由報該曹。 該曹受敎節該: "富弼曾祖文鉉罪狀, 年代久遠, 事涉曖昧。 其親子士淸, 二品授職; 親孫召南, 法司除授; 若晦又中武擧, 今差守令。 改文鉉文久者, 非冨弼所爲, 乃自祖先而已改。" 遂許赴擧。 臣等久抱鬱悒, 反覆思之, 凡亂臣、賊子, 身無存沒、時無古今, 人得而討之, 《春秋》之大法, 今以年代久遠, 寬之可乎? 文鉉弑逆, 當世所耳聞目擊而史冊悉書之。 文鉉自知其罪, 乃至逃匿, 其情白矣。 至於今日, 論以曖昧, 以史爲不足信, 可乎? 親子、親孫躋膴仕登科(弟)〔第〕 , 皆在《麗史》未出之前世, 蓋未知而誤用之耳。 在文宗朝, 因諫官之請, 命罷若晦內乘之職, 文鉉之惡始著矣。 且本朝故事, 淫女之後, 或因文武科目, 位至達官, 而同母弟尙且停擧於後, 豈可親子孫已蒙顯授, 而以富弼赴擧爲無妨歟? 淫女之後尙爾, 況逆賊之後乎? 不知而用之, 則已矣, 知而用之, 大惡何所懲乎? 改文鉉之名, 雖非富弼所爲, 其諱惡改名、欲沒其實則一也。 蓋亂臣、賊子之惡, 固無輕重, 而亂臣之後, 則永世禁錮, 獨於賊子, 闊略如此, 則臣等恐三綱自此而有所廢缺矣。 嘗聞求忠臣於孝子之門, 科擧所以求忠臣也。 以逆子之裔, 得與重選, 則後世謂我朝取士爲何如也? 臣等職忝三館, 其於錄名, 不勝憤憤。 伏望殿下斷以大義, 俯從臣等之請, 文鉉之後, 勿使赴擧, 以正綱常, 以正朝廷, 人倫幸甚, 世敎幸甚。

命示于政府。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20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 / 정론-정론(政論) / 윤리-강상(綱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