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의 유산 문제를 논의하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595) 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장령(掌令) 이보흠(李甫欽)이 아뢰기를,
"죽은 중추(中樞)596) 왕인(王麟)이 비첩(婢妾) 조적(朝迪)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아들 왕효손(王孝孫)을 낳고는, 아내 김씨(金氏)의 낳은 아들 왕변옥(王卞玉) 등은, 도리어 이름도 알 수 없는 김씨집[金家] 여자의 낳은 아들이라고 일컬으며, 또 잉태(孕胎)한 달 수가 서로 틀리다는 이유로써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일컫고는 유서(遺書)를 만들어 두면서 그 토지와 노비를 오로지 천첩(賤妾)의 아들들에게만 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본래부터 사족(士族)이 되었으며, 종신토록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또 왕변옥(王卞玉)은 나이 지금 10세인데, 왕인(王麟)이 노비(奴婢) 10명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서 글을 읽도록 했습니다. 또 왕인(王麟)의 내외(內外) 일족(一族)의 공초(供招)로써 살펴본다면, 왕변옥은 실재로 왕인의 아들인데도 왕인이 첩을 사랑했던 까닭으로서 아들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문서(文書)를 따르게 된다면 그 전지와 노비를 마땅히 왕효손(王孝孫)에게 전부 주어야 하겠지마는, 그러나 왕변옥(王卞玉)이 적자(嫡子)로서 전지와 토지를 얻지 못하게 되니, 대의(大義)에 있어서 옳지 못합니다. 헌사(憲司)에서 이로써 의심하여 판결하지 못한 지가 몇해가 되었습니다. 신(臣)은 망령되이 생각하건대, 노(魯)나라 혜공(惠公)이 중자(仲子)를 사랑하여 환공(桓公)으로써 후사(後嗣)로 삼고 은공(隱公)이 섭양(攝養)597) 했는데도 《춘추(春秋)》에 환공(桓公)의 찬시(簒弑)한 죄를 바로잡았으니, 이것은 그 적자(嫡子)와 서자(庶子)가 인륜(人倫)을 문란하게 하면 제후(諸侯)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周)나라 혜왕(惠王)이 사랑으로써 태자(太子)를 바꾸게 되니,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를 수지(首止)598) 에 모아서 양왕(襄王)을 정하였으므로, 공자(孔子)가 그 공을 칭찬했으니, 이것은 그 어른과 어린이가 순서를 잃게 된다면 비록 천자(天子)의 명령일지라도 또한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순(大舜)599) 같은 성인(聖人)으로써 고수(瞽叟)600) 에게 용납되지 못하였으며, 윤백기(尹伯奇)의 효성으로써 윤길보(尹吉甫)601) 에게 쫓겨났으니 고금(古今) 인륜(人倫)의 변고(變故)는 또한 많은 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인(王麟)이 왕변옥(王卞玉)을 자기 아들로 삼으면서도 노비(奴婢)를 주지 않는다면 《춘추(春秋)》의 대법(大法)에 의거하여 개정(改正)하는 것이 옳겠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서(遺書)를 만들어 두었으니, 부자(父子)의 진위(眞僞)는 일족(一族)의 말로써 결정하기가 어렵겠다."
하고는, 여러 정승(政丞)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장령(掌令)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황보인(皇甫仁)은 아뢰기를,
"아버지의 문계(文契)는 고친다면 대강령(大綱領)에 있어서도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조극관(趙克寬)은 아뢰기를,
"자식을 알기는 아비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변(李邊)이 나가서 여러 정승(政丞)들에게 이르기를,
"내 선부(先父)가 어미의 말을 듣고는 나의 이모제(異母弟)602) 로써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인정하고서 재물을 주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선부(先父)의 골육(骨肉)603) 을 부모(父母)의 명령에 따라서 아우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천리(天理)를 거스리는 것이라.’ 여기고는, 어머니에게 고(告)하여 아버지의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재물을 고루 나누었으니, 왕인(王麟)의 일도 대의(大義)에 따라 개정(改正)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3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86면
- 【분류】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신분-천인(賤人)
- [註 595]상참(常參) : 임금이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대신(大臣)과 해당 참상관(參上官:6품 이상)을 모아서 매일 열던 평상 조회. 큰 조회는 조참(朝參)이라 하였음.
- [註 596]
중추(中樞) : 중추원 사(中樞院使).- [註 597]
섭양(攝養) : 섭위(攝位)하여 환공(桓公)을 양육함.- [註 598]
수지(首止) : 위(衛)나라 땅 이름.- [註 599]
대순(大舜) : 순제(舜帝)의 존칭(尊稱).- [註 600]
고수(瞽叟) : 순제(舜帝)의 아버지.- [註 601]
○庚辰/御思政殿, 受常參視事。 司憲掌令李甫欽啓: "卒中樞王麟, 昵愛婢妾朝迪, 生子孝孫, 以妻金氏所生卞玉等, 反稱名不知金家女子所生, 又以胎朔相違, 稱非己之子, 而成置遺書, 其田民專給賤妾子等。 然金氏本爲士族, 終身守節而死。 且卞玉年方十歲, 王麟給奴婢十口, 使就師讀書。 又以王麟內外一族供招觀之, 卞玉實爲王麟之子, 王麟愛妾之故, 不以爲子可知矣。 若從父文書, 則其田民當專給孝孫, 然卞玉以嫡子, 不得田民, 於大義不可。 憲司以此疑, 而不決有年矣。 臣妄謂魯 惠公寵愛仲子, 以桓公爲嗣, 隱公攝養, 而《春秋》正桓公簒弑之罪, 是其嫡庶亂倫, 則諸侯之命, 有所不從也。 周 惠王以愛易太子, 齊 桓公會諸侯于首止, 以定襄王, 孔子美其功, 是其長幼失序, 則雖天子之命, 亦不從也。 以大舜之聖, 不容於瞽叟, 以伯奇之孝, 見黜於吉甫, 古今人倫之變, 亦多矣。" 上曰: "王麟以卞玉爲己之子, 而不給奴婢, 則依《春秋》大法, 改正可也。 以爲非己之子, 而成置遺書, 父子眞僞, 難以一族之言而定之也。" 顧謂諸相曰: "掌令之言何如?" 皇甫仁曰: "父之文契更改, 則於大綱未便。" 刑曹判書趙克寬曰: "知子莫如父。" 兵曹參判李邊出, 謂諸相曰: "吾先父聽母之言, 以吾異母弟爲非己之子, 不給財物, 父沒後, 我等以爲: ‘先父骨肉, 從父母之命, 而不以爲弟, 則是逆天理也。’ 告於母, 燒棄父書, 平均財物, 王麟之事, 從大義改正可矣。"
- 【태백산사고본】 6책 13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86면
- 【분류】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신분-천인(賤人)
- [註 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