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참찬 안숭선이 《속육전》에 별집의 형식으로 격례로 된 각사의 일을 기록하도록 청하다
정사(政事)를 보았다.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아뢰기를,
"그 전에 《속육전(續六典)》을 수찬(修撰)할 때, 각사(各司)에서 항상 행하여 이미 격례(格例)로 된 일은 모두 기록(記錄)하여 싣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관리가 위의 항목의 본래의 취지(取旨)를 알지 못하고 산삭(刪削)한다고 생각하여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거행하지 못하는 일이 자못 많습니다. 빌건대, 추가하여 별집(別集)에 기록하여 싣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육전(六典)》 이후 매년마다 수교(受敎)한 것도 수찬할 때에 아울러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에게 이르기를,
"‘온성(穩城)의 읍성(邑城)을 내가 오는 봄에 쌓고자 한다.’ 하니, 허후가 말하기를, ‘생각건대 봄철에는 전염병이 흥행(興行)하는데, 또 힘드는 역사를 더하면 즉 도리어 백성을 상하게 하는 데 이를 것이니 가을에 이르러 쌓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으나, 나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개성부(開城府)는 옛 도읍지로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왕래하는 땅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성(城)이 무너지면 마땅히 급급하게 수축하여야 하는데, 또 그 거민(居民)의 부역(賦役)이 빈번하고 무거워서 생업이 심히 어렵게 될 것이니, 구휼(救恤)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좋겠다. 옛날에는 속현(屬縣)인 풍덕(豊德)·송림(松林) 등 몇 고을은 이제 다시 본부(本府)에 소속시켜, 인민이 부서(富庶)1550) 하게 하고, 군액(軍額)을 넉넉히 하여서 거진(巨鎭)으로 하라. 또 청태(靑笞)와 홍화(紅花)를 갈고 심을 때 관리를 보내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 하천의 제방과 관개(灌漑)는 그 이익이 대단히 크므로 내가 어질고 상서로우며 부지런하고 민첩한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위임하고자 한다. 지금 하삼도(下三道)는 차츰 그 이익을 얻으니 마땅히 다시 검거(檢擧)하겠으나, 단지 동서(東西) 양계(兩界)만은 수리(水利)에 어두우니 더욱 지극히 염려된다. 위임할 사람으로 누가 좋은가? 또 10인이 같은 죄로 직첩(職牒)을 회수당하였다가 그것을 도로 줄때에 이르러 산 사람만 특별히 도로 받는 은혜를 입고 죽은 사람은 홀로 은혜를 입지 못하니, 또한 아울러 돌려주는 것이 어떤가? 그것을 정부의 대신과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정사(政事)를 보는 것이 끝나자, 황보인(皇甫仁)·남지(南智)·김종서(金宗瑞)·안숭선(安崇善)·허후(許詡)를 부르고, 이계전(李季甸)에게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니, 황보인·남지·김종서 등이 말하기를,
"봄철에 돌을 주우면 전염병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가을철에 돌을 줍고 성 쌓는 것을 아울러 한다면 비록 많은 사람을 움직이더라도 돌을 줍는 곳이 멀어서 1년에 쌓기를 마치지 못할 듯하니, 봄철에 돌 줍는 군인을 윤번으로 역사에 나가게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안숭선이 말하기를,
"성을 쌓는 것은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봄철에 백성을 부리다가 전염병이 아울러 유행하면 도리어 백성을 상하게 하는 데 이르를 것이니, 가을철에 역사를 시키는 것이 편이(便易)합니다."
하였다. 허후도 말하기를,
"봄철에 돌 줍는 것을 그만두고, 가을철에 군인을 배로 정하여 돌을 줍고 성 쌓는 것을 아울러 하소서."
하였으나, 황보인 등의 의논을 따랐다. 하천 제방의 일은 모두 말하기를,
"하천 방축의 이익 가운데 매우 커다란 이익이 있는 곳은 거의 모두 방축을 쌓고 이미 세운 법에 의하여 시행하니 별도의 예로 사람을 임명하여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양계는 진펄[沮洳處]1551) 에 경작할 만한 곳이 매우 많으나, 아직 기경(起耕)하지 않는데, 어찌 하천에 제방 쌓기를 일삼겠습니까? 마땅히 유서(諭書)를 내려 진펄[沮洳處]의 백성들로 하여금 갈고 씨를 뿌리게 하소서."
하였다. 허후가 말하기를,
"신이 전에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을 때 하천 제방의 일로써 유서를 내리니, 신이 마음을 다하여 조치하고 백성들에게 가려서 막도록 권장하였으나, 결국 그 효과는 없었으니, 단지 이미 세운 법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황보인 등의 의논을 따랐다. 개성부(開城府)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에 대하여 황보인과 남지가 말하기를,
"전에홍화(紅花)1552) ·청태(靑苔)1553) 를 경작하였기 때문에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인순부(仁順府)·인수부(仁壽府)·도염서(都染署) 등 5개 사(司)의 관원 각각 1인이 내려갔었는데, 정사년1554) 부터는 이것이 폐단이 있기 때문에 해마다 1개 사(司)의 관원만 보내어 5개 사(司)의 일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여 개성부를 총괄하여 다스렸습니다. 홀로 침장고(沈藏庫)1555) 의 관원은 매년 1명씩 내려보내니, 그 홍화·청태를 갈고 심는 것과 김장의 일을 부득이 하여야 한다면 그전대로 관원을 보내는 것이 편합니다."
하니, 김종서·안숭선·허후가 말하기를,
"각사(各司)에서 경작하는 물색(物色)을 상납(上納)하는 숫자와, 역사에서의 인부의 출처와 폐단의 유무(有無)를 자세하게 상고한 뒤에 다시 의논하소서."
하므로, 김종서 등의 의논을 따랐다. 황보인 등이 또 말하기를,
"개성부(開城府) 근방의 몇 고을을 일찍이 본부(本府)에 소속시켰으나 그 뒤 폐단만이 있고 이익은 없어서 다시 경기(京畿)로 소속시켰으니, 그전대로 하는 것이 편합니다. 성을 수축(修築)하는 것은 대신을 보내어 살펴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다. 직첩(職牒)을 수탈(收奪)당한 자에게 죽은 뒤에도 다시 내어줄지의 여부(與否)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사면(赦免)할 수 없는 죄 이외에 으레 다시 내어주어야 할 자에게는 도로 내어주는 것이 편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52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역사(歷史) / 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농업-수리(水利)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인사-관리(管理)
- [註 1550]부서(富庶) : 백성이 많이 부유함.
- [註 1551]
진펄[沮洳處] : 진창으로 된 펄.- [註 1552]
홍화(紅花) : 잇꽃. 붉은 물감의 재료로 쓰였음.- [註 1553]
청태(靑苔) : 푸른 빛의 이끼. 푸른 물감의 원료로 쓰였음.- [註 1554]
정사년 : 1437 세종 19년.- [註 1555]
침장고(沈藏庫) : 김장이나 야채 따위를 담구거나 갈무리하던 궁중 안의 창고, 또는 그 일을 맡아보던 관아(官衙).○丙午/視事。 左參贊安崇善啓曰: "昔《續六典》修撰時, 各司常行, 已成格例之事, 不幷載錄, 今者官吏, 未知上項本旨, 以爲刪而不錄, 因此不擧行之事頗多。 乞宜追錄別集。" 上曰: "《六典》以後, 各年受敎修撰時, 幷撰爲可。" 上謂都承旨李季甸曰: "穩城邑城, 予欲於來春築之。 許詡以爲: ‘春節疫癘興行, 又加力役, 則反致傷民, 宜至秋乃築。’ 予未領其要。 開城府舊都也, 中朝使臣往來之地, 不可不修葺也。 其城頹壞, 宜汲汲修築, 且其居民賦煩役重, 生業甚難, 宜擧救恤之方。 昔有屬縣豐德、松林等數邑, 今復屬本府, 使人民富庶, 軍額有實, 以爲巨鎭。 又靑笞紅花耕種時, 除遣官何如? 川防灌漑, 其利甚大, 予欲擇慈祥勤敏者, 委任之。 今下三道, 稍得其利, 當更檢擧, 但東西兩界, 昧於水利, 尤當致慮。 其委任之人, 何者可乎? 且十人同罪, 見收職牒, 至其還給之時, 則生者特蒙還給之恩, 而死者獨未蒙恩, 亦竝還給, 何如? 其與政府大臣, 僉議以啓。" 視事罷, 召皇甫仁、南智、金宗瑞、安崇善、許詡, 命季甸議之, 仁、智、宗瑞曰: "春節拾石, 疾疫可畏。 然秋節拾石、築城竝擧, 則雖擧大衆, 拾石處遠, 一年似未畢築, 春節拾石軍人, 令輪番赴役爲便。" 崇善曰: "築城, 欲其保民也。 春節使民, 疾疫竝行, 則反致傷民, 秋節役使便易。" 詡曰: "除春節拾石, 秋節倍定軍人, 拾石、築城竝擧。" 從仁等議。 川防事, 僉曰: "川防之利, 甚大有利之處, 則庶皆防築, 依已立之法施行, 不必別例差人。 兩界則沮洳可耕之地甚多, 尙不起耕, 何事川防? 宜下諭書, 沮洳處使民耕種。" 詡曰: "臣昔爲京畿監司時, 以川防事下諭書, 臣盡心布置, 勸民防塞, 竟無其效, 但依已立之法施行。" 從仁等議。 開城府救弊事, 仁、智曰: "前此以紅花、靑笞耕種, 內資、內贍寺、仁順、仁壽府、都染署, 五司官員, 各一人下去, 自丁巳年, 以其有弊, 每年只遣一司官員, 兼治五司之事, 開城府摠治。 獨沈藏庫官員, 每年一人下去, 其紅花、靑笞耕種, 及沈藏之事, 不得已爲之, 則仍舊遣官爲便。" 宗瑞、崇善、詡曰: "各司耕種物色, 上納之數, 役使人夫出處, 弊之有無, 詳考後更議。" 從宗瑞等議。 仁等又曰: "開城府旁近數邑, 曾屬本府, 其後以有弊無益, 還屬京畿, 仍舊爲便。 修築城子, 遣大臣審視後, 更議施行。" 職牒收奪者, 死後還給與否, 僉曰: "不赦之罪外, 例當還給者, 還給爲便。" 皆從之。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52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역사(歷史) / 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농업-수리(水利)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인사-관리(管理)
- [註 1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