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강(進講)의 회수와 서경의 겸강 등에 관한 박중림 등의 상소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박중림(朴仲林)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한두 가지 관견(管見)을 가지고 우러러 천총(天聰)을 번독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임금의 근습(近習)768) 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아무리 천하에서 잘 자라는 물건이라도 하루만 볕이 따뜻하고 열흘을 추우면 자랄 수 없다. 나를 보는 것도 드물지만 내가 물러가면 춥게 하는 자가 올 것이다.’ 하였고, 선유(先儒)가 또 이르기를, ‘임금이 하루 사이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할 때가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친할 때가 적으면, 자연히 기질(氣質)을 함양(涵養)하고, 덕성(德性)이 훈도(薰陶)769) 될 것이다.’ 하였으니, 과연 지당한 말씀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위(卽位)한 이래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성학(聖學)을 강론(講論)하고 치도(治道)를 물어서 힘써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것이 가히 지극하다고 이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이제 바야흐로 어리시고 덕(德)을 잡음이 굳지 못하여 선악(善惡)의 기틀[機]이 심히 두렵습니다. 하루 동안에 경연에 납시기는 한때뿐이고 한가로울 때가 적지 아니하니, 신 등은 좌우 근습(近習)이 혹 의롭지 않은 일로 인도하여 잘못된 기틀을 만들까 두렵고 염려스럽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며, 더욱 진강(進講)하는 회수[次數]를 더하여 한결같은 생각을 처음에서 끝까지 항상 학문에 두고, 항상 어진 사대부와 더불어 강학(講學)하는 여가에, 겸하여 민생(民生)의 휴척(休戚)770) 과 정치의 득실(得失)을 물어서 간사한 무리가 혹시라도 틈을 타지 못하게 하면 지극한 정치를 가히 기약할 것입니다.
1. 이제 삼왕(二帝三王)771) 의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모두 《서경(書經)》에 실려 있는데 임금과 신하 사이에 도유 우불(都兪吁咈)772) 의 기상(氣像)이 이전(二典)773) ·삼모(三謀)774) 에 더욱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전하께서는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진강(進講)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율령(律令)과 격례(格例)는 비록 이미 통하였을지라도, 이제 삼왕의 행한 일의 자취를 급급히 강구(講究)하여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엎드려 바라건대, 경연에서 진강하는 여가에 《상서(尙書)》775) 한 절(節)을 겸해서 강(講)하여 제왕(帝王)이 존심(存心)776) 하고 정치하는 요지(要旨)를 구할 것입니다.
1. 예로부터 제왕이 역사(役事)를 일으키면 반드시 먼저 방위(方位)를 살피고 경관(景觀)을 헤아려서 도성(都城)을 쌓고 궁궐을 세워서 자손에게 물려 주면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지켜서 이어 사는 것이지, 차례를 이은 이로서 갑자기 이를 버리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경복궁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기(開基)하여 창조한 땅인데 자손 만세(萬世)를 위하여 계획한 것입니다. 태종께서 즉위(卽位)하여 비록 때로는 창덕궁에 납시었으나, 모든 큰 예의(禮儀)는 반드시 여기에서 행하였으니, 그 심모 원려(深謀遠慮)가 지극하였습니다. 세종께 이르러서는 왼쪽에 문소전(文昭殿)을 세우고 오른쪽에 간의대(簡儀臺)를 세워서 유구(悠久)한 계획을 하여, 비록 일로 인하여 잠시 옮겼을지라도 즉시 환궁(還宮)하셨고 조금도 동요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문종께서 왕위를 이어 졸곡(卒哭)777) 을 마치자 예전처럼 들어가 사셨으니, 이것이 어찌 구궁(舊宮)을 자손이 대대로 지켜서 하루라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술사(術士)의 말로 인하여 거가(車鴐)778) 를 여러 번 옮겨서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정한 바가 있지 아니하여 인심(人心)이 흉흉한 뿐만 아니라 조종(祖宗)779) 의 하늘에 계시는 영혼이 편하지 못하실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불당(佛堂)으로써 말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불당은 비록 세종께서 명하신 바이나, 이로 말미암아 구궁을 폐하는 것은 또한 세종의 뜻이 아닙니다. 만약 세종께서 오늘의 변(變)에 처하셨으면 불당을 헐라는 명이 어찌 오늘을 기다렸겠습니까? 말하는 이는, 이제 장차 창덕궁 수리가 끝나면 거가(車駕)가 마땅히 옮길 것이므로 불당을 헐 필요가 없다고 하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창덕궁이 비록 이미 수리가 되었을지라도, 이 궁780) 을 드디어 폐하여 버리고 다스리지 아니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물며 이 궁은 이미 정위(正位)에 있고, 정전(正殿)을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근본이 되는 땅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다른 곳에 계실지라고 어찌 서로 크게 멀겠습니까? 술사(術士)의 말을 비록 족히 믿을 수는 없으나, 국가의 만세를 꾀하는 자가 어찌 감히 괄연(恝然)781) 하게 쓸데없는 불당으로 인해 허탄한 말을 이루어 조종의 구궁을 폐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급히 불당을 철거하기를 명하여 신민(臣民)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고 그 저장한 물건은 개경사(開慶寺) 등에 옮겨 두면 거의 시의(時宜)에 적합할 것입니다.
1. 전하께서 바야흐로 양암(諒闇)782) 에 계셔서 친히 기무(機務)를 아니하시므로, 모든 제수(除授)에 관한 것은 모두 의정부 대신에게 물어서 정조 당상(正曹堂上)의 예에 의하여 분경(奔競)783) 의 금법(禁法)을 세웠으니, 법이 자세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상피(相避)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의정부 대신의 아들·사위·동생·조카들은 비록 예(例)에 따라 승천(陞遷)하는 자라도 여러 사람이 모두 의심합니다. 신 등은 엎드려 바라건대, 의정부 대신에게도 상피하는 법을 세워서 여러 사람의 의심을 막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승정원에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1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註 768]근습(近習) : 가까이 모시는 사람.
- [註 769]
훈도(薰陶) : 감화 양성.- [註 770]
휴척(休戚) : 잘된 것과 그른 것.- [註 771]
이제 삼왕(二帝三王) : 이제(二帝)는 요(堯)와 순(舜). 삼왕(三王)은 하(夏)의 우왕(禹王), 상(商)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 [註 772]
도유 우불(都兪吁咈) :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자유롭게 정사를 논의하던 것을 말함. 도유(都兪)는 임금의 말에 신하들이 찬성하는 것이고, 우불(吁咈)은 반대하는 것임.- [註 773]
이전(二典) : 요전(堯典)·순전(舜典).- [註 774]
삼모(三謀) : 대우모(大禹謀)·고요모(皐陶謀)·익직(益稷).- [註 775]
《상서(尙書)》 : 서경.- [註 776]
존심(存心) :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 것.- [註 777]
졸곡(卒哭) : 삼우(三虞)가 지난 뒤에 지내는 첫 제사.- [註 778]
거가(車鴐) : 임금의 행차.- [註 779]
조종(祖宗) : 선대의 임금.- [註 780]
궁 : 경복궁.- [註 781]
괄연(恝然) : 무심히.- [註 782]
양암(諒闇) : 임금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는 것. 또는 그 기간을 말함.- [註 783]
분경(奔競) : 관리들이 분주하게 권문세가(權門勢家)를 찾아다니면서 벌이던 엽관 운동(獵官運動). 나라에서 이를 엄금하였음.○司憲府大司憲朴仲林等上疏曰:
臣等謹將一二管見, 仰瀆天聰, 伏惟聖鑑財幸。
一, 人主之近習, 不可不謹也。 孟子曰: "雖有天下易生之物, 一日暴之, 十日寒之, 未有能生者也。 吾見亦罕矣, 吾退而寒之者至矣。" 先儒亦云: "人主一日之間, 接賢士大夫之時多, 親宦官宮妾之時少, 則自然涵養氣質, 而薰陶德性。" 至哉, 言乎! 殿下卽位以來, 日御經筵, 講論聖學, 咨訪治道, 其勵精圖治, 可謂至矣。 然殿下時方幼沖, 秉德未固, 善惡之機, 甚可畏也。 一日之內, 出御經筵有時, 而閑燕之時不少, 則臣等慮恐, 左右近習, 或有導之以非義, 冒貢于非幾也。 伏望殿下, 日新又新, 更加進講次數, 一念終始常在于學, 常與賢士大夫講學之餘, 兼咨民生休戚、政治得失。 憸邪之輩, 毋或間之, 則至治可期矣。
一, 二帝、三王治天下之大經、大法, 皆載於《書》, 而君臣之間都兪、吁咈氣象, 尤著於二典、三謨。 殿下進講《大學》、《論語》, 治天下之律令格例, 雖已通之, 然二帝、三王行事之迹, 不可不汲汲講究而心得之也。 臣等伏望, 經筵進講之餘, 兼講《尙書》一節, 以求帝王存心、出治之要。
一, 自古帝王作興, 必先相方測景, 築都城、建宮闕, 以遺子孫。 子孫必世守而代居之, 未聞繼序而遽棄之也。 景福宮, 我太祖開基創造之地, 爲子孫萬世計者也。 太宗踐祚, 雖時御昌德宮, 而凡大禮儀必於是焉行之, 其深謀遠慮, 至矣。 逮于世宗, 左建文昭殿、右設簡儀臺, 以爲悠久之計, 雖或因事暫遷, 而旋卽還宮, 略不動搖。 文宗繼統, 旣卒哭, 入御如舊, 是豈不以舊宮爲子孫之世守, 不可一日離也哉? 今因術士之言, 車駕屢移, 或東或西, 靡有底定, 不獨人情洶洶, 祖宗在天之靈, 恐未妥寧。 然其言不過以佛堂爲辭耳, 佛堂, 雖世宗所命, 然由此以廢舊宮, 亦非世宗意也。 假使世宗處今日之變, 則其命撤佛堂也, 奚待今日哉? 說者以爲: "今將畢葺昌德宮, 則車駕當遷, 佛堂不必毁也。" 是大不然。 昌德宮雖已修葺, 此宮不可遂廢不治也。 況此宮旣居正位、設正殿, 則是乃根本之地也。 殿下雖臨御他所, 亦何大相遠也? 術士之言, 雖不足信, 然爲國家萬世計者, 安敢恝然仍無用之堂、致荒誕之說, 而廢祖宗之舊哉? 伏望殿下, 亟命撤去佛堂, 以副臣民之望, 其所貯之物, 移置開慶等寺, 庶合時宜。
一, 殿下方在諒闇, 不親機務, 凡干除授, 悉咨政府大臣, 依政曹堂上例, 以立奔競之禁。 法非不詳也, 而獨無相避之法, 故政府大臣子壻弟姪, 雖隨例陞遷者, 衆皆疑之。 臣等伏望於政府大臣, 亦立相避之法, 以塞衆人之疑。
傳曰: "承政院議啓。"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1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註 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