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경 대부의 자제들이 처음 벼슬하는 나이의 한계를 의논케 하다
정사(政事)를 보았다.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은 국가의 명백을 배양(培養)하는 곳이므로, 공경(公卿)·대부(大夫)·사(士)의 적자(適子)로서 나라의 준수(俊秀)한 자를 모두 가르칩니다. 신이 요즈음 보건대, 공경·대부의 아들 가운데 입학하는 자가 드문데, 비록 준수(俊秀)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세가(世家)의 자제로서 견문(見聞)한 소양(素養)이 있는 자와는 같지 못합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나이가 5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방학(放學)을 얻게 되는데, 지금의 자제들은 음사(蔭仕)1430) 를 받아서 나이가 겨우 20세에 사판(仕版)1431) 에 오르니, 배울 만한 사람을 헛되게 버리어 학업을 익히게 하지 않으니 대단히 불가(不可)합니다. 공경·대부의 자제들이 처음 벼슬하는 나이의 한계를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부(政府)와 함께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으나,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견기(李堅基)가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낭청(郞廳)은 7명인데, 1명은 오로지 환상(還上)의 출납을 관장하고, 6명이 5부(五部)와 성저십리(城底十里)를 나누어 관장하여 매 아일(衙日)1432) 에 순행(巡行)하면서 왕도(王都)를 숙청하게 하고 흉인(凶人)이 잠복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또 잡송(雜訟)과 추징(追徵)의 사무도 있고, 지금은 또 소나무 벌목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하니, 사무가 지극히 번잡하고 많습니다. 낭청(郞廳)은 자주 교체되고, 또 각종 제사(祭祀)에 집사(執事)로서 차출(差出)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사무를 못 봅니다. 빌건대, 당상(堂上) 1인을 제수하여 낭청을 더하여 설치(設置)하고, 잡사(雜事)와 10년 이상의 추징은 면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징의 일은 전일에 이미 대신과 의논하였으나 의논이 같지 아니하여 이때까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한성부(漢城府)가 추징의 일을 맡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자주 교체되는 일은 수령(守令)이 개만(箇滿)하여 체대(遞代)한다고 핑계하여 서로 추이(推移)1433) 하니, 남을 위하여 벼슬을 고르는 것이 이런 시끄러움을 가져온다."
하고, 김종서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소나무 벌목을 금지하는 것은 정부(政府)의 의논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하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소나무 벌목을 금지하는 것은 5부(五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맡아 보게 하여도 또한 가(可)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다시 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정사(政事)를 보는 것이 끝나자,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친히 제수(除授)를 하고자 하지만 지금까지 하지 않았다. 개만(箇滿)한 수령을 하필이면 동반(東班)에 제수하여 그 추이(推移)를 번거롭게 하겠느냐? 우선 서반(西班)에 제수하였다가 결원이 있기를 기다린 뒤에 그를 동반(東班)으로 옮기고, 또 각사(各司)에서는 비록 개월(箇月)을 어기더라도 구임(久任)1434) 하는 것이 편하겠다. 하나의 관사에 결원이 있으면 즉시 그 결원을 채우면 그만이지 어찌 반드시 추이(推移)할 것인가? 한성부(漢城府)의 관원을 각 제사의 집사관(執事官)으로 어찌하여 차정(差定)하느냐?"
하니,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이 대답하기를,
"개만(箇滿)한 수령(守令)을 서반(西班)에 제수(除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인품(人品)이 동반(東班)에 쓸 만한 사람은 수령으로 6년 이상씩을 근무하여 서반에 제수하는 것이 불가한 까닭에 반드시 동반에 제수하였습니다. 그 결원이 있는 경우에만 다만 전함(前銜)으로 충당하여 임명한다면 진실로 추이(推移)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나, 다른 관원으로 충당하여 임명한다면 또 그 결원을 채워야 되므로 이로 인하여 소란하게 추이(推移)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한성부의 관원으로 제사의 집사관(執事官)으로 차정(差定)하는 것은 단지 참군(參軍) 2인뿐이요, 그것도 가끔 하는 것인데, 어찌 일을 폐함이 있겠습니까? 자주 체임하는 일은 각사(各司)에서 개월(箇月)이 차는 것 이외에는 서로 추이하는 것이 이미 격례(格例)를 이루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도관(都官)의 관원이 이처럼 자주 체임되었는데, 자주 체임시키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한성부도 또한 이 예에 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한성부(漢城府)의 일은 도관(都官)만 같지 아니한데, 어찌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45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註 1430]음사(蔭仕) : 과거(科擧)를 보지 않고 부조(父祖)의 공(功)으로 얻어 하는 벼슬. 남행(南行).
- [註 1431]
사판(仕版) : 관리의 명부.- [註 1432]
아일(衙日) : 임금과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이 모여 대조회(大朝會)를 하던 날. 대개 한 달에 4번 또는 6번 있었는데, 이를 사아일(四衙日) 또는 육아일(六衙日)이라 하였음.- [註 1433]
추이(推移) : 벼슬 임기가 찬 사람이 그 후임 자리에 적당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옮겨 가던 일. 자대(自代).- [註 1434]
구임(久任) : 한자리에 오래도록 근무하는 것.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직위는 대개 구임관(久任官)이었음.○丁丑/視事。 左贊成金宗瑞啓曰: "成均館, 培養國脈之地, 公卿、大夫、士之適子, 與國之俊秀, 皆敎之。 臣近見, 公卿、大夫之子, 入學者鮮少, 雖有俊秀, 不如世家子弟, 聞見之有素。 本朝設宗學, 年至五十, 始得放學, 今子弟蒙蔭, 年纔二十, 登仕版, 可學之人, 虛棄不習, 甚不可也。 公卿、大夫之子, 始仕年限, 更議何如?" 上曰: "與政府議節目以啓。" 事竟不行。 判漢城府事李堅基啓曰: "本府郞廳七人, 一人專掌還上出納, 六人分掌五部, 及城底十里, 每衙日巡行, 肅淸王都, 禁伏凶人。 又有雜訟及追徵之事, 今又禁伐松木, 事務至繁, 而郞廳頻數遞代, 又差各祭執事, 因此廢事。 乞除堂上一人, 加設郞廳, 除雜事及十年以上追徵。" 上曰: "追徵之事, 前日已與大臣議之, 議論不同, 時未定也。 然予意以爲, 漢城府勿受追徵之事爲是。 數遞之事, 托以守令, 箇滿遞代, 互相推移, 爲人擇官, 致此紛紜。" 顧謂宗瑞曰: "禁伐松木, 政府之議也, 何以爲之?" 宗瑞曰: "禁伐松木, 令五部官員掌之, 亦可。" 上曰: "其更議于政府以啓。" 視事罷, 傳敎承政院曰: "予欲親除授, 而時未爲也。 箇滿守令, 何必除東班, 煩其推移? 姑除西班, 待有闕然後, 移之東班, 且各司雖非箇月, 久任爲便。 一官有闕, 卽塡其闕而已, 何必推移乎? 漢城府官員, 各祭執事, 何以差定?" 都承旨李季甸對曰: "箇滿守令, 敍於西班者多矣。 其中人品可用東班者, 勤勞六年之餘, 不可敍於西班, 故必除東班。 其有闕者, 只以前銜充差, 則固無推移之弊, 以他官充差, 則又塡其闕, 因此有紛紜, 推移之弊。 漢城府官員, 差祭執事者, 只參軍二人, 往往爲之, 何廢事之有? 數遞之事, 箇月各司外, 互相推移, 已成格例。 前此都官官員, 如此數遞, 命勿數遞, 漢城府亦依此例何如?" 上曰: "漢城府之事, 不如都官, 何必乃爾?"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45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註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