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 판서 허후가 포도패 설치를 건의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허후(許詡)가 이뢰기를,
"중외(中外)에 도둑이 성행[興行]하니, 청컨대 경중(京中)의 군사로 포도패(捕盜牌)를 만들어 수색하여 잡도록 하소서."
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다. 하연(河演)·황보인(皇甫仁)·남지(南智)는,
"허후가 아뢴 바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은,
"근래 경기(京畿) 각 고을에 군졸을 보내어 도둑을 잡게 하였으나, 혹 잘못 걸린 자가 있어, 고신(拷訊)644) 할 즈음에 근심하고 원망하는 자가 없지 않습니다. 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의금부(義禁府)가 다 도둑을 막는 관아(官衙)이므로 도둑을 잡는 조건도 자세히 아는데, 다만 관리(官吏)가 봉행(奉行)에 게으를 따름입니다. 이제 비록 포도패를 따로 설치하더라도, 그 졸도(卒徒)가 삼사(三司)645) 의 사령(使令)에 미치지 못하며, 그 모략(謀略)도 삼사의 관리보다 못하며, 문견(聞見)도 삼사의 이목(耳目)만 못하므로, 능히 간사(姦邪)를 적발하여 포악(暴惡)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밤낮으로 순행(巡行)하여 여염을 시끄럽게 할 뿐이며, 급도(給到)646) ·상직(賞職)의 청(請)도 따라서 일어날 것이니, 각년(各年)의 포도(捕盜)에 관한 분부를 더욱 엄하게 하여 시행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다만 오부(五部)의 관령(管領)들이 도둑의 앙갚음을 두려워하여 말을 머뭇거리고 고하지 않으니, 모름지기 밀고(密告)하게 하여 문득 덮쳐 잡아서 죄를 다스리면 도둑의 무리가 스스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안숭선(安崇善)은,
"도둑의 횡행이 서울에서 더욱 심하니, 연곡지하(輦轂之下)647) 에 이런 나쁜 풍속이 있음을 참으로 성치(聖治)의 누(累)가 됩니다. 신이 일찍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이던 때에 지정(至正)648) 조격(條格)을 조고(照考)하니 포도관(捕盜官)·포도졸(捕盜卒)이라 칭하는 것이 있었고, 《대명률(大明律)》에도 이르기를, ‘당해 응당 체포하여야 할 궁병(弓兵)649) 으로서 한 달 안에 강도(强盜)를 잡지 못한 자는 태(笞) 20, 두 달이면 태 30, 석 달이면 태 40에 처하고, 포도관은 봉전(俸錢) 두 달을 벌징(罰徵)하며, 궁병으로서 한 달 안에 절도(竊盜)를 잡지 못한 자는 태 10, 두 달이면 태 20, 석 달이면 태 30에 처하고, 포도관은 봉전 한 달을 벌징한다.’ 하였습니다. 원(元)나라와 명(明)나라는 도둑을 다스리기를 매우 엄하게 하여, 간혹 율문(律文) 외의 형벌을 썼어도 오히려 막아내지 못하였으므로 특별히 포도관과 그 병졸을 두었습니다. 신이 이에 의거하여 의논드려서 청하기를, ‘의금부 낭관(義禁府郞官) 2, 3인을 더 두어 본부의 잡무는 제외하고 군사 각각 10여 인을 나누어 소속시켜 포도관이라 칭하여 소문에 따라 재빨리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되 잘해내는 자는 상주고 못해내는 자는 벌하면, 그들 역시 자기의 책임이라 생각하여 늘 스스로 마음껏 할 것이며, 도둑이 비록 흉악할지라도 만약 관(官)을 두어 도둑을 잡는다면 영(令)을 들으면 반드시 스스로두려워 움츠릴 것입니다.’ 하여, 곧 윤허를 받아 드디어 거행할 것을 의논할 즈음에 이를 반박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포도(捕盜)라고 관직을 이름지어서 후세에 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여, 일이 정지되어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虞)나라650) ·주(周)나라의 시대에는 교화(敎化)가 행해져서 풍속이 아름다왔으므로 천하의 사람이 모두 군자(君子)가 되었을 듯한데도, 오히려 ‘구(寇)651) 하며 적(賊)652) 하며 간(姦)653) 하며 궤(宄)654) 한다.’ 하고, 또, ‘간특(姦慝)655) 을 힐문(詰問)하며 포란(暴亂)656) 을 형벌한다.’ 하였으니, 그 때에도 도둑이 있었음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 태평한 치세(治世)를 일컫는 자가 다 우(虞)나라·주(周)나라를 말하니, 지금 비록 포도(捕盜)라고 관직을 이름짓더라도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재(聖裁)로 시험하고야 말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은 김종서(金宗瑞) 등의 의논을 따라 몇 해 시행하다가 효과가 없으면 안숭선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96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註 644]고신(拷訊) : 고문.
- [註 645]
삼사(三司) :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 [註 646]
급도(給到) : 도(到:근무 일수의 하나치)를 주던 일.- [註 647]
연곡지하(輦轂之下) : 왕도(王都).- [註 648]
지정(至正) : 원(元)나라 순종(順宗) 지정년간(至正年間)에 만든 법규- [註 649]
궁병(弓兵) : 원(元)·명(明) 때의 주현(州縣)에 속한 하역(下役).- [註 650]
우(虞)나라 : 순(舜)임금의 나라.- [註 651]
구(寇) : 무리를 지어 침공하여 겁탈하는 행위.- [註 652]
적(賊) : 사람을 죽이는 행위.- [註 653]
간(姦) : 밖에서 일어나는 악한 행위.- [註 654]
○刑曹判書許詡嘗啓: "中外盜賊興行, 請令京中軍士, 作捕盜牌, 搜捕。" 下政府, 議之。 河演、皇甫仁、南智以爲: "宜如詡所啓。" 金宗瑞、鄭苯以爲: "近來於京畿各官, 或遣軍卒捕盜, 然或有誤繫者, 栲訊之際, 不無愁怨。 刑曹、漢城府、義禁府, 皆禁盜之官, 捕盜條件, 亦爲纖悉, 但官吏怠於奉行耳。 今雖別設捕盜牌, 其卒徒不及三司之使令, 其謀略亦下三司之官吏, 其聞見不若三司之耳目, 其不能發姦禁暴, 明矣。 但晝行夜巡, 騷擾里閭而已, 紿到、賞職之請, 又從而起矣, 莫若申嚴各年捕盜之敎而行之。 但五部管領, 畏盜報復, 囁嚅不告, 須令密告, 輒掩捕治罪, 則賊徒自不敢肆矣。" 安崇善以爲: "盜賊之行, 京都尤甚, 輦轂之下, 有此惡俗, 實爲聖治之累。 臣嘗爲刑曹判書, 照考至正條格, 有稱捕盜官、捕盜卒。 《大明律》亦云: ‘當該應捕弓兵, 一月不獲强盜者笞二十, 兩月笞三十, 三月笞四十, 捕盜官罰俸錢兩月。 弓兵不獲竊盜者笞一十, 兩月笞二十, 三月笞三十, 捕盜官罰俸錢一月。’ 大元、大明, 治盜甚嚴, 間用律外之刑, 尙不能禁, 故特置捕盜官與其兵卒。 臣據此獻議, 請: ‘加設義禁府郞官二、三人, 除本府雜務, 以軍士各十餘人, 分屬稱爲捕盜官, 使隨其所聞, 輒行搜捕, 能者賞之, 不能者罰之, 則彼亦以爲己任, 常自盡心。 盜雖凶頑, 若聞設官捕盜之令, 則必自畏縮矣。’ 乃蒙兪允, 遂議擧行, 間有駁之者, 云: ‘以捕盜名官, 不可垂之後世。’ 事寢不行。 臣竊思之, 虞、周之世, 化行俗美, 天下之人, 宜若盡爲君子, 而猶曰: ‘寇賊姦宄’, 亦曰: ‘詰姦慝, 刑暴亂’, 則當時亦有盜賊, 從可知矣。 然後之稱大平之治者, 皆曰: ‘虞、周’, 今雖以捕盜名官, 有何不可? 伏望聖裁, 試可乃已。" 上曰: "姑從宗瑞等議, 行之數年而無效, 可從崇善議。"
-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96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註 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