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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6권, 단종 1년 5월 7일 계해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이 분선공감을 혁파하고 대신이 감독하지 않을 것을 청하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 등이 분선공감(分繕工監)347) 을 혁파하여서 정부 대신으로 하여금 토목의 역사를 거느리지 말게 하도록 청하니, 성상께서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창덕궁(昌德宮)의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곧 정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명(命)을 듣고 이를 생각하건대, 지금 그만두지 않는다면 후일에는 더욱 본받아서 폐단이 다시 전과 같아질 것입니다. 또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거느리게 하는 것은 그 일을 빨리 이루고자 함이나 선공감(繕工監)과 제조(提調)가 있으니, 반드시 따로 분선공감(分繕工監)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 하니 공역을 쉽게 일으키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지 아니하는 것이 없습니다. 분선공감(分繕工監)에서 전곡(錢轂)을 많이 저축하고 병졸(兵卒)을 역사시켜 오로지 마음대로 조종(操縱)하니, 자못 모람(冒濫)된 일이 있습니다. 대저 토목의 역사는 천(賤)한 것이므로, 비록 낮은 관리라고 하더라도 또한 하려고 하지 않는 바인데, 하물며 대신이겠습니까? 옛날에는 대신이 전곡(錢穀)의 일을 알지 못하였고, 심지어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일까지도 오히려 또한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대신으로서 감독하여 거느리게 하니, 그것이 조정(朝庭)의 대체 같은 것에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환관(宦官) 김사행(金師幸)태조를 섬겨 총애를 얻어 관직이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에 이르렀는데, 그때에 그를 ‘광대 부사(廣大府事)’라고 불렀습니다. 창업(創業)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민력(民力)이 지쳐서 피로하였으나, 토목의 역사를 수창(首唱)하여 흥천사(興天寺)의 한 절을 영조(營造)하는 데 지나치게 사치하니, 당시의 여론이 있었습니다. 무인년348)태종께서 간신(姦臣)을 주멸하고, 이어서 말씀하기를, ‘김사행(金師幸)이 만약 살아 있는다면 장차 민폐(民弊)가 될 것이다.’ 하고, 아울러 주살(誅殺)하였습니다. 방패(防牌)·육십(六十) 등으로서 일찍이 역사에 시달리던 자들이 도끼로써 김사행의 목을 찍으면서 말하기를, ‘아무 집[屋]이 무너졌는데, 어찌 일어나서 다시 수리하지 않는가? 아무 집이 무너졌는데 어찌 일어나서 다시 짓지 않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심히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태종 때에 박자청(朴子靑)은 육십(六十)에서 몸을 일으켜 재상에 이르렀는데, 시종 토목의 역사를 맡았으나, 일찍이 조정의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박자청은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는 안순(安純)이 대신으로서 영선(營繕)을 감독하였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빌건대 분선공감(分繕工監)을 혁파하시고 대신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다스리지 말게 하여서 그 체통을 높이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승윤(李承胤)을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으로 삼았는데, 이승윤은 찬성(贊成) 이양(李穰)의 아들입니다. 그윽이 보건대, 송(宋)나라 때 대신의 아들은 대간(臺諫)·경연(經筵)·한림(翰林)과 같은 모든 근시(近侍)의 관직에 제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어찌 까닭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정치를 대신이 합니다. 대신이 잘못하면 대간(臺諫)에서 논박하여 의논하는데, 만약 대신의 아들이 대간의 자리에 있다면, 아들이 감히 그 아비를 탄핵 하겠습니까? 또 윤사윤(尹士昀)봉렬 대부(奉列大夫)349) 로서 수 군자 정(守軍資正)이 되었으나 상 줄만한 공로도 없는데 초자(超資)하여 3품의 직사(職事)에 임명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이를 고치소서."

하였다. 유성원과 경연관(經筵官)이 모두 물러가니, 참찬관(參贊官) 노숙동(盧叔仝)·지경연사(知經筵事) 이사철(李思哲)이 머물러서 품지(稟旨)350) 를 의논하고 나가서 정부에 전지(傳旨)하여 이를 의논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8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건설-토목(土木)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정론(政論)

  • [註 347]
    분선공감(分繕工監) : 선공감의 분사(分司).
  • [註 348]
    무인년 : 1398 태조 7년.
  • [註 349]
    봉렬 대부(奉列大夫) : 정4품의 문관 품계.
  • [註 350]
    품지(稟旨) : 임금께 아뢰어 교지(敎旨)를 받던 일.

○癸亥/持平柳誠源於經筵啓曰: "向者, 臣等請罷分繕工監, 勿令政府大臣領土木之役, 上敎云: ‘待昌德宮役訖, 乃停。’ 臣等聞命思之, 今不已, 則後日效尤, 弊復如前。 且使大臣監領, 欲其速成。 然繕工監與提調在, 不必別立分繕工監, 而使政府領之, 工役之易興, 靡不由此。 分繕工多畜錢穀, 役使兵卒, 專擅操縱, 頗有冒濫之事。 夫土木, 役之賤者, 雖卑官, 亦所不欲, 況大臣乎? 古者, 大臣不識錢穀, 至於斷獄, 尙且不知; 今以大臣監領, 其如朝廷大體, 何? 昔, 宦者金師幸太祖得幸, 官至判內侍府事, 時號廣大府事。 創業未久, 民力困疲, 首唱土木之役, 興天一寺, 營構過侈, 時論有焉。 歲戊寅, 太宗誅姦臣, 乃曰: ‘師幸若在, 將爲民弊。’ 遂竝誅之。 防牌、六十等, 嘗困於役者, 以斧擬師幸之項曰: ‘某屋已圮, 何不起而復修; 某屋已頹, 何不起而重營乎?’ 此甚慘也。 太宗朴子靑, 起自六十, 至宰相, 終始掌土木之役, 然未嘗參朝政, 子靑不足道也。 至世宗朝, 安純以大臣監營繕, 此非美事。 乞罷分繕工, 勿令大臣監領, 以尊體統。" 又啓曰: "以李承胤爲司諫院右獻納, 承胤, 贊成之子也。 竊觀時, 大臣之子, 如臺諫、經筵、翰林, 一應近侍之職, 不許除授, 豈無謂歟? 今幼沖卽位, 政在大臣。 大臣得失, 臺諫駁議, 若大臣之子居臺諫, 則子敢劾其父乎? 且尹士昀以奉列大夫, 守軍資正, 無功可賞, 而超拜三品職事, 請皆改之。" 誠源及經筵官皆退, 參贊官盧叔仝、知經筵李思哲留議稟旨而出, 傳于政府議之。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8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건설-토목(土木)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