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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 7권, 단종 1년 8월 15일 기해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영의정으로 잉령 치사한 하연의 졸기

영의정(領議政)으로 잉령치사(仍令致仕)한 하연(河演)이 졸(卒)하였다. 하연의 자(字)는 연량(淵亮)인데, 진주(晉州) 사람이다. 병자년720) 에 과거에 올라 봉상 녹사(奉常錄事)에 보직(補職)하였다가 뽑혀서 직예문 춘추관 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여러 관직(官職)을 더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다가 승정원 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발탁(拔擢) 제수되었다. 태종(太宗)하연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은 이 벼슬에 이른 까닭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경이 대간(臺諫)에 있을 때에 의연(毅然)하게 일을 말하였으므로, 내가 곧 경을 알았다."

하였다. 세종내선(內禪)721) 을 받자, 지신사(知申事)에 제수하였다. 이때에 나라에 일이 많았는데, 하연이 조심하고 근신(謹愼)하여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하니, 두 임금의 은우(恩遇)가 매우 융숭하여 예조 참판에 제수하고, 대사헌(大司憲)에 옮겼는데 부도(浮屠)의 일을 논하니, 세종이 기꺼이 받아들여서 조계종(曹溪宗) 등 7종(宗)을 혁파(革罷)하여 단지 선(禪)·교(敎) 2종만 두고 아울러 주군(州郡)의 사사(寺社)와 토지를 헤아려 줄였다. 뒤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파면되어 천안군(天安郡)으로 귀양갔었는데, 얼마 안되어 불러서 병조 참판에 제수하였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천(陞遷)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겸 판이조사(判吏曹事)에 천전(遷轉)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좌찬성(左贊成)과 좌의정(左議政)에 이르고 나이가 70에 궤장(几杖)722) 을 하사받았다. 영의정이 되자 문종(文宗)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고자 하니, 하연이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신미년723) 에 늙고 병듦으로써 물러가기를 청한 것이 두 번이었으나 본직(本職)으로 잉령치사(仍令致仕)하게 하였다.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는 78세이나, 성품이 간고(簡古)하고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으로 하며, 친족에게 화목하기를 인으로써 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아니하며, 경축(慶祝)과 조위(弔慰)를 폐하지 아니하고, 글을 보기를 즐기고 시(詩)를 읊기를 좋아하며, 가산(家産)에 힘쓰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기르지 아니하여 가정이 화목하였다. 관(官)에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밝게 살피기를 힘쓰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두 어버이가 모두 나이 80세인데, 무릇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지어서 세시복랍(歲時伏臘)724) 에 반드시 술잔을 받들어 올려서 수(壽)를 칭송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겨서 그 일을 노래하고 읊조리기까지 하였다. 어버이가 죽으니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며 또 구경당을 그 선인(先人)725) 의 거처하던 곳이라고 하여 해마다 수리하고 이엉을 덮어서 이름을 영모(永慕)라고 고쳤는데, 자질(子姪)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하연이 탄식하기를,

"선인의 예전 살던 집을 어찌 고치리요. 또한 우리 후세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함이 족하다."

하였다. 묘당(廟堂)726) 에 있은지 전후 20여 년에 사대부를 예(禮)로 대접하고, 문(門)에서 사알(私謁)727) 을 받지 아니하고, 처음에서 끝까지 근신(謹愼)하며 법을 잡고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태평 시대의 문물(文物)을 지킨 정승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 논의가 관후(寬厚)함을 숭상하지 아니하여 대신의 체면을 조금 잃었고 늘그막에는 일에 임하여 어둡고 어지러웠으나, 오히려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면서 물러가지 아니하다가 치사(致仕)하기에 이르렀다. 또 급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상서(上書)하니, 이때 사람들이 이로써 작게 여겼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함을 지키기를 하연과 같이 한 이도 적었다.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인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고, 자혜(慈惠)하고 어버이를 사랑함은 효이다.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11면
  • 【분류】
    인물(人物) / 사상-불교(佛敎) / 인사(人事)

  • [註 720]
    병자년 : 1396 태조 5년.
  • [註 721]
    내선(內禪) : 임금의 자리를 그 후손에게 양위(讓位)하는 것. 혈통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을 외선(外禪)이라 함.
  • [註 722]
    궤장(几杖) : 나라에서 나이 70이 넘은 2품 이상의 대신에게 내려 주던 안석(案席)과 검은 지팡이[烏杖].
  • [註 723]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 [註 724]
    세시복랍(歲時伏臘) : 설·삼복·납향(臘享).
  • [註 725]
    선인(先人) : 아버지.
  • [註 726]
    묘당(廟堂) : 의정부.
  • [註 727]
    사알(私謁) : 사사로이 찾아와서 청탁하는 일.

○領議政仍令致仕河演卒。 淵亮, 晋州人。 登丙子科, 補奉常錄事, 選爲直藝文春秋館修撰官, 累官至司憲執義, 擢拜承政院同副代言。 太宗手曰: "卿知所以至此乎?" 對曰: "未也。" 太宗曰: "卿在臺, 毅然言事, 予乃知卿也。" 世宗受內禪, 拜知申事。 時, 國家多事, 小心謹愼, 周旋其間。 兩上恩遇甚隆, 拜禮曹參判, 遷大司憲, 疏論浮屠事, 世宗嘉納, 革曹溪等七宗, 只置禪、敎二宗, 幷量減州郡寺社及其土田。 後爲平安道觀察使, 以事罷, 謫天安郡。 頃之, 徵拜兵曹參判, 陞刑曹、吏曹判書, 轉議政府參贊兼判吏曹事, 累陞至左贊成、議政。 年七十, 賜几杖。 及爲領議政, 文宗欲重修大慈庵, 執不可。 辛未, 以老疾乞退者再, 以本職仍令致仕。 遺命不作佛事, 年七十八。 性簡古, 事親以孝, 睦族以仁, 故舊不遺, 慶弔不廢。 喜觀書, 好吟詩, 不務家産, 不畜聲色。 家門雍睦, 居官處事, 務要明察, 不好興作。 二親年俱八十, 凡所以娛悅其心者, 靡所不至。 作具慶堂, 歲時、伏臘, 必奉觴稱壽, 人皆榮之, 至爲歌詠其事。 親歿, 出入必告祠堂。 且以具慶堂先人所處, 歲修蓋茨, 改號曰永慕。 子姪請易以瓦, 歎曰: "先人舊居, 豈可改也? 亦足使吾後世法先人儉也。" 居廟堂前後二十餘年, 禮接士大夫, 門不受私謁, 終始謹愼, 執法不撓, 可謂昇平守文之相也。 然其論議不尙寬厚, 稍失大臣體。 暮年臨事暗耗, 尙優游不退, 及其致仕也, 又以不急之事上書, 時人以此少之。 然終始保全如者, 亦少。 謚曰文孝, 學勤好問文, 慈惠愛親孝。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11면
  • 【분류】
    인물(人物) / 사상-불교(佛敎)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