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사 이축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백관이 모화관까지 나가서 맞이하다
주문사(奏聞使) 이조 참의 이축(李蓄)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백관이 길복(吉服) 차림으로 모화관까지 나가서 맞이하였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칙서를 읽고, 이를 마치자 백관들이 나와서 최복(衰服)을 입고 도로 빈전(殯殿) 외정(外庭)에 들어가서 곡림(哭臨)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그대가 능히 중국 조정을 존경하고 섬기는 데 힘써서 배신(陪臣) 이축(李蓄)을 보내어 해청(海靑)을 가지고 와서 바쳐서 갖추 충성하고 공경하는 뜻을 보이었다. 이축 등이 돌아가는 데 특별히 왕에게 채폐(綵幣)와 표리(表裏)를 하사하여서 그대의 정성에 보답하니, 이르거든 영수(領受)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조칙(詔勅)하는 것이다. 반사(頒賜)는 저사직 금흉배 기린 대홍(紵絲織金胸背麒麟大紅) 1필과 암화 골타 운청(暗花骨朶雲靑) 1필, 소록(素綠) 1필, 채초(綵綃) 3필이다."
하였다. 또 조칙하기를,
"주본(奏本)을 보건대, ‘앞서 〈여진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하여 본국에 있는 인구들을 이미 보내어 계속하여 요동으로 해송(解送)했다.’했는데, 그 사방으로 흩어진 인구나 점거(占據)한 사람들은 오로지 제종 야인(諸種野人)들이었다. 〈그들은〉 그 굴혈(窟穴)의 험조(險阻)함과 수목의 무성함을 믿지만, 국왕의 경내에는 모두 인구를 숨길 이유 따위가 없으니, 왕이 중국 조정에 충성하고 공경하는 뜻을 갖추어 보이었다. 다만 오랑캐 사람들의 성질이 휼사(譎詐)하고 무상(無常)하며 가식(假息)하고 투생(偸生)하여 무소부지(無所不至)한 것이 염려되는데, 더구나 험조함을 믿을 만한 것이 있으니 일시에 수색하여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창탈(搶奪)해 간 인구는 거지(居止)가 일정한 데가 없어도, 반드시 없다고 여기기도 어렵다. 한때의 본 바를 가지고 문득 그들이 근변(近邊)에 오지 않는다고 이를 수도 없으니, 왕은 이제부터 더욱 마땅히 변방을 지키는 두목(頭目)들에게 엄중히 경계하라. 다만 〈그들은〉 야인 여진(野人女直)347) 중에서 이전에 북로(北虜)348) 와 내통하여 중국 변방을 침범하고 후에 창탈(搶奪)한 인구들을 데리고 왕의 나라 후문(後門)349) 과 알목하(斡木河)350) 일대에 숨어버린 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다 수색하여 찾아내고, 법을 세워 추방하거나 피로중국인들과 함께 모두 요동 총병관(遼東摠兵官)이 있는 곳으로 송부하여 교부하라. 인순(因循)하여 몰래 거주하게 하다가 피차(彼此)의 변환(邊患)이 되어 사기(事機)를 그르치게 하지 말라. 왕은 그것을 살필지어다."
하였다. 이축이 또 요동의 자문(咨文)을 받아 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좌군 도총부(左軍都摠府)의 자문(咨文)에 준(准)하여 이르기를, ‘조선국에서 보내어 온 사로잡혔던 중국 사람 왕산화(王散化) 등이 설명하기를, 「이만주(李滿住)의 아들 과라가(果剌哥)·도혜(都兮) 등과 관하인(管下人) 김납로(金納魯) 등이 흉년으로 인하여 양식을 요청하려고 다시 조선(朝鮮) 경계에 이르렀으나, 본처관사(本處官司)에서 기꺼이 양식을 주지 않아서 생계가 어렵습니다. 금일에 흥판(興販)한다고 칭탁하고 요동(遼東) 경내(境內) 등지로 가고자 합니다.」하니, 이로 인하여 당직(當職)351) 등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글을 가지고 가서 조선국에 전해 주어 인마(人馬)를 정돈하여 지방을 굳게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만일 야인 여직(野人女直)이 바로 찾아와서 양식을 구한다고 핑계하고 국경에 이르러서 침략하고 소요(騷擾)하며 조선의 기세(氣勢)를 정탐하거든, 가로막아 죽이는 것도 가합니다. 마땅히 시의적절하게 행하시고, 이어서 요동 총병관에 비보(飛報)하여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책응(策應)하게 하십시오. 야인들을 받아들이거나 숨겨서 중국 조정에서 대우(待遇)하는 은의(恩誼)를 저버리는 일은 허하지 않습니다. 보낸 이전 사안을 받들어서, 마땅히 곧바로 행하는 것이 좋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자문을 보내니, 도착하는 즉시 시행해 주시길 청합니다."
하였다. 그 보고 들은 사목(事目)은 이러하였다.
"태감(太監) 윤봉(尹鳳)이 윤길생(尹吉生)에게 말하기를, ‘해송(解送)한 중국 사람의 수가 오로지 김보(金寶)의 칙유를 봉선(奉宣)한 뒤에 한결같이 어찌 많은가?’ 하므로 신 등이 윤길생으로 하여금 돌아가 고하게 하기를, ‘칙유(勅踰)한 자들은 모련위(毛憐衛)에서 보내온 원래 창탈한 인구입니다. 지금 압송해 온 자들은 바로 야인들이 창탈하여 갔다가 도망하여 온 사람들과 창탈하여 지나가던 근경(近境)에서 우리의 변방 장수에게 빼앗긴 자들입니다. 어찌 김보(金寶)로 인하여 뒤에 송환한 중국 인물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에 해송(解送)한 인구가 모두 1백 69명이고, 홍무(洪武) 25년(1392)에 우리 조정이 개국한 이래로 해송한 인구가 8백 30여 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야인(野人)들에게 사로잡히어 갔다가 도망하여 온 인구일 뿐입니다. 만일 왜·야인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하여 온 인구와 값을 주고 사와서 해송한 인구를 합하면 또 1천 8백 50여 명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성심으로 사대(事大)하는데, 어찌 칙유하기를 기다린 뒤에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윤길생으로 하여금 야선(也先)의 있는 데를 묻게 했더니, 윤봉이 말하기를, ‘탈탈왕(脫脫王)이 야선과 서로 미워하여 왕이 먼저 야선(也先)을 치니까 야선이 패하였는데, 그 뒤에 야선이 크게 거병(擧兵)하여 왕을 공격하여 죽이고 또 그 태자를 죽이고, 태자의 아들을 세우고서, 이어서 북쪽으로 도망하여 멀리 가버렸다. 태자의 아들은 그 누이가 낳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24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347]야인 여진(野人女直) : 명나라 시대 중국과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거의 접촉이 없었던 만주 내지(內地)의 여진족을 통칭하는 말임.
- [註 348]
북로(北虜) : 몽고의 오랑캐.- [註 349]
후문(後門) : 고려 말 조선 초에 우리 나라와 여진이 서로 공식적으로 왕래하던 국경상의 관문(關門).- [註 350]
알목하(斡木河) : 옴회(吾音會)의 한자 표기로서, 오늘날의 회령(會寧)을 말함. 아목하(阿木河).- [註 351]
당직(當職) : 담당 관직.○奏問使〔奏聞使〕 吏曹參議李蓄, 齎奉勑書來。 百官以吉服, 出迎于慕華館, 詣殯殿讀勑訖, 百官出着衰服, 還入殯殿外庭, 哭臨。 其勑曰:
爾能從尊事朝廷, 遣陪臣李蓄, 以海靑來進, 具見忠敬之意, 玆李蓄等回, 特賜王綵幣、表裏, 用答爾誠, 至可領之, 故勑。 頒賜紵絲織金胸背麒麟大紅一匹、暗花骨朶雲靑一匹、素綠一匹、綵綃三匹。
又勑曰:
得奏, 先有被虜逃在本國人口, 已行陸續, 解送遼東, 其有四散人口、占據之人, 但係諸種野人, 恃其窟穴陰阻, 林木茂密, 國王境內, 竝無藏躱人口之理等, 因具見王忠敬朝廷之意。 但念虜人之性, 譎詐不常, 假息偸生, 無所不至, 況有險阻可恃, 一時難於搜尋, 其所搶去人口, 居止無定, 亦難必其無有, 不可以一時所見, 便謂其不來近邊, 王自今尤當嚴戒守邊頭目。 但係野人女直, 比先交通北虜犯邊, 後帶所搶人口, 逃在王國後門(幹木河)〔斡木河〕 一帶地方藏躱, 務須盡數搜尋, 或設法赶逐, 或連被搶中國人口, 一體送赴遼東摠兵官處交割。 毋令因循潛住, 爲彼此邊患, 有誤事機, 王其省之。
蓄又受遼東咨文來, 其文曰:
准左軍都摠府咨稱: "朝鮮國送到被虜漢人 王散化等稱說: ‘李滿住子果剌哥、都 兮等及管下人金納魯等爲因年饑, 欲要討糧, 再到朝鮮境界, 本處官司, 不肯給糧, 生理難苦。 近日托以興販, 欲往遼東境內。’ 等因令當職等差人齎文, 與朝鮮國, 令整飭人馬, 固守地方。 若野人女直, 直詣討糧爲由, 到於地界侵擾度氣勢, 可以截殺, 宜從相機而行, 仍飛報遼東摠兵官, 調兵策應, 不許容留隱匿, 以辜朝廷待遇之恩 奉此前事, 擬合就行, 爲此咨文, 到日煩請施行。"
其(問)〔聞〕 見事目曰:
太監尹鳳語吉生曰: "解送唐人之數, 獨於金寶奉宣勑諭之後, 一何多也?" 臣等令吉生還告曰: "勑諭者, 毛憐衛送到原搶人口也。" 今之押來者, 乃野人等搶去逃來人及搶過近境, 爲邊將所奪者也, 豈因金寶, 而後送還上國人物哉? 殿下卽位以後, 解送人口, 凡一百六十九名, 自洪武二十五年我朝開國以來, 解送人口八百三十餘名, 然此特被野人虜去逃來人口耳。 若竝係倭、野人搶虜逃來, 及買來解送人口, 則又一千八百五十餘名。 我國誠心事大, 豈待勑諭, 而後有加哉? 又令吉生, 問也先所在, 鳳曰: "脫脫王與也先相惡, 王先擊也先, 也先敗, 其後也先大擧攻王弑之, 又殺其太子, 而立太子之子, 因北遁遠去, 太子之子, 乃其妹出也。"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24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