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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9권, 문종 1년 9월 13일 무신 2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의정부에서 이명신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이제 형조(刑曹)의 정문(呈文)을 보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명신(李明晨)황해도(黃海道) 문화(文化) 사람 사정(司正) 임덕성(林德成)의 노비(奴婢)들을 그의 장모[妻母] 경선 공주(慶善公主)의 사패(賜牌)1244) 에 지급한 계집종 용진이(龍珍伊)의 누락(漏落)된 소생이라 칭탁하고 문화(文化) 등 각 고을에 고소하 여 바야흐로 송사하여서 이직 미결 중에 있는데, 소송 중의 노비 14구(口)와 이 소송과 관계없는 노비 24구, 그리고 또 공처비(公處婢)1245) 2구 등을 불러서 끌어다가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 등지에 나누어 두고 은밀히 부리다가 이 사실이 발각됨에 이르러서는 시일을 끌며 은닉(隱匿)해 두고 아직까지 내놓지 않는 그 죄를 성상께서는 논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일찍이 이상항(李尙恒)은 수명의 노비가 더 넘었다 하여 오히려 직첩까지 빼앗은 바 있는데, 이제 이명신은 소송이 당치않은 노비 14구와 소송과 관계없는 노비 24구, 공처비 2구 등을 불러다가 이들을 타일러서 옮겨 놓았으니, 율문(律文)을 상고하건대, 그 죄는 응당 장(杖) 1백에 처할 것이 둘이나 되고 장(杖) 1백에 몸은 수군(水軍)에 충당하게 할 것이 하나이니, 죄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 직첩을 수탈(收奪)하거나 혹은 유배(流配)하게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금이(今伊)의 죄는 관을 속이고 은밀히 재물을 취득하였다는 것으로 논단하는 것이 정률(正律)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마땅히 절도로 논단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 등도 또한 생각하기를, 비록 절도로 논한다 하여도 상거(相距)가 과히 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다만 김관(金瓘)을 와주(窩主)로만 논하여서는 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김관이 즉일로 그 정실을 알고 전전하며 물품을 은닉한 바 있어 그 진범(眞犯)이나 다를 것이 없으나 원래 더불어 공모하지는 않았으니 그 죄는 가벼울 것 같습니다. 절도의 종범(從犯)이 된 것에 준하여 논단하여 장(杖) 1백, 도(徒) 3년에, 자자(刺字)를 면(免)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양계원(楊繼元)·유지(庾智)의 일은 성상의 하교가 아직 그 정상(情狀)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러합니다. 다만 유종식(柳宗植)은 각각 여러 사람들의 납초(納招)가 이미 저와 같아서 가령 유종식을 국문(鞫問)한다 하더라도 응당 면치 못했을 것인데, 마침 사유(赦宥)를 만나 다행히 면하게 된 것입니다. 또 듣건대, 유종식개성부(開城府)에 있을 때, 자기 소유인 덮개가 있는 교자(轎子)에다가 관아에 있는 채단(彩段)을 써서 장식하고 유후(留後) 이선(李渲)에게 주어 보냈다가 체임(遞任)되어 서울로 돌아와서 이것을 찾아갔으니 이 역시 그 탐오(貪汚)의 일단입니다.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이명신(李明晨)유종식(柳宗植)은 파직(罷職)하고, 김관(金瓘)의 일은 강맹경(姜孟卿)으로 하여금 다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황보인 등이 헌의하기를,

"금이(今伊)는 의당 절도(竊盜)의 수(首)로 논해야 할 것이요, 김관(金瓘)은 절도(竊盜)의 종(從)으로 논하여 자자(刺字)를 면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고, 또 이명신(李明晨)은 죄명(罪名)이 한둘이 안닌데, 다만 그 직위(職位)만 파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그 직첩(職牒)을 거두었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33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인사-관리(管理) / 신분(身分)

  • [註 1244]
    사패(賜牌) : 임금이 공신(功臣)이나 종실(宗室)에 전토(田土)나 노비(奴婢)를 내려 줄 때 주던 증서.
  • [註 1245]
    공처비(公處婢) : 관가에서 부리던 비.

○議政府啓曰: "臣等今觀刑曹呈文, 知敦寧府事李明晨黃海道 文化人司正林德成奴婢等, 托以妻母慶善公主賜牌付婢龍珍伊漏落所生, 告于文化等各官, 方訟未決, 所訟奴婢十四口, 及所訟不干奴婢二十四口, 又公處婢二口等, 招引分置慶尙全羅等道, 潛隱使喚, 及至事覺, 淹延隱匿, 尙不現納之罪, 命勿論。 臣等以爲, 李尙恒以濫數口奴婢, 猶奪職牒, 今明晨所訟不當奴婢十四口, 所訟不干奴婢二十四口, 公處婢二口等, 招諭移置, 按律罪應杖一百者二, 杖一百身充水軍者一, 不可不抵罪。 或奪職牒, 或流配何如?" 又啓: "今伊之罪, 論以詐欺官私取財, 似是正律。 然上敎當以竊盜論之, 臣等亦以爲, 雖論以竊盜, 未甚相遠, 但金瓘論以窩主則未便。 卽日知情, 轉轉藏匿, 無異眞犯, 然元不與謀, 罪疑惟輕。 准竊盜爲從論, 杖一百徒三年, 免刺何如?" 又啓: "楊繼元庾智之事, 上敎以爲, 情狀未著。 此則然矣。 若柳宗植則各人納招已如彼, 假令鞫問宗植, 應亦未免, 但會赦幸免耳。 又聞宗植開城府, 以自己有屋轎子, 用官中彩段粧飾, 贈留後李渲以送, 及遞還于京取去, 此亦貪汚之一事。 請罷之。" 上命罷明晨宗植職, 之事, 令姜孟卿, 更議于皇甫仁金宗瑞等議曰: "今伊宜以竊盜爲首論, 則以竊盜爲從論, 免刺爲便。 且明晨罪名非一二, 但罷其職未便。" 命收職牒。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33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인사-관리(管理)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