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의 노략질에 대비한 수비 방어의 조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제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중국 사람 당귀(唐貴)·장순(張順) 등이 그 공사(供辭)에서 일컫기를, ‘우리들이 지난해 8, 9월 사이에 이만주(李滿住)·범찰(凡察) 등의 관하 사람들에게 사로잡혔다가, 금년 6월에 밤을 타고 도망해 나와, 낮에는 다니고 밤에는 쉬면서 5일 만에 이산(理山)땅에 이르렀습니다. 이만주가 일찍이 혼하(渾河)에서 거주하다가 금년 3월에 달달(達達)과 요동(遼東)의 군마(軍馬)를 두려워하여, 부하를 거느리고 혼하 남방 10일 정도(程度)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왕천(枉天)땅으로 주거를 옮겼습니다. 왕천으로부터 남방 2일 정도 거리의 지명은 오미하(五味何)요, 오미하로부터 남방 반일 정도(半日程度) 거리의 지명은 파저강(婆猪江)1001) 인데, 파저강으로부터 왕천까지는 도로가 험하지 않고 그 사이에 비록 내와강이 있어도 인마(人馬)가 모두 통행할 수 있습니다. 오미하 서쪽에 올라 산성(兀剌山城)이 있는데, 이만주의 관하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오른쪽 산성이 험준하여 서쪽의 요동도 두렵지 않고 북쪽의 달달도 두렵지 않으나, 다만 남쪽 조선(朝鮮) 군마가 매우 두렵다. 그러나, 피난할 만한 땅이 이곳만한 데가 없어 금년 추수 후에는 꼭 이곳에 와서 살아야겠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위의 항목의 이만주 등이 이주한 곳이 본국의 후문(後門)1002) 과 서로 대단히 멀지도 않고 적도들의 통로가 평탄하다 하는데, 이만주 등이 옛 원한을 잊지 않고 허소(虛疎)1003) 한 틈을 타고 돌입해 와서 도둑질을 할까 염려됩니다. 그 수비 방어와 조건을 마련하여 뒤에 기록합니다.
1. 구령(仇寧) 이상의 각처에는 크고 작은 성보(城堡)1004) 에 인민이 둔취(屯聚)1005) 해 살고 있으며 연대(煙臺)1006) 가 서로 보이고, 또 저쪽의 산천이 험준하여 도로가 불통하고 있어 각기 별도로 포치(布置)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얼음이 완전히 얼어붙었을 때에는 수령(守令)·만호(萬戶)는 각각 그 성보 안에 상시로 인물(人物)이 출입하는 때 이외에 전가족이 출입하는 사람과 빙로(氷路)를 통행하는 사람들을 엄히 그 금단(禁斷)하기를 더합니다.
1. 구령 구자(仇寧口子)는 천호(千戶)가 해빙(解氷)한 뒤에 적당한 수효의 군졸을 거느리고 후망(候望)1007) 해 경계하고 얼음이 완전히 얼어붙으면 소삭주(小朔州)의 목책(木柵)으로 물러가 지키라고 일찍이 이미 이첩(移牒)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얼음이 얼었을 때에도 그대로 머물러 지키고 성식(聲息)이 긴급한 연후에 본주(本州)의 목책으로 물러가 지키게 합니다.
1. 청수 만호(靑水萬戶)는 군졸을 거느리고 방어하다가 얼음이 완전히 얼고 어떤 성식이 있기를 기다린 뒤에 정녕 읍성(定寧邑城)으로 들어가 지키는 것이 비록 전례로 되어 있으나 지금부터는 얼음이 얼었을 때에도 역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관망해 살피고 큰 성식이 있은 연후에야 정녕 읍성으로 물러가 지키게 합니다.
1. 전죽동 구자(箭竹洞口子)는 전에는 해빙(解氷)한 뒤에 백호(百戶)나 천호(千戶) 중에서 적당한 수효의 군인을 거느리고서 농민을 수호하고, 얼음이 얼면 도로 읍성(邑城)으로 들어갔는데, 지금부터는 그 군사의 인솔이 불과 10명이라서 그대로 머물러 멀리 관망하며 살피게 합니다.
1. 정녕(定寧)의 옥강(玉崗)에 이미 행성(行城)1008) 을 설치한 바 있어 얼음이 얼어붙은 뒤에도 천호(千戶)가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멀리 관망하면서 살피게 합니다.
1. 의주 수구(義州水口)의 구자(口子)1009) 는 전에는 본주의 천호가 얼음이 풀린 뒤에 마군(馬軍) 4, 50명 가량을 거느리어 농민을 수호하고 얼음이 얼어붙으면 도로 읍성으로 돌아갔는데, 이제부터는 비록 얼음이 얼어붙더라도 10명이 넘지 않는 군사를 인솔하고 그대로 머물러 관망하며 살피게 합니다.
1. 의주(義州) 경내(境內)의 옛 정주 석성(靜州石城)은 의주의 천호가 석성 안에 거주하는 군졸을 인솔하고 얼음이 얼거나 풀리거나를 막론하고 이미 상시 방어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산(麟山)의 신보(新堡)도 만호(萬戶)를 보내어 상당량의 군사를 인솔하고 역시 옛 정주(靜州)의 예에 의하여 상시 관망하며 살피게 합니다.
위의 항목의 각처는 모두 요해지(要害地)입니다. 해빙한 뒤에 농민을 수호할 때의 군사의 수효는 본시 전례에 의할 것이나, 얼음이 언 뒤에는 다만 멀리 관망해 살필 따름이라 군졸의 수효가 10명을 넘지 않으므로, 각각 그 부근의 각 마을 인민으로 우선 자주 체대(遞代)1010) 케 하여 수고롭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19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註 1001]파저강(婆猪江) : 동가강(佟佳江).
- [註 1002]
후문(後門) : 조선조 때 동북면(東北面) 여진(女眞) 지역과 통하던 관문(關門). 북문(北門).- [註 1003]
허소(虛疎) : 허전하고 미덥지 않음.- [註 1004]
성보(城堡) : 성과 요새.- [註 1005]
둔취(屯聚) :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음.- [註 1006]
연대(煙臺) : 조선조 세종(世宗) 때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변방(邊方)에 설치한 봉수대(烽燧臺). 적이 침입하면 연기를 올리거나 신포(信砲)를 쏘아 사람들을 성(城)이나 보(堡)에 들어가 피하게 하였음.- [註 1007]
후망(候望) :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피며 경계함.- [註 1008]
행성(行城) : 변방(邊方)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직선(直線)으로 쌓은 성(城).- [註 1009]
구자(口子) : 압록강(鴨綠江)이나 두만강(豆滿江) 연안에 소규모의 군사 시설을 갖춘 요해지(要害地).- [註 1010]
체대(遞代) : 서로 돌려 바꾸어 대신함.○議政府啓: "今被擄逃來唐人唐貴、張順等供稱: ‘吾等去年八九月間, 爲李滿住、凡察等管下人所擄, 今年六月乘夜逃出, 晝行夜歇, 五日至理山地面。 滿住曾居渾河, 今年三月, 畏達達及遼東軍馬, 率部下移居渾河迤南十日程枉天地面。 自枉天以南二日程地名五未何, 吾未何以南半日程地名, 婆猪江, 自婆猪江至枉天, 道路不險, 其間雖有川河, 人馬皆可通行。 吾未何西邊有兀剌山城, 滿住管下人等常言, 右山城險阻, 西不畏遼東, 北不畏達達, 唯南邊朝鮮軍馬甚可畏。 然避亂之地, 莫如此處, 今年秋收後, 當來居于此。’ 以是觀之, 上項滿住等移居處, 與本國後門, 不甚相遠, 且賊路平易, 滿住等不忘舊釁, 乘虛突入, 作賊可慮。 備禦條件, 磨勘後錄。 一, 仇寧以上各處, 則大小城堡, 人民屯聚居生, 烟臺相望, 且彼邊山川險阻, 道路不通, 不必各別布置。 但氷合時, 守令、萬戶, 各其城堡內, 常時人物出入時外, 擧家出入人, 及氷路通行人等, 嚴加禁斷。 一, 仇寧口子, 千戶解氷後, 量率軍卒候望, 氷合則退保小朔州木柵, 曾已移牒。 然雖氷合時, 仍留守禦, 聲息緊急然後, 退保本州木柵。 一, 靑水萬戶, 率軍防禦, 待氷合有聲息後, 入保定寧邑城, 雖爲前例, 自今以後, 氷合時亦令仍留, 候望檢察, 有大聲息然後, 退保定寧邑城。 一, 箭竹洞口子, 前此解氷後, 百戶、千戶中, 量率軍人, 守護農民, 氷合則還入邑城, 今後率軍不過十名, 仍留候望考察。 一, 定寧之玉崗, 已設行城, 氷合後千戶率軍十名, 候望考察。 一, 義州水口口子, 前此本州千戶, 解氷後量率馬軍四五十, 守護農民, 氷合則還歸邑城, 今後雖當氷合, 率軍不過十名, 仍留候望考察。 一, 義州境內古靜州石城, 義州千戶, 率石城內居住軍卒, 旣勿論氷合氷解, 常時防禦。 今麟山新堡, 差萬戶, 量率軍士, 亦依古靜州例, 常時候望考察。 上項各處, 皆是要害之地。 解氷後, 農民守護時, 則軍數固依前例, 合氷後則候望考察而已, 軍數不過十名, 各以附近各里人民, 爲先頻數遞代, 不使勞困。" 從之。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19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註 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