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현의 읍성을 가을에 고정리에 옮겨 쌓도록 하다
이보다 앞서, 거제현(巨濟縣) 사람이 상언(上言)하기를,
"본읍(本邑)이 예전에는 섬 안의 수월리(水月里)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었으나, 지난 병오년525) 에 사등리(沙等里)로 옮겨서 관사(館舍)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건설하는 일이 무진년526) 에 이르러 끝났는데, 이제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鄭苯)의 심정(審定)으로 말미암아 또 고정리(古丁里)로 옮기려 합니다. 본읍의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가 이미 모두 토착(土著)하여 번성한데 이제 고을을 옮기게 한다면 영선(營繕)에 끝이 없으니, 바라건대 옮겨 설치하지 말아서 민생(民生)을 편안하게 하고, 만약 부득이하다면 뭍으로 나가 옮겨 살게 하여 장구(長久)한 일을 도모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병조(兵曹)에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도체찰사의 계본(啓本) 안에, ‘고정 부곡(古丁部曲)은 평평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샘이 넉넉하여 농사 짓고 살 만한 곳이 많으며, 또 각포(各浦)의 중앙으로 요충(要衝)인 땅이니, 여기에 고을을 두어야 마땅합니다.’ 한 것을, 이미 일찍이 계하(啓下)하여 명(命)을 내려 10월부터 고을을 옮기기 시작하여 성을 쌓고 있는데, 지금 고을 사람이 올린 상언은, 청컨대 청리(聽理)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읍성(邑城)이 북쪽 한 구석에 있거니와, 당초에 심정할 때에 따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관사(館舍)·성지(城池)도 모두 완고(完固)하니, 아직 예전대로 두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정부(政府)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니, 우참찬(右參贊) 안숭선(安崇善)은 생각하기를,
"신(臣)이 을축년(乙丑年)527) 에 순찰사(巡察使)로서 순행하다가 거제에 이르러 읍성의 지세(地勢)가 낮고 바다 어귀에 가까이 있음을 보고서 환란(患難)을 당할 것이 두려웠으므로 옮겨 설치하자는 의논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영등(永登)의 옥포(玉浦)·지세포(知世浦)와 우도 수영(右道水營)의 둘러 있는 섬과 벌려 있는 진(鎭)과 함께 기각(掎角)528) 이 되고, 고성(固城)의 당포(唐浦)도 서로 바라보이는 데에 있으므로, 큰 변이 갑자기 일어나지 못합니다. 신의 뜻으로는,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신 몇 해 동안은 안정(安靜)에 힘쓰셔야 하나, 성곽(城廓)은 완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만 그 긴완(緊緩)을 헤아려 먼저 긴급한 곳을 쌓은 뒤에, 읍성을 여기에 옮겨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 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 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는 생각하기를,
"성안에 샘이 매우 적어서 성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고여 둡니다. 청컨대 추수를 기다려, 지금 정한 성터 안의 샘의 근원과 산의 형세를 다시 살펴서, 만약 옮겨 설치하는 편리가 옛 성보다 갑절이면 옮겨 쌓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 지구(持久)하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모름지기 올 가을에 서둘러 옮겨 설치해야 하는가? 아직 2, 3년 멈추었다가 점차로 옮겨 설치해야 할 것인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거제는 바다 가운데 섬으로 바로 적이 들어오는 길에서 처음으로 대면(對面)하는 곳에 해당하여 아주 긴요하니, 올 가을에 옮겨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왜 호군(倭護軍) 등구랑(藤九郞)이 몰래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박가대(博加大)·일기주(一岐州)의 왜인이 함께 의논하기를, ‘조선이 우리 죄 없는 족친(族親)을 잡아서 질곡(桎梏)529) 하여 중국으로 보낸다.’ 하여, 거제를 쳐서 보복(報復)하고자 한다."
하였으므로, 이 의논이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85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왜(倭)
- [註 525]병오년 : 1426 세종 8년.
- [註 526]
무진년 : 1448 세종 30년.- [註 527]
○先是巨濟縣人上言: "本邑舊在島內水月里, 設木柵, 去丙午年, 移于沙等里, 建設館舍, 修築城池之功, 至戊辰年, 乃訖。 今因都體察使鄭苯審定, 又欲移于古丁里。 本邑人吏官奴婢, 已皆士著阜盛, 今使移邑, 則營繕無窮。 願勿移設, 以安民生, 如不得已, 則出陸移居, 以圖長久。" 命下兵曹。 至是, 議政府據兵曹呈, 啓: "都體察使啓本內: ‘古丁部曲, 寬平谷密, 泉井有餘, 可耕可居之地, 甚多。 且當各浦中央, 要衝之地, 宜於此置邑。’ 已曾啓下, 令自十月, 始移邑築城, 今邑人上言, 請勿聽理。" 上曰: "今邑城在北邊一隅, 當初審定之時, 無乃別有深意乎? 館舍、城池, 亦皆完固, 姑仍舊何如?" 令政府更議。 右參贊安崇善以爲: "臣於乙丑年, 以巡察使, 行到巨濟, 目擊邑城地勢卑下, 濱於海口, 被患可畏, 移設之議, 誠是。 今更思之, 永登 玉浦、知世浦, 右道水營環島、列鎭, 共爲掎角, 固城 唐浦, 亦在相望, 大變不能遽起。 臣意以爲, 殿下初卽位數年之間, 務要安靜, 然城郭不可不完, 但量其緊緩, 先築緊處之後, 移此邑城, 亦未晩也。" 令議政河演、左議政皇甫仁、右議政南智、左贊成金宗瑞以爲: "城內水泉甚少, 引流城外而貯之。 請俟秋成, 更審今所定城基內泉源、山形, 若其移設之利, 倍於舊城, 則移築。" 上曰: "沙等里邑城, 泉井不足, 賊若曠日持久, 則奈何? 今不改築則已矣, 若改築則宜移古丁里。 予意已定, 須於今秋, 汲汲移設乎? 姑停二、三年, 漸次移設乎? 更議以啓。 僉議啓: "巨濟在海島, 正當賊程始面, 極爲緊要, 今秋移築爲便。" 上從之。 前此, 倭護軍藤九郞潛通書曰:
博加大、一岐州 倭人共議以爲: "朝鮮捕我輩無罪族親, 械送中原", 欲伐巨濟以報之。
故有是議。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85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왜(倭)
- [註 526]