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등이 새로 찬술한 《고려사절요》를 바치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찬술(撰述)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바쳤으니, 전문(箋文)에 이르기를,
"신(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진실로 황공(惶恐)하면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편년체(編年體)173) 는 좌씨(左氏)174) 에서 근본하였고, 기전체(紀傳體)175) 는 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시작되었는데, 반고(班固) 이후에 역사를 쓰는 사람이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조술(祖述)176) 하여 어김이 없는 것은 그 규모(規模)가 굉박(宏博)하고 저술이 해비(該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쓸데없이 길어서 구명(究明)하기 어려운 걱정을 면할 수가 없으니, 이는 역사가(歷史家)의 서로가 장·단점(長短點)이 있어 한쪽만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려(高麗)는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나서, 웅무(雄武)177) 로써 많은 악인을 제거하고 관대함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마침내 대업(大業)을 세워 후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교사(郊社)178) 를 세우고, 장정(章程)을 정하고, 학교를 일으키고, 과거(科擧)를 설치하고, 중서성(中書省)을 두어 기무(機務)를 총령(總領)함으로써 체통(體統)이 매인 바가 있고,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주군(州郡)을 살핌으로써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감히 방사(放肆)하지 못하였으며, 부위(府衛)179) 의 제도로써 군대를 농민에게 소속시키는 법을 얻게 되고, 전시(田柴)의 등급[科]은 벼슬하는 사람에게 대대로 국록(國祿)을 주는 뜻이 있게 되어, 형벌과 정사가 시행되고 법식(法式)이 갖추어져서 중앙과 지방이 편안해지고 백성과 물질이 풍부해졌으니, 태평의 정치가 성대(盛大)하다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중대(中代) 이후에는 조선(祖先)의 유업(遺業)을 능히 계승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폐행(嬖幸)180) 에게 미혹(迷惑)되고, 밖으로는 권간(權姦)181) 에게 제어(制御)되었으며, 강적(强敵)이 번갈아 침범하여 전쟁이 많이 일어났으니, 점접 쇠퇴(衰頹)하여 가성(假姓)182) 이 왕위(王位)를 절취(竊取)하는 지경에 이르러 왕씨(王氏)의 제사를 이미 혈식(血食)183) 되지 못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이 반정(反正)했지마는 마침내 우매하고 나약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대개 하늘이 진주(眞主)184) 를 낳아서 우리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써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맨 먼저 보신(輔臣)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찬수(纂修)하도록 하셨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또 틀린 점을 교정(校正)하도록 명하셨으나 마침내 성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는 신성(神聖)한 자질로써 문명(文明)의 교화를 밝혀서 신(臣) 등에게 명하여 요속(僚屬)을 선발하여 사국(史局)을 열고 편찬하되 전사(全史)를 먼저 편수(編修)하고 그 다음에 편년(編年)185) 에 미치도록 하였으니, 신 등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명령을 받들어 감히 조금도 게으르지 못하였는데, 불행히도 글을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군신(群臣)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선왕(先王)의 뜻을 공손히 계승하여 신 등으로 하여금 일을 마치도록 하시니, 생각해 보건대 일찍이 선왕에게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거칠고 고루한 이유로써 굳이 사양할 수가 없습니다. 신미년186) 가을에 글이 완성되었는데, 이에 또 사적(事迹)이 세상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것과 제도가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을 모아서 번잡한 것은 제거하고 간략한 것만 취하고 연월(年月)을 표준하여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여 고열(考閱)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그런 후에 4백 75년의 32왕의 사실이 포괄(包括)되어 빠진 것이 없고 상세함과 간략함이 다 거론(擧論)됨으로써 역사가(歷史家)의 체재(體裁)가 비로소 대략 구비된 듯합니다. 비록 문사(文辭)가 비리(鄙俚)187) 하고 기차(紀次)188) 가 정밀(精密)하지 못하지마는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는 데에 있어서는 정치하는 방법에 조금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조촐한 연회의 여가에 때때로 살피고 관람하여서 옛것을 상고하는 성덕(盛德)에 힘쓰고, 세상을 다스리는 대유(大猷)를 넓혀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그 은혜를 받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찬술(撰述)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을 삼가 전문(箋文)에 따라 아룁니다."
하였다. 김종서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의 역사도 오히려 구해 보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의 역사이겠습니까? 대신(大臣)들이 자못 구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마땅히 빨리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頒布)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본사(本史)가 비록 사적(事迹)은 상세하지 못하지마는, 이를 버리면 다른 데는 상고할 글이 없습니다. 혹시 빨리 인쇄하지 않는다면 벌레가 먹어 파손(破損)될까 두려우니, 또한 마땅히 빨리 인쇄하여 여러 사고(史庫)에 간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사란 것은 후세(後世)에 보여서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숨겨서는 안되니, 마땅히 인쇄하여 이를 반포(頒布)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하니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찬술(撰述)하도록 했는데, 정도전이 관장(管掌)하는 사무가 많아서 이 일은 요속(僚屬)에게 맡겼으나, 이로 말미암아 빠져나간 부분이 매우 많았었다. 태종(太宗)은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대조 교정(校正)하도록 했으며, 세종(世宗)은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쳐 찬술(撰述)하도록 했으니, 정도전의 초고(草藁)에 비하면 조금 상세한 편이었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김효정(金孝貞)이 말하기를,
"윤회(尹淮)가 찬술(撰述)한 것에 또한 빠지고 간략히 한 실수가 있으니 후세에 전해 보일 수 없습니다."
하니, 이에 권제(權踶)에게 명하여 이를 찬술(撰述)하도록 하였다. 권제(權踶)가 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과 더불어 찬록(撰錄)·부집(裒集)한 것은 이가(二家)189) 보다는 상세한 편이었지만, 그 좋아하고 미워함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필삭(筆削)190) 이 공정(公正)하지 못하였다. 일이 발각나게 되니,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정인지(鄭麟趾) 등과 더불어 이를 찬술(撰述)하도록 하였다. 김종서 등은 편년체(編年體)는 상세히 구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 기전체(紀傳體)의 법에 의거하여 과(科)를 나누어 완성을 책임지워,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 등으로 하여금 열전(列傳)을 찬술(撰述)하도록 하고, 노숙동(盧叔仝)·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이예(李芮)·윤기견(尹起畎)·윤자운(尹子雲) 등으로 하여금 기(紀)·지(志)·연표(年表)를 나누어 찬술(撰述)하도록 하고는, 김종서가 정인지·허후(許詡)·김조(金銚)·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신석조(辛碩祖) 등과 더불어 이를 산삭(刪削) 윤색(潤色)하였다. 이때 권제(權踶)·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이 새로 중죄(重罪)를 얻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모두 몸을 움츠려서 산삭(刪削)하지 못했으므로, 자못 번란(煩亂)하고 용장(冗長)191) 한 곳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歷史家)의 체례(體例)가 비로소 구비되었으므로, 이때에 와서 그 간절하고 요긴한 것만 모아서 사략(史略)192) 을 찬술(撰述)하여 바치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67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註 173]편년체(編年體) : 시대순(時代順)에 따라 사실(史實)을 서술하는 역사 편찬의 한 체재(體裁). 이 편년체는 중국의 《춘추(春秋)》에서 비롯되었음.
- [註 174]
좌씨(左氏) : 좌구명(左丘明).- [註 175]
기전체(紀傳體) : 역사 현상의 총체를 본기(本紀:임금의 사적)·열전(列傳:중요 인물의 전기)·지(志:제도 관계)·표(表:연표와 인명표) 등으로 분류하여 기술한 역사 편찬의 한 체재. 중국의 《사기(史記)》에서 유래되었음.- [註 176]
조술(祖述) : 본받아 서술함.- [註 177]
웅무(雄武) : 뛰어난 무력(武力).- [註 178]
교사(郊社) : 천지(天地)의 제사.- [註 179]
부위(府衛) : 부병(府兵).- [註 180]
폐행(嬖幸) : 총애를 받는 총희(寵姬).- [註 181]
권간(權姦) : 권세 있는 간신(奸臣).- [註 182]
가성(假姓) :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은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이름.- [註 183]
혈식(血食) : 희생(犧牲)을 올려 제사를 지냄.- [註 184]
진주(眞主) : 진명지주(眞命之主).- [註 185]
편년(編年) : 편년체(編年體).- [註 186]
신미년 : 1451 문종 1년.- [註 187]
비리(鄙俚) : 상스러움.- [註 188]
기차(紀次) : 기술(紀述)한 순서.- [註 189]
이가(二家) : 정도전(鄭道傳)과 윤회(尹淮).- [註 190]
○監春秋館事金宗瑞等, 將新撰《高麗史節要》, 以進箋曰:
臣金宗瑞等, 誠惶誠恐, 稽首稽首。 竊謂, 編年本於左氏, 紀傳創於遷史, 自班固以後, 爲史者皆祖述遷史, 而莫之違者, 以規模宏博, 而著述得以該備也。 然不免冗長, 難究之患, 此史家之互有長短, 而不可以偏廢也。 粤維高麗起於唐季, 以雄武而剗群兇, 以寬大而得衆心, 遂建大業, 以裕後昆。 迨夫立郊社、定章程、興學校、設科擧、置中書, 摠機務, 而體統有所繫, 遣廉使, 察州郡, 而貪汙不敢肆, 府衛之制, 得寓兵於農之法, 田柴之科, 有仕者世祿之意, 刑政擧品式備, 中外寧謐, 民物殷阜, 太平之治, 可謂盛矣。 中葉以降, 不克負荷, 內爲嬖幸之所感, 外爲權姦之所制, 强敵交侵, 干戈爛熳陵夷, 至於假姓竊位, 而王氏之祀, 已不血食, 恭讓反正, 竟以昏懦, 自底於亡。 蓋天生眞主, 以靖夷我民, 固非人力之所爲也。 太祖康獻大王, 首命輔臣, 纂修《麗史》, 太宗恭定大王, 又命讎正謬誤, 而竟未就緖。 世宗莊憲大王, 以神聖之資, 闡文明之化, 命臣等, 選辟僚屬開局, 編摩先修全史, 次及編年, 臣等袛慄奉承, 不敢少懈, 不幸書未進御, 而奄棄群臣。 主上殿下, 恭承先志, 今臣等竣事, 顧嘗受命於先王, 不敢以荒陋固辭。 越辛未秋, 書乃克成, 於是又裒集, 事迹之關於世敎者, 制度之可爲矜式者, 刪煩就簡, 表年敍事, 以便考閱, 然後四百七十五年、三十二王之事, 包括無遺, 詳略畢擧, 而史家之體, 始若粗備。 雖文辭鄙俚, 紀次不精, 而於善惡勸懲, 小有補乎治道。 淸讌之暇, 時賜省覽, 懋稽古之盛德, 恢經世之大猷, 使斯民咸受其賜, 不勝幸甚。 所撰《高麗史節要》三十五卷, 謹隨箋以聞。
宗瑞啓曰: "他國之史, 尙且求見, 況我國之史乎? 大臣頗有求觀者, 宜速印之, 頒諸中外。 且本史, 雖未悉事迹, 然捨此則他無可考之文。 倘不速印, 則恐至蠱損, 亦宜速印藏諸史庫。" 上曰: "史者, 欲示後世, 以爲勸懲, 不可隱諱, 當印而頒之。" 初太祖開國, 命鄭道傳, 撰《高麗史》, 道傳以所掌事多, 委之僚屬, 由是脫漏甚多。 太宗命河崙讎校, 世宗命尹淮改撰, 比鄭草稍詳。 同知春秋館事金孝貞以爲: "尹淮所撰, 又失於脫略, 不可傳示後世。" 乃命權踶撰之。 踶與安止、南秀文, 撰錄裒集, 詳於二家, 然任其好惡, 筆削不公。 事發, 命金宗瑞與鄭麟趾等撰之。 宗瑞等以爲, 編年難以詳備, 乃從紀傳之法, 分科責成, 令崔恒、朴彭年、申叔舟、柳誠源、李克堪等, 撰列傳, 盧叔仝、李石亨、金禮蒙、李芮、尹起畎、尹子雲等, 分撰紀、志、年表, 宗瑞與麟趾、許詡、金銚、李先齊、鄭昌孫、辛碩祖等, 刪潤之。 時踶、止、秀文, 新得重罪, 史官皆局促, 不得刪削, 頗有煩亂冗長處。 然史家體例始備, 至是集其功而要者, 撰史略以進。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67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註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