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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3월 30일 계해 4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환관 전균을 가선 대부로 삼다

환관(宦官) 전균(田畇)을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삼았다. 전균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고 재간(才幹)이 있으므로 세종(世宗)은 그에게 문방(文房)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세종(世宗)의 전교(傳敎)는 집현전(集賢殿)과 승정원(承政院)에서 고금(古今) 경사(經史)의 말을 뒤섞어 인용(引用)한 것이니 여러 수백언(數百言)이나 되고 근신(近臣)의 대답도 또한 이와 같았는데, 전균은 글자를 알지 못하면서도 출납(出納)할 적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이로써 임용되었지마는, 그러나 2품의 관직은 임명하지 않았었다. 〈세종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성품이 오만하니 그 관직을 높여 줄 수는 없다. 관직이 높아지면 반드시 방자(放恣)할 것이다."

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제야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임명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전조(前朝)368) 의 옛것을 그대로 따라서 환관(宦官)들이 아직도 조관(朝官)의 직책을 겸임(兼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즉위(卽位)하자 엄하게 억제(抑制)를 가하여 죄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은 처음으로 제도를 정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가 되는 것은 허가하지 않았으며, 비록 공로에 대해 많이 주더라도 또한 2품의 관직은 경솔히 임명하지 아니했으니, 그 당시에 금대(金帶)369) 를 띤 사람은 늙은 환관(宦官) 10여 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김수(金壽)가 제수(除授)의 명령을 거짓 전함으로부터 일체의 장주(章奏)는 모두 대언(代言)370) 으로 하여금 친히 아뢰도록 하고, 맡은 직책은 등불을 밝히고 소제(掃除)하며, 잗다란 일을 출납(出納)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세종(世宗)은 항상 경계하기를,

"예로부터 나라 일을 그르치는 것은 모두 너희들이 했으니, 각자가 마땅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조사(朝士)371) 에게 무례(無禮)하게 행동한 자가 있으면 죄를 주고 용서가 없겠다."

하였으니, 이로부터 사람마다 스스로 근신하여 사대부(士大夫)를 보면 모두가 예절을 갖추어 존경하게 되었다. 말년(末年)에 사표국(司豹局)372) 을 설치하여 환관[寺人]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主管)하도록 하였고, 또 좌우 응방(左右鷹坊)을 설치했으니, 모두가 임금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견식(見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무리들이 장차 세력이 커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즉위(卽位)해서는 관대(寬大)함으로써 대우하여 책임을 지워 일을 시킴이 점차로 성하여지고, 상으로 하사(下賜)하는 것이 매우 많았다. 특별히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은혜를 팔고 세력이 강성해져서, 혹은 법가(法駕)373) 의 종자(從者)를 힐책(詰責)하기도 하고, 혹은 낭관(郞官)을 업신여겨 꾸짖기도 했으니, 말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 방자(放恣)하여 불법(不法)한 형상을 남김없이 진술했지마는, 임금은 이 무리들이 정권을 잡고 병권(兵權)을 장악하지 않았으니 제어할 것이 못된다고 하며 도리어 말하는 사람을 오활(迂闊)하다고 여기었다. 어떤 사람은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世宗)께서는 환관(宦官)을 대우함이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만년(晩年)에 비록 숙질(宿疾)로 심궁(深宮)에 오래 계셨지마는 측근 사람의 말이 그 사이에 행하지 못하였는데, 전하(殿下)께서는 마음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환관이 점점 방종해져서 훼방하고 칭찬하는 말이 때로 혹시 위에 들렸사오니, 이로써 말한다면 전하(殿下)의 강단(剛斷)이 세종(世宗)에게 미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선왕(先王)374) 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깊은 궁궐에서 나서 자라 놈들[환관]과 조석(朝夕)으로 함께 거처했으니, 나를 두려워함이 선왕(先王)과 같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나이 어린 군주는 혹시 친신(親信)할 이치도 있지마는, 나 같은 사람은 장성(長成)한 군주이니 저들 근습(近習)375) 이 능히 이간시킬 바는 아니다."

하였다. 처음에 임금께서 환관(宦官)으로써 내사복(內司僕)·군기감(軍器監)·충호위(忠扈衛)의 임무를 겸무시키려고 하여 가부(可否)를 여러 승지(承旨)들에게 물으니, 여러 승지들이 미처 대답하지 못했는데, 좌부승지(左副承旨) 정이한(鄭而漢)이 말소리가 나자마자 대답하기를,

"매우 좋고 매우 좋습니다."

하였으니, 그때 사람이 ‘찬미 승지(贊美承旨)’라고 불렀다. 칙사(勅使) 윤봉(尹鳳)정선(鄭善)이 올 적에 진기한 노리개꺼리 물건을 많이 가지고 와서 임금의 측근 신하에게 뇌물로 주어 하고 싶은 대로 이루기를 구하니, 임금은 정선(鄭善)이 동궁(東宮) 시절의 옛 공로가 있다고 하여 노비(奴婢)를 주려고 하였다. 대신(大臣)들은 모두 옳지 않다고 했지마는, 정이한(鄭而漢)은 형방 승지(刑房承旨)로서 중간에 있으면서 측근 신하들의 의사(意思)를 알고도 임금에게 권하여 많이 주도록 했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80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궁관(宮官)

  • [註 368]
    전조(前朝) : 고려(高麗).
  • [註 369]
    금대(金帶) : 정2품의 관원이 공복(公服)에 띠던 띠.
  • [註 370]
    대언(代言) : 승지(承旨).
  • [註 371]
    조사(朝士) : 조신(朝臣).
  • [註 372]
    사표국(司豹局) : 세종 27년(1445)에 대궐 안 내사복시(內司僕寺) 남쪽에 비밀리에 설치하였던 염초(焰硝) 굽던 곳.
  • [註 373]
    법가(法駕) : 임금의 행차할 때 노부(鹵簿)의 하나. 대개 선농(先農)에 제사하고 국학(國學)에 거둥하고 무과 전시(武科殿試)에 거둥할 때 쓰는 노부로서, 의물(儀物)은 전정(殿庭)의 반의장(半儀仗)임.
  • [註 374]
    선왕(先王) : 세종(世宗).
  • [註 375]
    근습(近習) : 환관(宦官).

○以宦官田畇爲嘉善大夫。 , 聰明過人, 有才幹, 世宗俾任文房之事。 世宗之傳敎, 集賢殿、承政院雜引古今經史之語, 累數百言, 近臣之對亦如之, 不識字, 而出納不錯一字, 以此見任, 然不授以二品。 嘗曰: "此人性驁, 不可高其官。 官高必橫。" 至是, 乃拜嘉善。 國初因前朝之舊, 宦官尙有帶朝職者, 太宗卽位, 痛加裁抑, 有罪不少假貸。 世宗始定制, 不許爲資憲, 雖積給事勞, 亦不輕授二品之職, 當時帶金者, 不過老璫十數輩而已。 自金壽詐傳除授之命, 一切章奏, 皆令代言親啓, 所職不過燈燭、灑掃、出納細事而已。 世宗嘗戒之曰: "自古誤國事者, 皆爾輩爲之, 各宜戒愼。 若有無禮於朝士者, 罪無赦。" 由是人各自愼, 見士大夫, 皆致禮敬。 末年置司𥔰局, 令寺人主之, 又置左右鷹坊, 皆上在東宮時, 所規畫也。 識者皆憂此輩之將張, 及卽祚, 待之以寬, 任使漸盛, 賞賜累多。 寵幸者市恩鴟張, 或責詰法從, 或慢罵郞官, 言者相繼極陳, 橫恣不法之狀, 上以此輩不秉政握兵, 不足制也, 故反以言者爲迂。 或言於上曰: "世宗待宦寺甚嚴。 晩年雖宿疾, 長在深宮, 而左右之言, 不得行於其間, 殿下寬仁, 宦寺稍縱, 毁譽之言, 時或上聞, 以此言之, 殿下剛斷, 似未及世宗。" 上曰: "予安敢望先王? 予生長深宮, 與奴輩, 朝夕與處, 所以畏我, 不如先王也。 然幼沖之君, 則或有親信之理, 如予長君也, 非彼近習所能間也。" 初上欲以宦寺, 兼內司僕、軍器監、忠扈衛之任, 問可否於諸承旨, 諸承旨未及對, 左副承旨鄭而漢應聲曰: "甚好甚好。" 時號贊美承旨。 勑使尹鳳鄭善之來也, 多齎玩好之物, 賂上左右, 求遂所欲, 上以有東宮舊勞, 欲與奴婢。 大臣皆以爲不可, 而漢以刑房承旨, 居中探左右意, 贊上多與之, 聞者皆唾罵。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80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궁관(宮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