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바치니,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었다.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전문은 이러하였다.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보아 법으로 삼고 뒷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 대개 이미 지나간 흥망(興亡)의 자취는 실로 오는 장래의 권계(勸戒)1109) 가 되므로 이에 편간(編簡)1110) 을 엮어 감히 임금[冕旒]께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왕씨(王氏)가 처음 일어난 것은 저 태봉(泰封)으로 부터 굴기(崛起)하여서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후백제(後百濟)를 멸하고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한 집안을 이룩하였으며, 요(遼)나라를 버리고 당(唐)나라를 섬겨서 중국을 높이 받들어 동토(東土)1111) 를 보전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번거롭고 가혹한 정치를 개혁하고, 크고도 원대(遠大)한 법규를 크게 넓혔습니다. 광종(光宗)1112) 이 친히 임헌(臨軒)1113) 하여 선비들을 시험하여 뽑으니, 유학(儒學)의 기풍이 점차 일어났고, 성종(成宗)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니 왕가로서 다스리는 기구(器具)가 갖추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종[宣讓]1114) 이 왕위에서 실각하자 국운이 거의 기울 뻔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현종(顯宗)1115) 이 중흥(中興)의 공을 이루니 나라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문종(文宗)1116) 이 태평한 정치를 여니 인민과 만물이 함께 평화를 누렸습니다. 후사(後嗣)1117) 들이 혼미(昏迷)하게 되자, 권신(權臣)들의 독단과 방자함이 있었습니다. 군병으로 포위하여 임금 자리[神器]를 엿본 것이 처음 인종(仁宗)1118) 때 그 시초를 보이더니, 역모(逆謀)를 꾀하여 임금의 권한이 아래 사람에게 있었던 일[倒太阿]1119) 이 의종(毅宗)1120) 이 재위하던 때에 마침내 일어났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거간(巨姦)1121) 들이 번갈아 선동하여 임금을 마치 바둑이나 장기를 두듯이 세우니, 강한 외적들이 번갈아 침범하여 백성들을 마치 풀잎을 베듯이 죽이었습니다. 원종[孝順]1122) 이 위태로왔던 큰 국난을 평정하여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보전하였습니다. 충렬왕(忠烈王)1123) 은 놀이와 잔치에서 뭇 계집을 가까이 하다가 마침내 부자(父子) 사이의 혐의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또 충숙왕(忠肅王)1124) 이래로 공민왕(恭愍王)1125) 대에 이르기까지 변고가 여러 번 일어나 나라의 쇠퇴가 더욱 깊어가더니, 그 근본이 위조(僞朝)1126) 때에 다시 한 번 찌그러져, 역수(歷數)가 마침내 진주(眞主)1127) 에게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그 용맹과 지혜를 하늘이 주시어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 갔습니다. 이에 그 성무(聖武)를 널리 펴서 수많은 간난(艱難)1128) 을 헤치시고 능히 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정부(貞符)1129) 를 잡으시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시어 한 국가를 창건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고려(高麗)의 사직(社稷)이 비록 이미 구허(丘墟)1130) 로 돌아갔지만 그 역사는 인몰(湮沒)하게 할 수 없다 하시고, 사씨(史氏)에게 명하사 《통감(通鑑)》1131) 의 편년체(編年體)를 본따서 편찬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태종(太宗)께서 계승하게 되자, 이를 재상(宰相)에게 말하시어서 수교(讎校)1132) 하게 하였는데, 지은 사람은 하나둘이 아니었으나 책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선왕의 모유(謀猷)를 그대로 따라서 문화(文化)를 크게 선양(宣揚)하시어 역사를 수찬(修撰)하면 모름지기 해박(該博)하게 갖추기를 요한다 하시고, 다시 국(局)1133) 을 열고 재차 엮어서 가다듬게 하였으나, 아직도 기차(紀次)1134) 의 정(精)하지 못하고 또 빠진 것도 많은데, 하물며 편년(編年)은 기(紀)·전(傳)·표(表)·지(志)와 달라서 사실을 서술(敍述)하는 데 그 본말(本末)과 시종(始終)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에 용렬(庸劣)하고 우매(愚昧)한 신(臣)들에게 명하시어 찬술(纂述)을 맡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 범례(凡例)는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본받았으며,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모조리 성재(聖裁)1135) 에 품신(稟申)하였습니다. 본기(本紀)를 피하고 세가(世家)로 한 것은 명분(名分)의 중함을 보인 것이요, 위조(僞朝)의 신씨(辛氏)를 낮추어 열전(列傳)에 넣은 것은 참절(僭竊)1136) 에 대한 형벌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 충녕(忠佞)1137) 과 사정(邪正)을 유(類)별로 나누고,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을 유(類)대로 모으니, 통기(統紀)도 문란하지 않고 연대(年代)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사적(事迹)은 상세하게 밝히기를 다하려고 힘썼고 궐류(闕謬)1138) 된 부분은 반드시 보완(補完)하고 교정(校正)하도록 하였습니다. 슬프다! 옥서(玉署)1139) 에서 연참(鉛暫)1140) 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세종께서는〉 홀연히 승하(昇遐)하시였습니다.[鼎湖弓劍之忽遺]1141)
신(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려, 머리를 조아려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그 원대한 계책을 이어받으시어 큰 공렬(功烈)을 더욱 빛나게 하셨습니다. 유정 유일(惟精惟一)1142) 하시어 성학(聖學)이 그 고명(高明)을 극(極)하셨고, 비현 비승(丕顯丕承)1143) 하시어 효도(孝道)의 지극하심이 그 계술(繼述)에서 나타났습니다. 전대의 일이 아직 성취하지 못함을 생각하시어 미신(微臣)으로 하여금 이를 책임지고 이루도록 하시니, 신 등이 다같이 천박한 재질로서 와람하게도 융중(隆重)하신 부탁을 받고, 혹은 패관(稗官)1144) 의 잡록(雜錄)을 채택하기도 하고, 비부(秘府)1145) 의 고장(故藏)을 들추어서 3년간 노고를 다하여 드디어 일대(一代)의 역사(歷史)를 완성하였습니다. 이에서 전대(前代)의 남긴 자취를 상고한다면, 겨우 필삭(筆削)의 공정함만이 있을 뿐이나, 후인에게 밝은 귀감(龜鑑)을 보이어서 그 선악(善惡)의 실상을 잃지 않도록 기(期)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를 편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경들과 같이 속히 이룬 적은 아직 없었다. 이와 같은 큰 전적(典籍)을 수년이 안되어 잘 지어서 바치니, 내가 대단히 가상히 여긴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음식을 내려 주고 인하여 김종서 등에게 말하기를,
"춘추관(春秋館)의 일은 이미 끝났는가?"
하니, 김종서 등이 아뢰기를,
"이는 전사(全史)입니다. 그 번거로운 글을 줄이어 편년(編年)으로 사실을 기록한다면 읽어 보기가 거의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속히 편찬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25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
- [註 1109]권계(勸戒) : 타이르고 경계함.
- [註 1110]
편간(編簡) : 책.- [註 1111]
동토(東土) : 우리 나라를 일컫는 말.- [註 1112]
광종(光宗) : 고려 4대 임금.- [註 1113]
임헌(臨軒) : 임금이 정좌(正座)에 나아가지 않고 임시로 평대(平臺)에 나아가는 것. 즉 여기서는 임금이 친히 과장(科場)에 납시는 것을 말함.- [註 1114]
목종[宣讓] : 고려 제7대 목종(穆宗)의 시호가 선양(宣讓)임. 목종 때 정사를 잘못하여 김치양(金致陽)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목종이라 하지 않고 깎아서 내린 것임.- [註 1115]
현종(顯宗) : 고려 8대 임금.- [註 1116]
문종(文宗) : 고려 11대 임금.- [註 1117]
후사(後嗣) : 대를 이은 자식.- [註 1118]
인종(仁宗) : 고려 17대 임금.- [註 1119]
권한이 아래 사람에게 있었던 일[倒太阿] : 명검(名劍)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고 그 자루를 남에게 주는 것으로 자기의 권한을 남에게 주는 것을 말함.- [註 1120]
의종(毅宗) : 고려 18대 임금.- [註 1121]
거간(巨姦) : 크게 간악한 사람.- [註 1122]
원종[孝順] :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의 시효가 효순(孝順).- [註 1123]
충렬왕(忠烈王) : 고려 25대 임금.- [註 1124]
충숙왕(忠肅王) : 고려 27대 임금.- [註 1125]
공민왕(恭愍王) : 고려 31대 임금.- [註 1126]
위조(僞朝) : 신우(辛禑)·신창(辛昌).- [註 1127]
진주(眞主) :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註 1128]
간난(艱難) : 어려움.- [註 1129]
정부(貞符) : 천명(天命)이 나타난 상서(祥瑞)의 징험.- [註 1130]
구허(丘墟) : 폐허(廢墟).- [註 1131]
《통감(通鑑)》 : 《자치통감》.- [註 1132]
수교(讎校) : 다른 것과 대조하여 교정함.- [註 1133]
국(局) : 전문 관청.- [註 1134]
기차(紀次) : 기록한 연대의 차례.- [註 1135]
성재(聖裁) : 임금의 재가.- [註 1136]
참절(僭竊) : 분에 넘치는 직위를 가짐.- [註 1137]
충녕(忠佞) : 충신과 간신.- [註 1138]
궐류(闕謬) : 빠지고 잘못됨.- [註 1139]
옥서(玉署) : 옥당(玉堂). 곧 집현전(集賢殿).- [註 1140]
연참(鉛暫) : 문필(文筆)의 업(業).- [註 1141]
[鼎湖弓劍之忽遺] : 황제(黃帝)가 용(龍)을 타고 하늘에 오른 곳을 정호(鼎湖)라고 하며, 황제가 하늘을 오를 때 활[弓]을 떨어뜨렸고, 그 장사지낸 교산(橋山)에서는 빈 관(棺)에 칼[劍]만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로서, 임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뜻함.- [註 1142]
유정 유일(惟精惟一) :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하나로 함.- [註 1143]
비현 비승(丕顯丕承) : 문무(文武)를 크게 나타내고 크게 받듦.- [註 1144]
패관(稗官) : 민간의 풍설과 소문을 수집하던 말단 관원.- [註 1145]
비부(秘府) : 궁중의 도서 비기(秘記).○庚寅/知春秋館事金宗瑞等, 進新撰《高麗史》, 世家四十六卷, 志三十九卷, 年表二卷, 列傳五十卷, 目錄二卷, 其進箋曰: "臣等竊聞, 新柯視舊柯以爲, 則後車鑑前車而是懲, 蓋已往之興亡, 實將來之勸戒, 玆紬編簡, 敢瀆冕旒。 惟王氏之肇興, 自泰封以崛起, 降羅滅濟, 合三韓而爲一家, 舍遼事唐尊中國, 而保東土。 爰革煩苛之政, 式恢宏遠之規。光廟臨軒策士, 而儒風稍興, 成宗建祧立社, 而治具悉備。 宣讓失御, 運祚幾傾, 顯濟中興之功, 宗祏再定, 文闡大平之治, 民物咸熙。 迨後嗣之昏迷, 有權臣之顓恣。 擁兵而窺神器, 一啓於仁廟之時, 犯順而倒大阿馴致於毅宗之日。 由是巨姦迭煽, 而置君如棊奕, 强敵交侵, 而刈民如草菅。 孝順定大難於危疑, 僅保祖宗之業。 忠烈昵群嬖於遊宴, 卒構父子之嫌。 且自忠肅以來, 至于恭愍之世, 變故屢作, 衰微益深, 根本更蹙於僞朝, 歷數竟歸於眞主。 我大祖 康獻大王, 勇智天錫, 德業日新。 布聖武而亨屯艱克, 綏黎庶握貞符, 而乘乾御肇造邦家。 顧麗社雖已丘墟, 其史策不可蕪沒, 命史氏而秉筆倣《通鑑》之編年, 及太宗之繼承, 委輔臣以讎校, 作者非一, 書竟未成。 世宗莊憲大王遹追先猷, 載宣文化, 謂備史須要該備, 復開局再令編摩, 尙紀次之非精, 且脫漏者亦夥, 況編年有異於紀、傳、表、志, 而敍事未悉其本末始終? 更命庸愚, 俾任纂述。 凡例皆法於遷史, 大義悉稟於聖裁。 避本紀爲世家, 所以示名分之重, 降僞辛於列傳, 所以嚴僭竊之誅。 忠佞邪正之彙分, 制度文爲之類聚, 統紀不紊, 年代可稽。 事迹務盡其詳明, 闕謬期就於補正。 嗟! 玉署鉛暫之未訖, 而鼎湖弓劍之忽遺。 臣宗瑞等誠惶誠恐, 稽首稽首, 恭惟主上殿下, 誕紹宏圖, 增光洪烈。 惟精惟一, 聖學極於高明, 丕顯丕承, 至孝彰于繼述。 念前事之未就, 令微臣以責成, 臣等俱以譾才, 叨承隆寄, 採稗官之雜錄, 發秘府之故藏, 祗竭三載之勞勒成一代之史。 稽遺迹於前代, 僅能存筆削之公, 揭明鑑於後人, 期不沒善惡之實。" 上曰: "春秋館撰史非一二度, 未有如卿等之速成也。 如此大典, 曾未數歲, 善撰以進, 予甚嘉之。" 遂命饋之, 仍謂宗瑞等曰: "春秋館事, 已畢乎?" 宗瑞等啓曰: "此全史也。 當節其煩文, 編年紀事, 庶可便於觀覽耳。" 上曰: "然。 其速纂修。"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25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
- [註 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